기사입력시간 : 2007-06-03

日 역사바꾸기 과정
日 역사바꾸기 과정  



일본의 교과서 역사 왜곡은 그 시발점이 사실상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 950년대 중반 일본내 재군비론 등장을 계기로 우익 진영이 당시 교과서의 '침략' 기술을 문제삼아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던 것이그것이다.이른바 우익의 '1차 교과 서 공격'이다.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선봉으로 한 우익의 이번 교과서 역사 왜곡책 동은 3차 교과서 공격에 해당한다.2차 교과서 공격은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에 걸쳐 그야말로 파상적으로 전개됐고 그 결과는 한국, 중국 등 주변 당사국의 거센 반발을 자초했던 1982년의 '교과서 파동'으로 이어졌었다.



이처럼 전후 일본의 교과서 문제는 각각 3차례에 걸친 우익 진영의 공격과, 이에 맞선 일본내 양심세력 및 한국, 중국의 공동 방어 등으로 점철돼 왔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한마디로 역사의 시계추처럼 한 쪽이 밀리면 다시 공격을 가하고 다 른한 쪽이 밀리면 반격을 가하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전후 일본 교과서의 역사 기술이 처음부터 뒤틀려 있었던 것은 아니다.일본 역사 교육자 협의회의 이시야마 히사오(石山久男) 사무국장에 따르면 패전 직후 일본교 과서에는 비록 그 내용은 충분하지 않았지만 일본군이 난징(南京)에서 자행했던잔 학 행위에 대한 기술 등이 있었다.



우익의 1차 교과서 공격은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일본의 재군비와 자위대 창설을 낳은 1953년의 '이케다-로버트슨' 회담이 공격의 구실로 이용됐다.재군비 정당화 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위해 우익 정치인들이 당시의 이같은 교과서 기술을 문 제삼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맞서, 우리가 통상 '일본내 양심세력'으로 부르고 있는 이른바 '호헌파'진영 의 반격이 시작된 것은 60년대 중반이었다.최근 2001년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된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87) 도쿄 교육대 교수가 자신이 집필한 교과서에 대 한 문부성 검정이 부당하다며 검정 불합격 처분 취소 등을 요구하는 1,2차 소송을 65년과 67년 제기한 것이다.



이 '이에나가 소송'을 계기로 교사, 학부모, 시민, 연구자, 문화인, 출판 노조 등 을 중심으로 교과서의 역사 왜곡 시정 등을 위한 반격이 전국적으로 전개됐고, 그 결과가 '검정 불합격 처분 취소'라는 이에나가 교수의 승소 판결(1970년)로 나타 났다.이 판결로 문부성의 교과서 검정에는 제동이 걸렸으며, 침략 전쟁 등 일본의 가해 사실이 교과서에 등장하게 됐던 것도 이에나가 소송 덕택이었다.



일본의 가해사실을 부각시킨 교과서 기술에 위기감을 느낀 우익 정치세력과 재계, 승공(勝共)연합 등이 이른바 2차 교과서 공격에 나섰다.심지어 자민당은 가해사 실 등을 기술한 교과서를 아예 추방하기 위해 '교과서 통제 법안' 국회 상정까지 추진했다.



문부성이 '침략'을 '진출'로 바꿔쓰라고 지시한 사실이 드러나 외교 문제로 비화 됐던 82년의 교과서 파동은 바로 이 과정에서 나왔다.



우익 진영의 2차 공격에 대한 반격은 한국, 중국 등 당사자들이 앞장선 것이 특징 이었다.일본 정부는 교과서 검정 문제가 한일, 중일 관계를 위협하는 외교 문제로 번지자 '근린제국 조항'이라는 정치 외교적 타협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고, 교 과서에 '침략'이라는 용어도 어쩔 수 없이 허용했다.



'새 역사 교과서…모임'을 앞세운 우익의 3차 교과서 공격은 96년 중반부터 본격 개시됐다.'종군위안부' 기술 삭제 요구로 시작된 이번 공격은 근린제국 조항이라 는 국제 공약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던 교과서 파동 굴복에 대한 대반격이자 총공 세의 성격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셈이다.



<도쿄연합>



2001년 4월 4일
  기사입력시간 : 2007-06-03

이 뉴스클리핑은 http://dokdocenter.org/dokdo_news/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