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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7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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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독도 주장

오키의 『은주시청합기(기)』에 대해

서 두

최근 오키도(隠岐島) 치부무라(知夫村) 신직집안(神職家)에 있었던『은주시청합기(隠州視聴合記)』를 1858년에 옮겼다는 필사본이 발견됐다.

이 사본은 다른『은주시청합기(기)』의「국대기(国代記)」가「일본의 북쪽 경계는 이 주까지로 한다(日本ノ乾地以此州為限矣)」고 하는「차주(此州)」부분이「차국(此国)」으로 되어있는 점이 주목된다.

다시 말해「주(州)」를 「시마(しま=섬)」로 해석하는 연구자와「쿠니(くに=나라)」로 생각하는 연구자의 논쟁이 존재하는 가운데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사본에「차국(此国)」이라 기록된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키에 남아있는『은주시청합기(기)』는 종래 도고(島後)의 오키노시마쵸(隠岐の島町) 가마(釜)의 사사키집안의 책(佐々木家本)과 다나카 도요지(田中豊治)씨가 『오키도사료(隠岐島史料)(근세편)』에 채용된 오키노시마쵸 이마즈(今津)의 핫토리집안(服部家)이 소장하고 있는 필사본이 알려져 있지만, 이 기회에 오키 전체에 존재하는 필사본을 조사해 정리해두고자 한다.                  
 
1. 『은주시청합기(기)』개관

『은주시청합기(기)』는 1667년 마쓰에번사(松江藩士)인 사이토 도요노부(斎藤豊宣)가 쓰고, 그 아들인 사이토 도요히토(斎藤豊仙)가 보정했다고 생각되는 오키지방(隠岐地方)에 관한 가장 오래된 지지(地誌)이다.

이미 나고야(名古屋)대학의 이케우치 사토시(池内敏)씨가 그의 저서인『대군외교와「무위(武威)」(大君外交と「武威」)』를 통해 산실된 것도 포함하면 24종류의 정본, 사본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그 해석 등에도 폭 넓은 시도가 펼쳐지고 있다.

그에 따르면 마쓰에번주(松江藩主)의 직계손인 (松平直亮)가 기증하여 현재 시마네현립도서관(島根県立図書館)이 소장하는 것이 원본 혹은 그에 가까운 것이라고 추정되는 것, 오키 산물의 기재 차이 등, 19군데 차이로 계열을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오키 출신으로 현재 오사카에 거주하는 오니시 토시테루(大西俊輝)씨가『속 일본해와 다케시마(続日本海と竹島)』라는 저서로 자세한 해독을 시도하고 있다.

『은주시청합기(기)』의 내용은 서(序)와 오키 전체를 다룬 1권인「국대기(国代記)」, 도고(島後)를 다룬 2권인 「스키군(周吉郡)」, 3권인「오치군(穏地郡)」, 도젠(島前)을 다룬 4권인「도젠기(島前紀)」로 나뉘며, 2, 3, 4권은 각각의 군(郡)의 향(郷)・촌리(村里) 단위인 지리적 특색과 명소, 옛 유적 등을 소개하고 있다.

4권은 도젠(島前)의 치부군(知夫郡), 아마군(海部郡)에 대해 소개하고 엔키격식(延喜格式)의 진묘쵸(神名帳), 오키국(隠岐国) 내의 신사불사(神社仏寺), 명소를 노래한 와카(和歌), 치부군(知夫郡) 타쿠히산엔기(焼火山縁起), 오키(隠岐)로 유배 온 승려 몬가쿠(文覚)에 대한 논고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서(序)에 이어 목록(목차)과 도고도(島後図), 도젠도(島前図)의 간단한 지도도 기록되어 있지만, 도고도(島後図)에 현재는 울릉도, 당시는 다케시마(竹島)로 불렸던 섬과 현재의 다케시마(독도), 당시의 마츠시마(松島)는 그려져있지 않다.

2. 오키의『은주시청합기(기)』필사본에 대해

(1)사사키집안의 책(佐々木家本)에 대해

사사키집안의 책(佐々木家本)이란 오키(隠岐) 도고(島後) 가마무라(釜村)의 쇼우야(庄屋:쿠몬=公文)였던 사사키집안(佐々木家)에 전해지는 것으로 권말(巻末)에「오키국 스키군 가마무라 쿠몬 19대째 사사키 기치자에몬(후략)(隠岐国周吉郡釜村公文拾九代目佐々木吉左衛門源重延代)」라고, 그것과는 다른 필적으로「비장서 가마무라 사사키 신이치(후략)(秘蔵書 釜村佐々木真一延熙代)」라고 되어 있다.

