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 2007-05-16

조선족 정체성’의 위기















조선족 정체성’의 위기

요즘 많은 사람들이 조선족 위기설을 거론한다.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고 집단 거주지(집거지구)가 무너져 민족 고유의 전통이 허물어지므로 민족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가임 여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데다 그나마 자녀를 하나씩밖에 낳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방화된 사회의 농촌에서는 여러 가지로 뒤떨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도시로 나가지 않을 수 없는 탓도 있다. 그 결과 인구는 격감하고 집거지구는 무너져 민족의 위기가 도래한다고 아우성인 것이다. 아무리 아우성을 쳐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



그런데 정녕 더 큰 위기는 따로 있다. 즉, 조선족 가운데서도 지식인들의 민족 의식 약화 내지 부재가 더 큰 위기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조선족 지식인들이 자기 민족인 조선족을 지키겠다는 확고한 의지만 있으면 극복할 수 있다.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민족의 숫자는 물론 집단적으로 거주하며 민족 고유의 전통을 가꾸어가는 생활 방식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중심에 ‘나는 조선족이다. 조선족으로 살겠다’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다면 나머지는 모두 다 허깨비이다.



만주족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만주족의 경우, 민족 의식이 약하여 그들의 말을 잃고 전통도 잃고 마침내 민족까지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옌지(延吉) 시내에서만 조선족이면서 한족소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1600여명이라고 한다. 9개나 있는 조선족소학교는 정원을 못 채워 야단인데 비해 한족소학교는 만원인데도 자꾸 조선족 아이들이 전학 오겠다고 하여 골머리를 앓는다.



자녀를 한족소학교로 보내는 조선족은 그래도 경제적 여유가 다소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왜 한족소학교로 보내는가? 어릴 때부터 한어를 잘 배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자기들이 한어를 잘 못해서 받은 불이익을 자식에게만은 물려주지 않겠다는 절박한 생각 때문인 것이다. 누가 이 부모의 한 맺힌 마음을 그르다 하겠는가? 충분히 동정이 간다. 어차피 중국 공민으로서 살아야 할 아이들인데 이 곳에서 잘 살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문제는 심각하게 이어진다. 소학교 6년을 한족학교에 다니면 그들의 모어(母語)는 한어(漢語)가 된다. 그리고 조선어는 거의 잊거나 서투르게 된다. 한어가 모어가 되면 자연스레 한족화한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는 까닭이다. 설령 그러하다 하더라도 그들이 앞으로 중국에서 잘 산다면 괜찮다. 그게 그리 쉽지를 않은 까닭은, 사람은 자기 정체성에 맞게 생활해야 정서적·심리적으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등지에서 사는 교포 2, 3세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미국인들이 보기에는 겉은 노랗고 속은 하얀 이른바 ‘바나나족’이라는 그들이 잘 살고 있는가? 그들의 정신적 불행을 남들은 모른다. 이런 문제라면 우리는 한족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들은 세계 어디에 가서 살아도 자기들의 언어를 지키고 나아가 민족을 지킨다. 그들은 한인소학교가 멀어 기숙을 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소학교로 보낸다. 그렇게 하여 그들의 말을 지킨다. 민족을 지키는 것이다.



그들도 미국에서 살아 가자면 영어를 잘해야 출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비록 얼마간의 불이익이 있더라도 자기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래야 참으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 대학에도 조선족이면서 조선어를 모르는 학생이 더러 있다. 한족들이 이들을 아주 무시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들의 사고로는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그처럼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의지, 나아가 자긍심이 강하다.



그런데 지금 조선족은 그 숫자가 지키는 게 아니라 비록 갖가지 불이익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조선족이다. 그러니 조선족으로 살겠다. 내 자식도 조선족으로 키우겠다”는 정체성이 지켜내는 것이다. 이런 정신이 약하기 때문에 ‘조선족 위기’설이 떠도는 것이다. 이런 의식이 없는 조선족은 아무리 많아도 민족에게 공헌하지 못하는 정체 불명의 민족적 미아일 뿐이다.



몇 해 전, 참 가슴 뿌듯한 이야기를 들었다. 조선족소학교가 학생이 적어 문을 닫고 아이들을 모두 한족소학교로 보내게 됐을 때 이야기이다. 몇몇 학부모는 이를 거절하고 기숙을 시켜가면서까지 몇 십 리나 떨어진 향 소재지 조선족소학교에 보낸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굳이 자녀들을 조선족소학교로 보내는 이유는 오직“조선족 자식은 조선말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단순한 신념이 조선족을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민족은 민초(民草)들이 지켜온 것이다. 이런 민초들이 있는 한 조선족은 전세계 곳곳에 계속 살아 있을 것이다.



[안병렬 / 연변과학기술대 교수·한국어] 2004.11.3. 문화일보

  기사입력시간 : 2007-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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