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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전쟁을 한다면 언제 끝낼건가?'

일본-중국 흥망의 키, 류큐③-제2차 일 제국주의 출항지, 류큐

청나라는 류큐를 일본에 빼앗기지 말라는 미국의 조언을 무시했다

요즘 중국은 과거 3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마치 300년 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시절의 대청제국 같다. 점(點)을 돌려달라는 게 아니라 선(線)과 면(面)을 통째로 삼키고 싶다고 공공연히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중국은 지금 중일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센카쿠(첨각(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만 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최근 중국 일각에서는 센카쿠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沖繩, Okinawa)를 포함한 140여개 류큐(瑠球, Ryukyu) 전체가 중국 영토라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 가고 있다. 2009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한 국제심포지엄에서는 쉬융(徐勇) 베이징대 교수를 비롯한 중국 역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돋웠다.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강압에 의한 1879년의 류큐 병탄, 2차 세계대전 후인 1972년 미국의 오키나와 반환 등은 국제법상 근거가 없으니 센카쿠는 물론, 류큐 군도내 140여개 섬과 해역 전체를 송두리째 중국에 반환해달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류큐를 중국 영토라는 주장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가 2006년 이후 다시 수십 편의 논문을 비롯한, 언론 학계의 주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중국당국은 묵인을 넘어 조장 내지 권장하고까지 있다는 동향마저 감촉되고 있다. 도대체 중국의 이런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필자 주>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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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넓은 일본의 키, 류큐
2. 제1차 일본제국주의의 은신처, 류큐
3. 제2차 일본제국주의의 출항지, 류큐
4. 제3차 불침 항공모함의 출항지, 류큐
5. 이중 종속 왕국, 류큐의 흥망사
6. 30년 터울, 일제의 류큐와 조선의 병탄사
7. 좁은 중국의 족쇄, 류큐
8. 류큐와 미국 대통령들
9. 독도와 다케시마, 센카쿠와 댜오위다오
10. 동북공정과 류큐
11. G2시대 중국, 해양대국화로 몰입하다
12. 중국 차세대 팽창목표는 류큐와 동해?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의 진원지는 류큐의 윤택한 해상무역자금을 수백년간 흡수하며 세력을 길러온 사스마(薩摩· 현재 가고시마)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7~1877)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1830~1878), 메이지 유신의 두 주역, 역시 사스마 출신이다.

사이고는 메이지유신의 장본인이면서도 일본의 서구화에 회의를 느끼고, 사무라이 후예로서의 봉건적 향수를 떨치지 못한 채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정국의 안정, 국력충실의 준비기간 없이 곧바로 조선을 침략하고자 하였다,

오쿠보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등과 함께 태평양을 건너 미국을, 미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영국과 독일 등 구미제국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그는 특히 통일독일을 이룬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그들 일행에게 들려 준 훈수,‘국제사회에서는 윤리도 없고 정의도 없다. 오로지 군사력과 관료제를 치밀하게 강화해나가는 길만이 부국강병의 첩경 ’이라는 대목에 깊은 감명를 받았다. 오쿠보는 독일에서 일본이 나가야 할 길을 발견하였다. 그는 서남 해역의 배후를 튼튼히 하는 류큐 병합 우선 노선을 주장하고 자유민권운동가들과 타협하면서 정국안정을 기하였다.

일본제국호의 첫 출항지 선정문제로 오쿠보는 마치 1609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류큐를 공격하여 이중속국화한 것처럼 류큐병탄론을 주장함으로써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흡사한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를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축출했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인들은 대체적으로 도쿠가와보다 도요토미를 존경하고 있듯, 오쿠보도 사이고를 의리의 혁명가로 숭앙하고 있다.

1872년 오쿠보는 메이지유신 축하사절단을 파견하라고 류큐에 압력을 넣어 류큐 사절 일행을 동경으로 불러들였다. 류큐국왕을 일본귀족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다는 칙서를 내렸으며 류큐를 일본 외무성 관할하에 둔다고 발표하였다.

