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 2016-08-04

풍향계-대마도는 경제권을 쥔 조선이 주인이었다
요즘 대마도는 한국인 관광객으로 붐빈다. 이 들은 마치 대마도의 경제를 살리려는 기세다. 옛날 조선 조정에서도 대마도의 70%의 식량을 책임지고 있었다. 툭하면 육지로 올라와 해적질을 해대는 왜구들의 본거지이고 보니 차라리 구호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국가시책이었다. 그러니까 경제력으로 대마도를 통제하여 복속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복속(服屬)과 반역을 자주 오고갔다.



태종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두드리면 쏙 들어갔다가 금방 머리를 쳐드는 두더지 오락기 같은 왜구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방책을 세우기가 쉽지 않았다. 이 때 왜구 출몰로 골머리를 앓던 명나라에서 첩보가 날아들었다. 조선을 거쳐 대마도 등지의 왜구를 섬멸하기 위해 군대를 출정시키겠다는 것이었다.



태종은 결단은 오히려 쉽고 단호해졌다. 명나라 군대의 뒤치다꺼리하다가 기둥뿌리가 뽑히기 전에 직접 왜구를 퇴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종무를 시켜 대마도 징벌을 나서기 전“대마도는 본시우리 땅이다.(對馬島本是我國之地)”라는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종무의 군대가 대마도에 입성하였다.



대마도의 왜구들이 저희들의 배로 착각하는 바람에 첫 번째 입도공략(入島攻略)은 아주 쉽게 성공하였다. 이 때 이종무는 두 가지 실수를 한다. 그 첫 번째가 왜구와 주민들의 소유를 구분하지 않고 배와 집을 불태워 조선 조정에 대한 적대감을 키운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총공세를 취하지 않고 상륙부대를 제비뽑기로 선정하였으며 이 돌격부대가 위태로워졌다는 연락을 받고도 군선에 남아서 아무런 조취를 취하지 않은 점이다. 물론 이 때문에 많은 군사들이 죽게 되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이종무 군대는 10일 만에 소정의 전과를 올리고 한양으로 돌아와 태종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환대는 잠시 뿐 난리법석이 일어났다. ‘공격부대 제비뽑기’가 발각된 것이다. 그는 귀양길에 올랐다. 이종무에게 있어 대마도는 눈물의 섬이 되고 말았다. 만약 제비뽑기를 했다 해도 적절한 지원 공세만 취했어도 귀양살이는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며 만약이라고 가정해 보는 일은 어리석다. 그렇지만 만약에 태종대왕이 대마도로 출정하는 이종무 장군에게‘대마도주 도도웅아를 파직한다. 이종무는 왜구를 축출하고 대마도주에 임하라’ 라고 징벌과 행정 책임을 함께 명하였으면 어떠했을까?



대마도주들은 조선과 일본의 양속 관계를 유지하려들었다. 국력이 강해진 곳의 눈치를 더 많이 살피곤 하였다. 특히 조선의 도움 없이 대마도 경제를 유지할 수 없었으므로 대마도도주들은 조선의 군신이 되고자 요청하였다. 적어도 풍신수길이 이전은 더욱 그러하였다. 1591년 풍신수길은 33만의 병력을 동원하였고 대마도의 청수산에 조선 침략 병참기지를 만들고 있었다. 대마도주 종의지는 끽소리 못하고 병참기지 축성공사에 주민들을 동원하였다. 이제 경제력보다 군사력이 무서워 진 것이다.



1591년 음력 1월 28일 대마도에는 13 개월간의 일본 정탐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조선의 통신사 일행이 묶고 있었다. 도주 종의지는 전쟁을 막고 싶었다. 정사 황윤길에게 전쟁 징후 증거품으로 조총 두 자루를 구해 주었다. 부사 김성일은 서산사에서 현소와 글을 지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현소는 풍신수길에게 조선의 정보를 제공하는 간첩질을 하는 중이었다.



청수산성은 대마도의 어느 집에서도 다 올려다볼 수 있다. 그런데 김성일만 청수산성 축성소리를 듣고 보지 못했단 말인가. 1951년 3월 1일 김성일은 황윤길과 상반된 보고를 한다.‘황윤길은 거짓보고 하고 있습니다. 풍신수길은 절대 전쟁을 일으킬 위인이 못됩니다.’그래도 만약에 김성일의 거짓보고가 없었더라면, 대마도주 종의지가 5000명의 대마도인을 강제 동원하여 임진왜란에 참여하는 배신 따위는 없었을까? [동양일보 2016.08.01]



독도본부 2016.08.04 www.dokdocenter.org

  기사입력시간 : 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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