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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4월 29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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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쿠쇼쿠대학 학장・와타나베 토시오(渡辺利夫)

현재의 가치관으로 과거를 단죄마라



한국병합(일한병합)조약은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에 발효됐다. 병합100년을 계기로 간 나오토(菅直人)씨의 수상담화가 지난번에 발표됐다. 옛날의 일한관계에 대한 사정을 감안하지도 않고 사죄자체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 같은 담화였다.

≪겸허하고 솔직하며 용기 있는 일일까?≫

「당시의 한국 사람들은 그 뜻과는 달리 행해진 식민지지배로 인해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 식민지지배가 가져온 막대한 손해와 고통에 대해 여기서 새삼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과의 마음을 표명하는 바입니다」

이렇게까지 관여해도 좋을까. 심지어 담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역사에 대해 성실히 마주하고 싶습니다. 역사의 사실을 직시하는 용기와 이를 받아들이는 겸허함을 가지고,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하는 것에 솔직하고 싶습니다」

현재의 가치관을 가지고 옛 일한관계를 바라보며,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됐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째서 겸허하고 솔직하며 용기 있는 것일까. 병합조약은 유효하다는 일본이 조약자체를 무효라고 우기는 한국에 사죄의 말을 아무리 해도 상대(한국)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도의(道義)적으로 자국(한국)이 얼마나 열등했는지 강조하면 할수록 순간의 회피와 비굴함에 스스로를 깊이 빠뜨릴 뿐이다. 현재의 가치관으로 과거를 논하는 잘못된 풍조를 이쯤에서는 깨달아야만 한다.

≪각국과의 합의에 의한 합법적인 통치≫

이조시대 말기의 한국은 때로는 청나라, 때로는 러시아, 때로는 일본에, 주변대국에 의존하려는 「사대주의」경향이 강해 자립과 근대화에 대한 전망이 결여된 정쟁(政争)에만 몰두했다. 당시의 한국은 청나라와 군신관계(청한 종속관계)에 있었으며, 한국 내에서 내란이 일어날 때마다 청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일본이 이를 위협이라 판단한 건 당연하며, 청한 종속관계를 끊기 위한 전쟁이 청일전쟁이었다.

시베리아철도가 완성되기만 하면 러시아가 한반도를 점령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만주(중국 동북부)에 강대한 군대세력을 펼치고 있었고, 대부분의 일본인이 러시아를 「북(北)의 위협」으로 보고 있었다. 러시아에 의한 한반도 점령은 즉, 일본 망국의 위기다. 그렇다면 병합을 통해 한국의 근대화를 도모해 한반도를 굳건히 지키는 일은 일본에게 있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안전보장상의 전략이었다.

러일전쟁이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항해 일본이 한국의 「자유재량권」을 획득하기 위해 싸운 전쟁이다. 자유재량권이란 말은 정말 “노골적인” 표현이지만, 약자에게 「안주의 땅」이 없었던 제국주의시대의 용어법이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자유재량권은 포츠담조약을 통해 러시아에 의해, 또한 일영동맹 하의 영국에 의해 인정받았다. 나아가 일본은 미국과의 사이에서도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영유를 승인하고, 미국이 일본의 한국 통치를 승인하는 가쓰라․테프트협정(桂・タフト協定)을 맺었다. 일본의 한국 통치는 여러 국가에 의해 국제적으로 승인되었으며, 병합으로의 길을 저지하는 것은 없었다. 각국과의 합법적인 노약과 협정에 준거해 일본의 한국 통치가 펼쳐진 것이다.

≪근대화는 일본의 지원에 의해≫

병합은 한국인에게 지금도 계속되는 울적함일 것이다. 일본인에게 있어서도 이런 거친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없었다는 마음은 있다.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 한국의 근대화에 조력하고, 두 나라의 선린관계를 유지하면서 「함께 아시아를 부흥(共に亜細亜を興す)」(후쿠자와 유키치)시키는 우방이 될 수 있었다면 이보다 좋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판단해도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밖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 번째로는 일본의 개국유신과 같은 근대화로 가는 거국일치의 정치적 응집력이 한국 안에서 태어날 가능성을 기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두 번째로는 상당한 군사력을 온존시킨 채 어쩔 수 없이 패배한 러시아가 대일보복 행동을 취하는 것을 일본인을 두려워했다. 일본인이 이 공포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혁명을 통해 로마노프왕조가 완전히 붕괴되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됐다.

한국은 일본의 강압으로 맺어진 병합조약은 무효라고 말하지만, 옛 한국인 중에도 자국의 힘만으로 한국의 근대화를 도모하는 건 무리로, 일본과의 「합방」을 통해 일본의 지원을 받으면서 근대화를 실현하는 것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는 한 무리의 유력한 사람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이용구, 송병준 등을 리더로 하는 「일진회(一進会)」에 모인 사람들이다. 통감부 자료를 통해서도 참가자는 14만 명, 실제로는 수십만 명에 달하는 당시의 한국최대의 사회집단이었다. 수상인 가쓰라 다로(桂太郎)가 (한일)병합을 결심하게 한 게 이들에 의한 합병으로의 요청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논의를 되풀이해도 병합조약이 유효인지 무효인지의 논의를 일한에서 일치시키는 일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얘기되어야 할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여야만 하지 않는가.
 
산케이신문 2010.08.27

*2010.09.18. 독도본부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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