1875년 오쿠보는 외무대신 마쓰다 미츠유키(松田道之)를 류큐에 파견해 청나라에의 조공을 금지할 것과 류큐가 맺은 미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와 맺은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과 일본식으로 류큐의 법제를 변혁할 것을 강요하였다. 왕국의 수명이 경각에 달렸음을 직감한 류큐 왕은 1877년 4월, 청나라에 임세공(任世功) 등 3인의 밀사를 파견하여 원조를 청하였다. 이에 청나라 조정은 귀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만 주일 공사 하여장(何如章)이 “일본이 류큐를 취하고 나면 그 다음 차례는 조선일 것이다. 지금 일본은 서남전쟁 뒤인지라 피폐해 있고 청나라가 해군력이 우세를 점하고 있다. 류큐에 함대를 파견하여 무력으로 일본을 축출하자”며 강경론을 펼쳤다. 그러나 당시 최고 실권자 이홍장(李鴻章)은 먼 바다에 떨어진 몇 개의 섬들 때문에 군사력을 동원할 수 없다며 류큐의 구조요청을 외면하였다. 절망에 빠진 류큐의 밀사 임세공은 베이징에서 류큐왕국이 있는 동남방을 향하여 삼배한 후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30년 터울, 일본의 류큐와 조선 병탄사]편에서 상술예정)

1879년 4월 4일은 오백년 동북아의 해상왕국, 류큐의 마지막 날이다. 이 날, 오쿠보의 직계 마쓰다는 ‘류큐 처분관’ 자격으로 군경 600여명을 이끌고 류큐의 수도 슈리성을 무력 점령하였다. 반발하는 류큐의 고관들을 모조리 체포 고문하고 막대한 보물과 문서를 약탈하였다. 류큐‘왕국’을 말소한 자리에 오키나와‘현’을 신설하였다. 류큐인은 이제 `일본인이 되어야 했다.

 
◇ 메이지유신의 두 주역, 가고시마 출신의 오쿠보와 사이고는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오쿠보가 승리하여 류큐를 우선 병탄하게 된다. 

그해 4월 30일 일본은 류큐의 마지막 왕 상태를 동경에 유폐하고 후일 후작 작위를 하사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류큐의 구지배계층을 회유하기 위하여 이들에 대해 토지와 조세체제 등 봉건적인 특권을 인정하고 신분에 따라 사은금을 제공하였다.

이듬해 미국의 18대 대통령을 역임한 그랜트(Ulysses S.Grant,1822~1885, 재임기간, 1869~1877)가 태평양을 건너 청나라로 왔다. 일본의 류큐흡수로 인하여 동아시아 세력의 균형추가 급속하게 일본으로 기울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랜트는 이홍장을 직접 만나 류큐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청나라가 류큐를 포기하여 두고두고 후회할 일은 말아야 한다고 극구 만류하였다.

그랜트는 이홍장에게 류큐의 북부는 일본이, 중부는 청일이 공동 관리하고, 남부는 청나라가 관할하는 이른바 ‘류큐 3분안’까지 제시하였으나 불발로 끝났다.([류큐와 미국의 대통령들]편에서 상술 예정)

결국 일본은 1592-1609년 한반도를 침략함으로써 출발하고 류큐로 잠입하였던 순서와는 거꾸로, 1879년 먼저 류큐를 병탄하여 오키나와현으로 일본 영토화한 것을 일대 전환점으로 삼아, 대륙에 대한 수천년 동안의 콤플렉스를 극복, 팽창주의 제국주의 노선으로 줄달음치게 되었다.

