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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중국군사전문가∙히라마츠 시게오

자료가 말해주는「센카쿠는 (일본의)고유영토」

 

센카쿠제도가 분명 일본영토라는 사실을 실증하는 자료집이 2권, 최근 수년 사이에 오키나와에서 출판되고 있다.

나하(那覇)의 센카쿠제도문헌자료편찬회의 『센카쿠연구-고우라학술조사단 자료집(尖閣研究-高良学術調査団資料集)』(상․하권, 2008년)과, 『센카쿠연구-센카쿠제도해역의 어업에 관한 조사보고(尖閣研究-尖閣諸島海域の漁業に関する調査報告)』로, 전저는 700페이지, 후저는 3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양이다.

전저(前著)는 필자가 2008년 3월 3일자 산케이신문 독서난을 통해 소개했다.

전후 5회, 다방면에 걸쳐 행해진 고우라학술조사단(高良学術調査団)의 조사를 통해 섬의 실태가 극명하게 기술되어 있어 매우 흥미롭다.

이 같은 종류의 조사가 전후(戰後) 5번이나 실시된 것도 센카쿠제도에 대한 우리나라(일본)의 실효지배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귀중한 문헌이라 하겠다.

이번에 나온 자료집은 관보, 공문서, 각종 신문기사, 어업∙수산관계자료 등을 토대로 편찬되어 이번 8월에 간행된 것으로 이 자리를 빌어 소개하고자 한다.

≪영토선언 전부터 일본어장≫

센카쿠제도가 일본영토가 된 건 메이지28년(1895년)이다. 그러나 그 이전인 메이지초기부터 오키나와 어민들이 사키시마제도(先島諸島)에 이어 작은 통나무배와 거룻배로 동지나해양 위 멀고 먼 작은 섬을 향해 출어했었다.

센카쿠제도 주변해역은 풍요로운 어장이다. 가장 가까운 해역에서는 청새치, 가다랑어, 돌고래, 상어 등이 쉽게 잡혔다.

파도가 높을 때에는 해수와 함께 물고기가 갑판으로 뛰어 들어왔다.

조어도(댜오위다오=魚釣島) 해안에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구멍이 여럿 있어, 만조가 되면 들어오는 물고기를 막대기로 쫓아내 잡았다고, 고우라조사단원(高良調査団員)은 회상한다.

섬은 신천옹과 기타 야생 조류의 낙원이기도 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약 1000만 마리의 바다 새가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센카쿠제도는 메이지17년(1884년)부터 이시가키섬(石垣島)의 코가 타츠시로우(古賀辰四郎)씨가 한 섬을 제외한 4섬을 일본정부로부터 빌려 조어도(댜오위다오=魚釣島)와 남소도(南小島)에서 가다랑어포 공장과 신천옹의 깃털채취를 생업으로 했었다.

쇼와7년(1932년)에 불하된 것을 받아 코가 씨의 사유지가 됐다. 쇼와15년(1940년), 전쟁이 다가와 코가 씨가 섬을 떠난 이래 무인도로 됐다. 현재는 사이타마현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다.

≪중국의 족적은 전무(全無)≫

중국은 센카쿠제도에 아무런 족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에 비해 이 방대한 자료는 센카쿠제도 주변해역에서의 사카지마제도(先島諸島), 오키나와본섬(沖縄本島) 어민들의 메이지초기부터의 긴 어업활동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센카쿠제도 영유권을 생각할 때 잊어서는 안 되는 귀중한 역사다.

그러나 우리나라(일본) 정부의 대응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소극적이었다.

메이지정부는 메이지초기의「류큐처분(琉球処分)」이래 오키나와의 반대세력과 구종주국이었던 청나라(중국)를 두려워해 오키나와개혁을 서두르지 못했다.

메이지정부의 무사안일주의정신은 센카쿠제도 취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무성의 명령을 받아 메이지18년(), 오키나와현은 「오키나와현과 청나라 후쿠슈(福州)와의 사이에 산재하는」무인도(센카쿠제도)를 조사했다.

그 결과, 청나라 귀속의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아 「무주지(無主地)」로 국표건설(영토편입)을 요망하는 뜻의 상신서가 오키나와현령으로부터 제출됐지만 이노우에(井上馨) 외무경(外務卿)은 반대 태도를 유지했다.

그 후에도 오키나와현으로부터 메이지23년과 26년에 영토편입에 대한 상신서가 제출됐지만 메이지정부는 방치했다.

그리고 청일전쟁의 승리가 확실해진 메이지28년 1월, 갑자기 센카쿠제도에 표항건설(標杭建設)의 뜻은 문제없다는 각의 결정이 내려졌다.

≪정부의 저자세가 위협을 초래하다≫

메이지18년(1885년) 이후, 영토편입까지의 10년 동안에 3번의 조사를 거치면서도 메이지정부는 오키나와현으로부터의 「영토편입」에 대한 상신(上申)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국(청나라)과의 관계를 중시해 도항을 자중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계속 신중하게 조사한 것도 아니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센카쿠제도로 건너간 건 메이지정부와 오키나와현 공무원 등의 조사관계자가 아니라, 사키시마제도(先島諸島)와 오키나와본섬(沖縄本島)의 어부들이었다.

야광패(夜光貝), 신천옹의 깃털 등, 환금성 높은 어획물이 폐번지현(廃藩置県) 후에 오키나와로 유입된 기류상인(寄留商人)에 의해 대량으로 사들여져 나하항에서 수출됐다.

영토편입 이래, 100년이 지난 현재 또다시 일본정부의 중국에 대한 저자세로 센카쿠제도는 주변해역에 빈번히 밀려오는 수많은 어선으로부터의 「중국의 위협」에 내놓이고 있다. 어선이라고 해도 어민을 가장한 민간 병사의 어선이나 무장어선이다.

이들 선박에 의한 침범상태가 계속되고, 어선보호목적으로 중국해군함정의 활동이 전개되게 되면 센카쿠제도는 「중국의 영토」, 주변해역도「중국의 바다」가 되어 사키시마제도(先島諸島)와 오키나와본섬의 어민은 중국정부의 허가를 받지 못하면 조업할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일본정부는 이들 열도 어민들의 메이지시대 이래의 센카쿠제도와 주변해역에서의 활동을 무의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산케이신문 2010.10.13

2010.10.20. 독도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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