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 2007-04-16

[기사] 1419년 이종무 장군 대마도 정벌














부산과 일본 대마도(쓰시마 섬) 간의 거리는 49.5km인 반면 대마도와 일본 본토 후쿠오카와의 거리는 134km다.


대마도는 그 거리가 드러내듯 섬이 생긴 이래 일본보다는 한반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 왔다. 대마도에는 한국에서 건너온 고대 신(神)들을 모신 신사가 곳곳에 있다. 북서쪽 해안에는 지금도 한국의 부산 마산에서 떠밀려온 한글이 적힌 과자 봉지, 페트병이 가득하다.


섬의 97%가 산지인 척박한 땅 대마도는 왜구들의 소굴이었다. 왜구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무려 500여 차례나 우리 땅을 침입해 노략질을 했다.


참다못한 세종은 1419년 삼군도체찰사 이종무 장군에게 전함 227척과 1만7000명의 수군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할 것을 명한다. 당시 조선 수군 총 5만 명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조선 최대의 원정군이었다.


그해 6월 20일 거제도의 견내량을 떠난 조선 수군은 해류를 타고 단 하루 만에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에 도착했다.


왜구에게는 천혜의 요새였던 아소우(淺茅) 만을 점령한 조선군은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宗貞盛)에게 항복을 종용했으나 듣지 않았다. 상륙작전을 감행한 조선군은 적선 129척과 가옥 2000여 채를 불태우고 왜구 120여 명을 죽인 뒤, 중국인 포로 131명을 구출하는 대승을 거두고 한 달여 만에 철수한다.


이후 대마도주는 1436년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자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하고 도주를 태수로 봉했다.


또한 그의 아들 소 시게요시(宗成職)는 조선의 관직인 종일품 판중추원사 겸 대마주도제사로 임명했다. 이 관직은 왜구들의 준동을 막아내는 의무를 지게 한 대신, 일본에서 조선으로 도항하는 모든 선박에 대해 문인(文引·도항증명서)을 발행하는 권한을 가졌다. 이후 대마도는 19세기 후반 메이지(明治)유신 때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편입된다.


대마도 사람들은 임진왜란 이후 200년간 지속된 조선통신사 일행의 수발을 들며 한일 양국의 문화, 경제교류에 큰 역할을 했다. 매년 8월 첫째 일요일 대마도 전역에서는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한 ‘아리랑 마쓰리’도 열린다. 올여름에는 대마도로 떠나 섬 곳곳에 숨겨진 한국 역사의 흔적을 찾는 여행을 해 보면 어떨까.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2006. 6. 20. 동아일보

  기사입력시간 : 2007-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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