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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앙쿠르대왕’의 비극을 독도에 물려줄 것인가!

- 독도강치학살을 실효지배 근거로 주장하는 일본의 뻔뻔함 -

일본 어부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현재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독도강치를 상징하는 “비극의 리앙쿠르대왕”!

몸길이 2.88m, 몸둘레 3.1m, 예상체중 750kg. 일본 어부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리앙쿠르대왕은 1931년 7월 하순, 결국 일본 어부들의 손에 사살되어 현재 일본 시마네현 ‘산베자연박물관’에 박제로 만들어져 전시되어 있다.


▲그물로 독도강치를 생포하는 일본어부들

1905년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에 의해 남획되어 멸종의 길로 접어든 독도강치는 1974년에 일본 홋카이도에서 1마리가 생포된 것을 마지막으로 현재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확인된 기록이 없다.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할 때마다 ‘독도강치’, 특히 ‘리앙쿠르대왕’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얼까. ‘리앙쿠르대왕’=‘독도강치’라는 단순한 수식을 통해 일본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이 일본에게 빼앗길 위기에 처한 독도의 현실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혹은 일제강점기에 탄압받고 죽임을 당한 우리 선조들의 핍박받았던 저항의 삶을 상징하기 때문에 일본과 독도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비극의 리앙쿠르대왕’이 등장한다고 생각하는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리앙쿠르대왕’이 갖는 위와 같은 상징성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독도문제에서 리앙쿠르대왕이 언제나 함께 등장하는 건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유에서이다. 이유인 즉 독도강치를 대표하는 리앙쿠르대왕은,

리앙쿠르대왕=일본의 독도 실효지배의 근거
리앙쿠르대왕=일본의 독도 영토편입의 근거
리앙쿠르대왕=일본의 독도영유의 국제법적 근거

라는 수식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일본 외무성은 홈페이지를 통해 일본이 ‘다케시마(竹島)’라 부르는 독도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들고 있다.

아래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일본은 적어도 17세기 중반에는 실효지배로 다케시마(독도) 영유권을 확립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며, 1905년 이후에도 각의결정에 따라 근대국가로서 다케시마(독도)를 점유한다는 의지를 재확인한 후, 이 섬(독도)을 실효적으로 지배해 왔다. 
<중략>
②에도시대 초기(1618년), 호우키번(伯耆蕃)의 오오야집안(大谷家)과 무라카와집안(村川家)은 막부(幕府)로부터 울릉도를 하사받고 도항면허를 받아 매년 이 섬(울릉도)에서 어업을 하고 전복을 막부에 헌상했으며, 다케시마(독도)는 울릉도로 도항하기 위한 기항지 및 어로지로 이용되었다. 또한 적어도 1661년에 이 두 집안은 막부로부터 다케시마(독도)를 하사받았다.
<중략>
④일본은 1905년 1월의 각의결정에 이어 2월에 시마네현 고시를 통해 다케시마(독도)를 시마네현으로 편입시켜 다케시마(독도)를 영유한다는 의사를 재확인했다. 이후, 다케시마(독도)는 관유지대장에 기재되었으며 다케시마(독도)에서의 강치조업은 허가제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1941년에 중지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물로 생포한 강치를 운반용 상자에 담는 일본어부들

즉 일본은 1618년에 시작된 울릉도에서의 자국 어부들의 어로행위와, 1661년부터 일본정부(막부)에게 독도를 하사받아 기항지 및 어로지로 이용했다며, 당시 역사적으로도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를 실효 지배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일본이 주장하는 이 역사적인 실효지배 사실을 바탕으로 일본은 당시 무주지(無主地)였던 독도를 1905년의 각의결정과 시마네현고시를 통해 시마네현에 편입시킴으로서 국제법적으로 독도영유 의사를 재천명했으며, 계속해서 강치잡이 등을 통해 실효 지배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독도는 “주인 없는 땅”이 아니었다!!

결국 이 같은 일련의 일본의 독도침탈과정으로 인해 1905년 시마네현고시를 통한 독도영토편입 100주년을 기념하는 2005년 3월,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제정하고 본격적인 한국과 일본의 독도영유권 공방이 시작된다.

일본은 대한민국정부수립 이전부터 독도의 일본영유를 위해 당시 점령국이었던 미국을 상대로 집중적인 로비를 벌였다고 전해진다.

이종학 前 독도박물관장은 "독도영유를 위한 일본의 대미 로비는 소위 시마네현 고시 이래 독도에 대한 관유지대장 등재(1905년 5월 27일), 강치잡이 허가(1905년 6월 5일), 토지대여 및 사용료 징수(1906년 7월 2일), 인광석 채굴허가(1939년 6월 6일) 등 법적-행정적 조치를 마련한 후 이 같은 사실 등을 근거로 외교적 수단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공인받으려 했던 시도로 볼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일본 시마네현 다케시마자료실에 전시된 어린 독도강치의 박제 

당시 일본해군은 동해에서의 러시아 군함의 활동을 정찰하기 위해 1904년 8월에 울릉도 2곳에 무선전신시설을 갖춘 망루를 설치. 독도에도 1904년 9월부터 군함을 파견해 망루설치를 위한 준비조사를 실시했다.
 
이때 일본해군성은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어업가가 대한제국의 영토인 독도에서 강치 등의 어로에 대한 독점권을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얻기 위해 일본 농상무부가 대한제국정부를 상대로 교섭해 줄 것을 농상무부에 요청하고 있음을 농상무부 수산국장으로부터 통보받는다.