류큐를 병합한지 15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지 300여년 만인 1894년, 일본은 조선의 갑오동학혁명을 구실로 청일 전쟁을 일으키고 청나라로부터 이듬해 4월 대만과 팽호열도를 얻었다. 1905년에는 백년전만 하더라도 나폴레옹을 몰락시켰던 북극곰 러시아와 러일전쟁을 일으켜 사할린 남반부를 얻고 만주(동북)의 조차권을 장악했다. 동북아 지역에 경쟁상대가 없어진 힘의 공백을 틈타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전락시킨 대일본제국은 1910년 8월 29일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완전 병합하여 버렸다.

류큐에서부터 출발한 일제의 군홧발 행진은 끝없이 이어진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14년 일제는 중국의 산둥 반도를 공략하여 독일이 중국에서 점유하고 있던 권익을 그대로 승계하고 여순과 대련의 조차권, 남만주 철도의 권리 기한을 다시 99년간 연장하고 동부 내몽골 남만주 일대의 권익을 획득하였다. 1931년 9월 18일 심양 북쪽 리우타오고우(柳條溝)폭파를 구실로 일본 관동군은 그해 11월 만주(동북)전역을 점령하였다.

1932년에는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괴뢰로 앉혀놓은 만주국을 건설하여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1933년에는 내몽골의 동부와 허베이성의 동북쪽 르허(熱河)지방을 점령하여 만주국에 편입하고, 그해 5월에는 만리장성을 넘어 베이핑(北平, 지금의 베이징)의 대부분을 점령하는 등 중국의 심장부까지 진출하였다. 이미 대일본제국의 판도는 해양을 뺀 육지면적만 치더라도 중국본토보다 훨씬 넓어졌다.

1937년 7월 7일 베이징 남부의 루가오챠오(蘆溝橋) 사건을 계기로 류큐에서 출발할 때부터 엘셀러레이터만 있었지 브레이크가 없었던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 본토를 전면 침공하였다. 그해 11월 당시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여 1개월 여만에 30여만의 양민을 학살하는‘남경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1938년 10월까지 일본은 파죽지세로 산시, 산둥, 허베이, 상하이, 광저우, 우한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일제가 점령한 중국본토는 면이 아닌 선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전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져 돌파구를 찾던 일제는 인도차이나에 진격하여 중국에의 물자수송을 방지함과 동시에 남방진격을 근거지로 마련코자 하였다. 이에 미국은 미일 통상조약을 파기하고 대일 석유수출 금지조치를 취하였다. 1941년 9월 6일 미국과의 전쟁을 결정하는 역사적인 어전회의가 열렸다. 천황은 스기야마 하지메(杉山 元)육군참모총장에게 물었다.

“미국과 전쟁을 한다면 언제 끝낼 자신이 있는가?”

“3개월쯤이면 태평양 전역을 끝장낼 수 있습니다.”

“그까짓 중국에서도 질질 끌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린가?”

“중국이 너무 넓어서 그렇습니다.”

그러자 천황은 큰소리로 질책했다.

“태평양은 중국보다 훨씬 넓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이때 해군 참모총장은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1941년 12월 8일 대일본제국호는 마침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 기습을 감행하였다. 인류 전쟁사상 최대의 전쟁터로 화한 지구 최대의 바다 태평양에서 일본군의 질주는 거침없었다.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얀마, 태국을 점령한데 이어 파푸아뉴기니, 미크로네시아 등 남태평양까지 점령지역을 확대해 갔다.

싱가포르 점령 당시 일제는 일본내지인은 물론 대만과 한국, 만주의 식민지인에게 싱가포르를 닮은 고무공을 선물하는 호기를 부렸다. 연전연승 파죽지세로 공격을 계속한 대일본제국의 최대판도는 과거의 로마제국의 극성기보다 훨씬 넓었다. 해양면적을 포함할 경우 징기스칸의 대원제국에 비견되는 광대무변한 것이었다.