사이토 간스케(斎藤勘助: 豊宣=도요노부)가 마쓰에번주(松江藩主)인 마츠다이라 츠나다카(松平綱隆)로부터 오키군대(隠岐郡代)로 임명받아 오키에 착임했을 때, 가마무라(釜村)의 쇼우야(庄屋)는 18대 사사키 기치자에몬(佐々木吉左衛門)으로, 그가 협력해 완성한 『은주시청합기(隠州視聴合記)』를 필사하게 하여 19대인 기치자에몬(吉左衛門)이 이름을 기록하여 사사키집안(佐々木家)의 장본(蔵本)으로 삼은 것으로 생각된다.

사사키 신이치(佐々木真一)는 제28대로 1848년에 태어나 1920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이어 제29대 당주가 된 사사키 아키라(佐々木章)씨가 당시의 사이고마치(西郷町)에 기증하여, 현재 오키노시마쵸(隠岐の島町) 교육위원회가 관리하고 있다.

오니시 토시테루(大西俊輝)씨의『속 일본해와 다케시마(続日本海と竹島)』는 이 사사키 책을 저본(底本)으로 삼아 다른 여러 종류의 필사본으로 보충하면서 논고를 펼치고 있다.

시마네현(島根県)의 이시즈카 다카토시(石塚尊俊)씨가 『일본서민생활사료집성(日本庶民生活史料集成)』에 게재한『은주시청합기』도 사사키집안의 책(佐々木家本)을 저본(底本)으로 삼아 후술하는 핫토리가본(服部家本)과 1914년 타니구치 다메지(谷為次)씨가 이즈모문고(出雲文庫)에 게재한 니시노시마쵸(西ノ島町)의 마츠우라가본(松浦家本)으로 보충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이시즈카 씨의 『은주시청합기』는 오키(隠岐) 타쿠히신사(焼火神社)의 칸누시(神主)로, 역사연구자였던 고 마츠우라(松浦康麿)씨가 『은주시청합기(기)』중에서 선본(善本)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사키집안의 책(佐々木家本)은 글자 면에서 기(記)기 「기(紀)」, 도(島)를 「도(嶋)」라는 글자로 통일시키거나, 「飯山ノ南二建福寺ト云アリ」와 같이 가나부분(*밑줄 친 부분)을 가타가나로 쓰고 있는 특색이 있다.

또한 국대기(国代記)의 「行二日一夜有松嶋又一日程有竹嶋」에서 다케시마(竹嶋)란 글자의 행간에 「五十猛嶋ト国史二云」라는 삽입기재가 있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오키의 산물에 대해 많은 사본 등이 칠(漆), 동백나무 열매(椿実), 산초(山椒), 자조(紫藻), 도미(鯛), 정어리(鰯), 방어(鰤), 날치, 고등어(鯖), 전복(石决明), 말린 해삼(乾海参), 오징어(烏賊), 마피(馬皮)를 들고 있지만, 사사키집안의 책(佐々木家本)에는 말린 해삼이 빠져있다. 또한 도고(島後)와 도젠(島前)을 그린 지도인 도고(島後)에는「도고도(嶋後図)」라고 크게 쓰여 있지만, 도젠(島前)에는 그 표시가 빠져있다.

(2)치부무라(知夫村) 구우지(宮司) 사사키집안의 책(佐藤家本)『은주시청합기』(필사본)에 대해

최근 이즈미다이샤(出雲大社)의 신관(神官)이며 국학자였던 토미나가 요시히사(冨永芳久)가 1858년 오키 치부리섬(知夫里島)의 사토(佐藤宮内)집안에 필사해 받았다는 필사본이 발견됐다.

토미나가 요시히사(冨永芳久)는 1813년에 태어난 이즈모다이샤(出雲大社)의 신쇼쿠(神職)로 와카(和歌)를 통해『이즈모국 명소 가집(出雲国名所歌集)』을 썼으며, 모토오리 우치토오(本居内遠)의 사사를 받아 국학을 배운 인물이다.