이에 해군성 수로부장인 기모츠키 가네유기 제독은 나카이를 불러 “그 섬(독도)은 무주지로 대한제국정부에 빌려 달라고 요청할 게 아니라, 일본정부에 그 섬(독도)을 일본영토로 편입하고 나서 빌려달라고 요청하는 서류를 제출"하라고 요구한다. 일본해군은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 기회에 독도를 빼앗아 독도에 해군용 감시 망루를 설치하려 했던 것이다.

일본해군성의 권유를 받은 나카이는 일본해군성이 만들어 놓은 각본에 따라 1904년 9월 29일에 "량코섬(=독도) (일본)영토편입 및 사용허가요청서 (りゃんこ島領土編入並びに貸し下げ願い)"를 일본정부 내무대신과 외무대신, 그리고 농상무대신 앞으로 제출한다.

이 요청서가 접수되자마자 주무부서인 내무성이 검토한 후, 1905년 1월 10일「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無人島の所属に関する件)」을 내각에 올렸다. 그 내용은 량코섬(=독도)을 일본영토로 편입한다는 것이었다.

1905년 1월 28일에 열린 각의 결정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별지(別紙)의 내각대신의 무인도소속에 관한 건의 청원제안(청의=請議)을 심사했는데, (이 제안의 내용이) 북위37도9분30초, 동경131도55분, 오키섬에서 서북85해리 쪽에 있는 무인도가 지금까지 타국이 점령했다고 인정할 만한 흔적이 없고, 재작년(1903년)에 일본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자가 어업을 위한 숙소를 짓고, 인부를 이끌고 어구를 갖추어 강치잡이에 착수해 이번에 영토편입 및 사용허가를 출원했기에 이번에 소속과 섬의 이름을 결정할 필요가 있어 이 섬을 다케시마(竹島)라 이름 짓고, 앞으로 시마네현 소속 오키사(隠岐司)의 소관으로 한다는 것이다.
심사한 결과, 1903년 이래,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자가 이 섬에 이주해 어업에 종사한 사실이 관계서류로부터 밝혀져 국제법상 점령사실이 있다고 인정되어 이를 일본소속으로 하고 시마네현 소속의 오키도사(隠岐島司)의 소관으로 해도 문제없다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제안대로 각의결정해도 좋다고 인정한다.

이 결정을 통고받은 내무성은 2월 15일자 훈령 제87호로 각의결정을 관내에 고시하도록 시마네현 지사에게 지령했다. 이에 이 지령에 따라 시마네현 지사는 1905년 2월 22일에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북위 37도9분30초, 동경 131도55분, 오키섬에서 북서쪽으로 85해리에 떨어져 있는 섬을 다케시마(독도)라 부르고 이제부터 시마네현 오키섬 오키도사의 소관으로 정한다.


▲일본 시마네현 산베자연관에 리앙쿠르대왕 박제와 함께 전시되어 있는 ‘독도 강치포획 수 추이’ 도표
(*1905년 한해에만 2750마리의 강치가 도살되었고, 3200마리가 도살된 해도 있다. 강치 사체 썩는 냄새가 울릉도까지 날아와 일본정부조차 나카이에게 경고를 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 독도에서의 강치포획 독점권은 나카이 요사부로에게 넘어갔으며 이들의 남획으로 인해 독도강치가 멸종되기에 이른다.


▲하마다 해양관에 전시된 어린 독도강치의 박제

당시 일본어부들의 독도에서의 주된 수입원은 독도강치였다. 지금 일본은 독도강치의 씨를 말려 멸종시킨 것도 모자라 독도에서의 일본어부들의 강치잡이를 독도 실효지배의 역사적 사실로 삼아 독도마저 삼키려 하고 있다.

일본어부들의 손에서 자기 무리를 지키려 했던 리앙쿠르대왕은 동족이 멸종되어버린 지금, 고향 땅 독도에도 가지 못하고 일본 땅에 박제가 되어 있다. 이 ‘비극의 리앙쿠의대왕’의 운명을 독도에게도 짊어지게 할 것인가!!


▲산베자연관에 전시되어 있는 리앙쿠르대왕 박제

<강치란>
강치는 바다에 사는 포유류로 앞다리와 뒷다리가 지느러미처럼 되어있어 기각류(鰭脚類, Pinnipeds)라고 불림.
강치와 비슷한 부류로는 북미 태평양 연안에 생식하는 캘리포니아강치, 갈라파고스제도에 생식하는 갈라파고스강치 등으로 알려져 있음.
독도강치는 캘리포니아강치의 아종(亞種)으로 여겨지지만 다른 종이라는 설도 있음.
강치 수컷은 몸길이 2.4m, 체중은 490kg이나 됨. 암컷은 몸길이 1.8m, 체중은 약120kg으로 수컷과 비교하면 체형이 작음.
무리로 행동하고 암컷과 새끼는 한 곳에 정착하는 경향이 있음. 번식기는 4~7월로 다른 강치과 동물과 마찬가지로 일부다처의 할렘을 형성함.

<강치와 바다표범의 다른 점>
다리털이 자라는 모습과 손톱크기 등, 강치科와 바다표범科 동물에는 외견상으로도 많은 차이가 있지만, 가장 큰 차이는 뒷다리의 형태와 움직임의 차이이다.
강치는 육상에서 앞쪽으로 다리를 굽혀 보행할 수 있다. 그리고 앞다리를 미는 것처럼 몸을 일으켜 꽤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도 있음. 반면에 바다표범은 뒷다리가 직선으로 뻗어있을 뿐 허리를 들어 올릴 수도 없고, 앞다리만을 사용해 몸을 출렁이면서 애벌레처럼 전진함. 그러나 물개와 바다사자는 강치科 동물이라 강치와 같은 움직임이 가능함.
강치科는 목을 늘리면 가늘고 길다. 바다표범科는 목이 두텁고 짧다.

*2008.07.23 독도본부 www.dokdo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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