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 2017-03-23

[하도겸의 문예노트] 우리에게 대마도란?

우리나라도 본격적인 다문화시대에 접어들었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귀화가 늘어나면서 우리에게는 생소한 ‘새로 생긴 가문’들이 또다른 ‘코리안 드림’을 꾸고 있다. 법원으로부터 창성창본(創姓創本·성과 본을 새로 짓는 것) 허가까지 마친 그들의 얼굴 생김새나 피부색은 달라도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어엿한 우리 국민이다. 외국인은 귀화 후 성과 본을 적어 넣기만 하면 새로운 성씨의 ‘시조’가 될 수 있다. 그 가운데는 ‘대마도 윤씨’도 있다.



우리 조선 태종과 세종조에 문무를 겸비한 덕장 최윤덕(崔潤德 1376~1445) 장군이 있었다. 서로들 하고 싶은 재상의 직을 수여받고도, 무과 출신의 무관(무반)으로서 재상의 직에 나아갈 수 없다는 소를 올렸다. 하지만 허락되지 않아 1435년에 재상인 좌의정(정1품)까지 오른 이른바 왕후장상의 그 ‘장상(將相)’이 되었다. 영의정 황희가 없었다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까지 올랐을 최윤덕 장군은 실제로 영의정과 다름없는 역할을 수행했다. 김종서 장군과 함께 북방 4군6진을 개척했던 그는 전쟁터에서는 로마의 스파르타쿠스보다도 용감한 장수였을 것이다. 평상시에는 성품이 자애롭고 근검해서 공무의 여가를 이용, 묵은 땅에 농사를 지을 정도로 요즘말로 텃밭 가꾸기의 귀재이기도 했다. 설화인지 사실인지 구분이 어렵지만 그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남편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여인의 호소를 듣고 호랑이를 잡아 배를 갈라 남편의 뼈를 찾아 장사를 지내게 해 준 일로도 유명하다. 그런 그가 1419년(세종 원년)에 의정부참찬으로 삼군도통사가 되어 체찰사 이종무(李從茂)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때 상왕인 태종은 대마도 도주에게 “대마도는 경상도의 계림에 속했고 본디 우리나라 땅”이라고 적시했다. 조선시대 초기만해도 대마도는 우리땅이었나보다.


   

▲ 사진은 하늘에서 바라본 대마도 일부, 2001년 하도겸 촬영.



1488년 당시 명나라 사신이었던 동월(董越)이 영종의 명을 받아 조선 땅을 둘러본 뒤 작성한 견문록 ‘조선부(朝鮮賦)’이란 책이 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조선팔도총도(朝鮮八道總圖)’라는 지도에는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로 표기돼 있다. 이외에도 몇 개 더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에게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듣기만 해도 좀 신이 나는 이야기다.

일제강점기에는 대마도 섬 어부들은 일본보다도 세배가 가까운 부산으로 나와서 영화보고 돌아가 자랑하기도 했다고 한다. 대마도 사람들이 하는 일본어에는 왠지 모르게 우리 한국어 억양이 미묘하게 섞여있는 듯 하다고 한다. 전근대사회에서는 ‘왜구’로 등장해 약탈을 일삼던 대마도 섬 주민들이 우리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는 부산으로의 밀수로 경제생활을 지탱했다고도 하는 정말 가까운 섬이 대마도다.


탄핵의 시절,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지금과 달리, 염치(廉恥)를 알고, 고종께 흥선대원군을 물러나라고 탄핵상소를 올린 분이 우리 역사교과서에 실려 있다. 상소로 인해 제주도로 유배된 면암 최익현은 강화도 조약 체결도 반대하여 흑산도로 유배된다. 구국항일투쟁의 상징이 된 면암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7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라북도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모집해 곡성과 순창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했다. 진위군에 고종황제의 관군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항전을 포기하고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그의 세계관으로는 아무리 왜병이 밉더라도 황제의 군대에 칼과 창을 겨눌 수 없었던 모양이다. 대마도에서는 의자왕15년(655년) 백제의 비구니 법명스님이 유마경을 독경하며 병을 고친 후 세운 절이라고 전해지는 수선사에 머물렀다. 하지만, “어찌 원수의 밥을 먹고 살겠느냐”며 단식투쟁을 벌이다 1906년 11월 17일 유배된 지 4개월여만에 병으로 순국했다. 돌아가신 후 버선 속에서 나온 한 줌의 조선의 흙을 통해서 일본 땅조차 밟지 않으려 했던 면암의 충심과 성심을 읽을 수 있다.


   

▲ 사진은 하늘에서 바라본 대마도 일부, 2001년 하도겸 촬영.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속한 695㎢ 규모의 작은 열도가 대마도이다. 대한해협에 위치하며, 우리나라 부산에서 50km 정도, 일본 규슈(九州) 본토와는 132km 떨어져 있어 우리에게 지리적으로 보다 친근한 곳이기도 하다. 상도(上島), 하도(下島)의 두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산에서 대마도를 볼 때 두 마리의 말이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지명이 대마(對馬)라고 불리어졌다고 한다. 이름조차도 우리가 만든 이 섬이 고려 말부터 조공(朝貢)을 하고 그 대가로 미곡(米穀)을 받아갔다. 우리 조정에서도 섬나라 주민들이 불쌍하기도 하고 왜구가 되지 않게 회유하기 위하여 많이 우대하여 주었다고 한다.

12세기에서 1868년까지 이 섬은 대명(大名) 소씨[宗氏]의 봉토였다. 1274년과 1281년에 몽골의 침입을 받았으며, 1861년에는 러시아가 대마도의 토지사용권을 확보하려고 시도한 바도 있다. 1905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대마도(쓰시마) 해전에서 패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올 봄, 이런 지정학적인 전략적 요충지인 대마도를 찾아 길을 떠나보려고 한다. [시사위크 2017.03.21]



독도본부 2017.03.23 www.dokdocenter.org

  기사입력시간 : 2017-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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