그가 필사한『은주시청합기』를 소유하고 있었던 사토(佐藤宮内) 집안에 대해서는『오키국 신사비록(隠岐国神社秘録)』이 치부군(知夫郡) 페이지에 「一宮大明神 神主佐藤宮内 郡ノ里ニ在リ、社地広く大松列立り、(中略)知夫村中の産神ニて、造営も村中懸れり、社領高壱石棟札ハ万治二年とあり、(中略)当社ハ国内神名帳なる天佐自彦大明神ニて式ニも天佐志比古ノ命神社とある是也、一宮と云ハ知夫村の一ノ宮なる申の名也とぞ」며, 그 제사(祭司)하는 신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사토집안의 책(佐藤家本)인『은주시청합기』는 목하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 집안이 쇼와기에 화재로 전소된 적도 있어 원본이 발견될 가능성은 낮다.

토미나가 요시히사(冨永芳久)가 오쿠가키(奥書)에 시간을 들여 필사하고, 나아가 시간을 들여 원본과 비교 대조하여 확인하여 고쳤다고 쓰고 있기 때문에 원본에 가까운 것이라 사료되며,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토집안의 책은 목차의 형식과 한자의 음을 가타가나로 달아 놓았고, 오키의 산물에 말린 해삼과 지도표시를 보면 도젠도(島前図)에는「도젠도(嶋前図)」라는 기재가 없는 등, 사사키집안의 책과 같다.

다만 합기(기=紀)의 기(紀)가 기(記)였고, 처음에 기록한 것처럼 「국대기(国代記)」의「일본의 북쪽 경계는 이 주까지로 한다(日本ノ乾地以此州為限矣)」의 주(州)라는 글자가「국(国)」으로 기재되어 있는 차이가 있다.

『은주시청합기』연구에 있어 이 부분의 주(州)를 「시마(しま=섬)」이라 하거나, 「구니(くに=나라)」로 해석하는 가의 논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나라(国)로 기록한 것은 첫 발견이다. 토미나가 요시히사(冨永芳久)가 국학자라는 사실에서 주목하고 싶은 건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그의 저서인 『타마가츠마(玉勝間)』2권에서「나라(国)를 주(州)라 말하는 것」이란 제목으로 주(州)는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에 의한 습관적 한자 활용으로 「나라들의 이름을 ◯◯주(州)라 말하는 건 모두(후략)(国々の名を某州といふことは、いづれの御代の御さだめにもあらざること也)」라며 나라(国)라는 자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고, 토미나가 요시히사(冨永芳久)가 모토오리(本居)집안의 양자인 모토오리 우치도오(本居内遠)에게 사사를 받은 까닭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주장을 따랐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이와미국(石見国) 하마다(浜田)의 학자인 사이토 히코마로(斎藤彦麻呂)도 1809년에 쓴 『제국명의고(諸国名義考)』에「국호를 ◯◯주 등이라 말하는 건 후세의 간교한 유학자 외국을 본떠 쓰기 시작해 확산된 것으로 (일본)조정의 제도는 아니다(国号を何州某刕などといへるハ後世小ざかしき儒者外国に習ひて書き始めて広がりたるにて朝廷の御制にあらず)」라며, 나라(国)라는 자를 사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케우치 사토시(池内敏)씨의 연구에 따르면, 『은주시청합기』에 주(州)란 글자가 66군데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데, 이번 토미나가 요시히사의 필사본에서 그 외의 주(州)를 집중적으로 조사해봤다.

결과는「일본의 북쪽 경계는 이 나라까지로 한다(日本ノ乾ノ地以此国為限矣)」는 부분 이외에 주(州)가 나라(国)로 되어 있는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운주(雲州), 백주(伯州)의 일부는 운리(雲刕), 백리(伯刕)라 필사되어 있었다. 또한 토미나가(冨永)집안은 현존하고 있으며, 최근 『다이샤정사(大社町史)』편찬위원들이 이 집안이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를 조사하여 목록도 만들었는데, 이 중에 『은주시청합기』필사본은 없었다고 한다.