 
◇ 징기스칸의 대원제국에 필적하는 극성기의 대일본제국의 광활한 판도. 출처 http://image.baidu.com/ 

이를 시간과 공간의 각도를 넓게 펼쳐 인류사를 조감해 본다면 태평양전쟁은 각각 지중해와 대서양의 헤게모니를 얻기 위한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과 대영제국과 스페인의 무적함대와의 전쟁처럼, 태평양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내세운 대동아공영권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피지배민족을 탄압하는 대단히 이기적이고 편협한 것으로, 문화적 우월의식이 높은 한국인이나 중국인은 물론 피지배민족의 자발적인 공감과 협조를 불러일으키기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류큐는 일본영토에서 벌어진 유일한 지상전이자 2차 대전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의 현장이 되었다.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군은 원주민에게 집단자살명령을 내리는 등 만행을 저질러 류큐 전체 원주민의 3분의 1인 약 15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무렵 일제는 ‘오키나와를 불침항공모함’이라고 선언하였다. 약 40년 뒤인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일본이 자유진영을 수호하기 위한 불침항공모함이라고 공언하였다.)

그해 4월 1일 류큐의 오키나와를 점령당하자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내각은 붕괴하고, 4월 5일부터 스즈끼 간따로(鈴木貴太郞)의 항복준비 내각이 들어섰다.

이해를 돕기 위해 태평양전쟁을 축구경기에 비유하자면 이렇다. 태평양의 키스톤(Keystone of the Pacific), 류큐를 확보함으로써 노쇠하고 둔중한 중국을 제치고 서태평양의 대표가 된 일본은, 역시 쇠락한 유럽제국을 제치고 서방세계최강대국으로 등극한 동태평양의 대표 미국과의 결승전을 갖는다. 센터서클 하와이에서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기선을 제압하였던 일본은 결국, 류큐를 상실하면서 전의를 잃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 

일본의 패색이 짙어 가던 1943년 11월 23일부터 27일까지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 그리고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카이로에서 전후질서를 구상하며 합의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11월 27일에 나온 카이로 선언이었다. 여기서 3대국은 일본의 영토제한과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개시된 이후로 일본이 탈취, 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도서는 원상회복된다.

2. 만주, 대만, 팽호도 등 일본이 청으로부터 빼앗은 땅은 중국에 반환하여야 한다.

3. 조선은 적당한 절차(in due course)에 의하여 자주 독립시킨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게 되자, 위의 카이로 선언에 따라 일제가 통치하였던 우리나라를 비롯한 만주, 대만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여러 섬들은 광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단 한나라 류큐왕국만은 돌아오지 않는 왕국이 되어 버렸다.

카이로 회담은 류큐 왕국을 부활시키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 왜 장제스는 일본의 태평양 도서의 주권박탈 기산점을 1879년이라 하지 않고 1914년이라 하였는가.

2. 왜 장제스는 만주, 대만, 팽호도와 같이 류큐를 포함시키지 않았는가.

3. 왜 장제스는 류큐의 독립이나 원상회복을 거론하지 않았는가.

이는 필자가 19년 전에 제기하였던 의문이었다. [류큐와 미국의 대통령들]편에서 그 의문의 실마리를 풀고자 한다. [데일리안 2011.01.08 ]

<주요참고문헌>
강효백, “좁은 중국, 넓을 일본”,『동양스승,서양제자』 서울: 예전사, 1992.
高良創吉, 『琉球王國』,東京: 岩波書店, 1993.
上村忠男, 『沖繩の記憶/日本の歷史』,東京: 未來社, 2002.
高之國&8729;張海文, 『海洋國策硏究文集』, 北京: 海軍出版社,2007.
Hook, Glenn D.and Richard Siddle.2003. "Introduction: Japan? Structure and Subjectivity in Okinawa" Glenn D. Hook and Richard Siddle eds. Japan and Okinawa: Structure and Subjectivity.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Curzon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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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만 국립사범대학에서 수학한 후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대학과 중국인민대학, 중국화동정법대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주 대만 대표부와 주 상하이 총영사관을 거쳐 주 중국 대사관 외교관을 12년간 역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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