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시간 : 2011-05-30

제2부 (2) 츠쿠시보코(筑紫矛)「일본」을 뒷받침

 「왜 이 섬에 츠쿠시보코(筑紫矛)가 있지?!」


 1948년 여름, 고고학 연구자들로 조직된 동아고고학회(東亜考古学会)가 쓰시마(対馬)를 조사했을 때의 일이다. 참가자 중 한명인 히구치 다카야스(樋口隆康)・교토대 명예교수(91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츠쿠시보코(筑紫矛)는 야요이시대 후기(약1800년 전)에 현재의 후쿠오카현 등, 북부 큐슈(츠쿠시지방)에서 활발히 생산된 광형동모(広形銅矛 : 청동제 무기의 일종. (銅鉾)이라고도 씀. 동모는 동검과 함께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적을 찌르는데 쓰는 무기이다. 생긴 모양은 검과 비슷하지만 창날과 자루집 2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긴 나무를 꽂아 쓸 수 있도록 끼우는 부분의 속은 비어있음)를 말한다. 무기로 끝부분을 뾰족하게 한 조선반도제와는 달리, 날을 평평하게 한 제사(祭祀)용으로 큐슈문화권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조선반도 남단으로부터 불과 50킬로미터에 위치한 쓰시마는 반도기운이 강하다고 여겨지고 있는 만큼 대량의 큐슈계통의 동모(銅矛)는 고고학상의 대발견이 됐다.


 다만, 이 점에 가장 주목한 건 뜻밖에도 외무성이었다.


 「이거라면 쓰시마는 고대부터 일본영토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현지조사종료 후, 히구치 등이 교토대에서 동모(銅矛)를 조사하고 있는데 연구실을 방문한 외무성담당자가 확인했다. 패전으로부터 3년. 영토는 아직 유동적인 시기였다.


 「외무성 사람이 무척 기뻐했죠. 설마 우리의 발굴이 영토와 엮일 줄은 몰랐죠」라는 히구치 씨.


 쓰시마의 조사는 전시 중에 중국과 조선반도의 유적조사를 활발히 실시했던 동아고고학회의 의지이기도 했다.


 「전쟁에 져서 대륙조사를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제일 가까운 장소를 해보자」며, 쓰시마가 선정됐다. 메이지 이후는 군사요새로 사용되어 발굴은커녕 사진촬영도 허용되지 않았던 섬이었다.


 조사는 1948년 8월부터 1개월간 시행되어 신사(神社)에 전해지는 보물 등을 조사. 야요이시대(弥生時代)의 동모(銅矛)와 동검(銅剣) 등, 총 87개를 확인하고, 광형동모(広形銅矛)가 67개, 조선반도제 세형동모(細形銅矛)는 1개밖에 없었다. 야요이시대의 쓰시마는 이미 큐슈문화권이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뒷받침되었다.


 전후 직후 식량난의 시대. 조사를 위해 배급 쌀을 지참했지만 도민들은 「본토에서 온 학자님」이라며 집에 머물게 해주거나 야채를 나눠주거나 했다고 한다.


  쓰시마에는 현재 광형동모(広形銅矛)가 국내최다인 130개 이상 있다. 왜 이렇게 대량으로-. 조선반도와 큐슈로의 항행안전을 위해서 라고도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야요이시대를 대표하는 동탁(銅鐸 : 청동기 시대부터 쓰기 시작한, 방울 소리를 내는 의기(儀器). 몸체는 원뿔대를 누른 모양이며 단면은 은행 알 모양이고 위에 반원형 고리가 달려 있음)은 경계를 메워서 자신들의 나라를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켰다고 한다. 쓰시마의 동모(銅矛)도 조선반도와의 「국경」을 의식해 메워졌던 것일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신기하죠」라는 히구치 씨.


 쓰시마 조사로부터 약 60년. 센카쿠제도와 다케시마(독도) 등, 또다시 일본영토가 위협받고 있다. 「쓰시마의 전례를 모방하여 이 섬들을 발굴한다면 언제부터 일본의 영향 하에 있었는지 알 수 있을지도」라는 히구치 씨. 「영토문제도 고대의 시점에서 따라가 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도본부 2011.05.30 www.dokdocenter.org

  기사입력시간 : 2011-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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