佐藤家本のその他の用語では石决明をその他の本が「あわび」としているのに対し、「イシガレイ」とカタカナのふりがなをつけている。

(3)타쿠히(焼火)신사의 궁사(宮司), 마츠우라(松浦)집안이 소장하고 있는 『은주시청합기』

타쿠히신사(焼火神社)는 현재의 오키군(隠岐郡) 니시노시마쵸(西ノ島町) 미타(美田)의 해발 451.7m인 타쿠히산(焼火山) 정상에 있는 신사다.

『은주시청합기』에도「타쿠히신사엔기(焼火神社縁起)」라는 기재가 있어, 10세기말부터 타쿠히곤겐(焼火権現), 타쿠히산 운조우지(焼火山雲上寺) 등으로 불린 수험영장(修験霊場)으로 항행안전의 수호신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에도시대에 안도 히로시게(安藤広重)가 그린「육십여주명소도회(六十余州名所図会)」에도 그려져있다.

이 신사의 궁사(宮司)를 오랫동안 역임한 마츠우라(松浦)집안에 소장되어 온 『어순견어사참기(御巡見御社参記)』에는 1633(寛永10), 1661년(寛文元), 1681년(延宝9), 1691년(元禄4), 1710년(宝永7), 1712년(正徳2), 1716년(正徳6), 1717년(享保2), 1746년(延享3), 1761년(宝暦11), 1789년(寛政元), 1838년(天保9)에 막부의 순견사(巡見使)가 참배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 마츠우라(松浦)집안에도『은주시청합기』를 소장하고 있었다. 「此本元ハ隠州島前知夫郡●(崎の大が立)(美田村の誤り)雲上寺之什物也、天保六甲未歳ニ伯州会見郡弓ヶ濱上道邑足立玄脩(あだちげんゆう)仲夏上中旬までに写之」이라는 필사본이 돗토리현(鳥取県) 사카이미나토시(境港市) 아즈마(東)집안과 시마네현립도서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아다치 겐슈(足立玄脩)에 대해서는 『오키의 문화재(隠岐の文化財)』1호(1983년)인 「오키국대기고증(隠岐国代記考証)(국대고증(国代考証))에 대해」라는 논문으로 이노우에 히로시(井上寛司)씨가 의사로 오키와 관계가 있었던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오쿠가키(奥書)를 보면 1835년, 아다치 겐슈(足立玄脩)가 오키의 타쿠히곤겐(焼火権現)・운조우지(雲上寺)의 것을 필사해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었지만 1925년에 아즈마(東)집안이 이를 물려받았고, 다시 아즈마집안의 것을 누군가가 1984년에 필사하여 시마네현립도서관에 기증하고 있다.

마츠우라(松浦)집안의 책이 사사키(佐々木)집안의 책 등과 다른 건 지도에 「도젠도(島前図)」라는 표시가 있는 것, 섬(島)이란 글자가 대부분은 「도(島)」지만, 국대기(国代記)의 처음에 오기도(隠岐嶌), 도젠(嶌前)이라고「도(嶌)」,「見高麗如自雲州望隠刕」부분에는「刕」, 시마네군(嶋根郡) 부분에서는「도(嶋)」라는 다른 글자가 혼재하는 등이 있다. 한편 한자의 음을 가타가나로 달아 놓은 것, 오키의 특산물에 「건해삼(乾海参)」이 없는 것 등은 동일하다.

아즈마(東)집안의 책, 시마네현립도서관 소장의 필사본에는 「국대기(国代記)」후에「국대기고증(国代記考証)(국대고증(国代考証))」이 게재되어 있는 특색이 있다.

「국대기(国代記)」는 오키국(隠岐国)에 대대로 이어온 지배자를 적은 부분이지만, 1732년경 이 「국대기(国代記)」만을 별책으로 재검토, 고증한 책으로 이름이 불명확한 인물이 작성한 것이 『국대기고증(国代記考証)』이다. 내용은「視聴合記云、昔対馬守源義親国也、其後薩摩守平忠教在雲州美保関領之者未考也」이라며 처음에 고증의 필요성을 기록하고, 검토를 시작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이노우에 히로시(井上寛司)씨의 논문에 따르면 『국대기고증』은 아마쵸(海士町) 무라카미(村上)집안, 오키노시마쵸(隠岐の島町) 마츠우라(松浦)집안, 오키노시마쵸 요코치(横地)집안, 오키노시마쵸 무라카미(村上)집안에 소장되고 있는 것이 확인됐지만, 다시 별도로 니시노시마쵸(西ノ島町) 마츠우라(松浦)집안에도 당초 소장되고 있었지만 분실하였고, 아다치 겐슈(足立玄脩)가 필사한『국대기고증』이 마츠우라(松浦)집안의 책이라 하겠다.

『국대기고증(国代記考証)』의 작자에 대해서는 이노우에 히로시(井上寛司)씨는「오키에 거주하거나 오랜 동안 오키에 살고 오키에서 사망한 사람(隠岐在住ないし長年隠岐に住み、隠岐で没した人)」, 「도젠의 무라카미, 가사기집안의 자료을 전혀 검토하지 않았기에 도고 오키노시마쵸에 거주했던 사람(島前の村上、笠置家の資料に全く触れていないので、島後の隠岐の島町に居住した人)」, 「검토에『운주수호기(雲州守護記)』,『태평기(太平記)』,『후태평기(後太平記)』등, 폭 넓은 역사서를 읽고 비판적 정신을 가진 사람(検討に『雲州守護記』、『太平記』、『後太平記』等幅広い歴史書を読み、批判的精神をもっていた人)」으로 여겨진다.

또한 마츠우라(松浦)집안의 책의 원본에 대해서는 현재의 마츠우라집안의 당주인 마츠우라 미치히토(松浦道仁)씨의 조부인 마츠우라 시즈마(松浦静麿)씨가「부친이 이즈모문고 편집 때, 편집사업을 했던 신문사에 빌려줬다(自分の父が出雲文庫の編集の時、編集事業を手がけた新聞社に貸与した)」고 수기에 기록되어 있어 타니구치 다메지(谷口為次)씨의 이름으로 남아있는 이즈모문고(出雲文庫)의 『은주시청합기(기)(隠州視聴合記(紀))』의 저본은 마츠우라 집안의 책일 가능성이 높지만, 원본의 소재는 불명확하다.

(4)이마즈(今津)의 핫토리집안 책에 대해

핫토리(服部)집안의 책은 도고(島後) 이마즈무라(今津村)의 쇼우야(庄屋)에서 사이토 간스케(斎藤勘助)에게 협력한 사실이 밝혀진 핫토리집안이 소장하고 있는 책이다.

다만 이 핫토리집안의 자손은 오키를 떠나 간사이 지역으로 이주하고 있어 원본은 오키에는 없다. 처음에 기록된 『오키도사료(隠岐島史料)(근세편(近世編))』이 핫토리집안의 책을 채용하고 있어 이를 통해 고찰하고자 한다.

핫토리집안의 책은 합기(合記)는「합기(合紀)」로 되어 있다. 도젠(島前), 도고(島後)의 첫 지도는 1장에 같이 그려져있다.

「국대기(国代記)」와「타쿠히산엔기(焼火山縁起)」,「몬가쿠론(文覚論)」은 가에리텐(返り点)은 있지만 모두 한자로 그 음은 적고 있지 않다.

2권의「스키군 사이고(周吉郡西郷)」부터는 한자의 음을 히라가나로 적고 있다. 문장배치에서는 「명소와카(名所和歌)」가 마지막 부분에 배치됐다. 사사키(佐々木)집안의 책과 마찬가지로 초기 필사본의 색채를 강하게 남기고 있다.

(5)기타 오키의 『은주시청합기 (기)(隠州視聴合記(紀))』에 대해

타니구치 다메지(谷口為次)씨의 이름으로 남아있는 이즈모문고의 『은주시청합기』는『회귤담(懐橘談)』과 함께 1권이 책으로 제본되어 있지만 오키노시마쵸(隠岐の島町)의 향토사가인 고 나가미 카즈마사(永海一正)씨는『은주시청합기』부분만을 발췌해 1권의 책으로 후세에 남겼다.

아마쵸(海士町)의 거대 쇼우야(庄屋)인 무라카미(村上)집안의 현재의 당주인 무라카미 스케구로(村上助九郎)씨는 자신의 집에도 필사본인『은주시청합기』가 있었지만 오키의 역사자료편찬사업에 제출한 후에 돌려받지 못하고 행방불명됐다고 말한다.


▲사진1: 사토우 종가(佐藤家本) 표지 고대역사박물관 소장


 ▲ 사진2: 국대기(国代記) 부분

Web다케시마문제연구소 2010.10.21

2010.11.26. 독도본부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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