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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4) - 패전 후 일본 사할린 진실 은폐했다

올해로'종전 63년'을 맞는 일본. 하지만, 사할린 한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한 일본은 진정한󰡐종전󰡑을 말할 수 없다. 일본은 어떤 식으로 사할린 한인 문제를 발생시켰으며, 전후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가? 사할린 한인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온 타카키켄이치(高木健一) 변호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알아봤다.

▶ 조선인의 사할린 이주는 언제, 어떤 형식으로 이뤄졌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사할린은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인들이 사할린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사할린은 광물 등의 자원이 풍부했기 때문에, 탄광과 목재 생산, 군수시설의 건설 등을 위해 이주한 것이다.
  조선인의 경우 처음에는 광산 등지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간판이나 대자보 등을 이용해 모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1941년부터는 민간의 뒤에서 감독을 하던 총독부가 전면에 나서는'관 알선'의 형태로 변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3년, 1944년부터는 완전히 징용제도로 바뀌어 '여기로 가라!' 라고 명령을 받으면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조선인의 사할린으로의 이주는 3단계에 걸쳐 진행되었다." 

'모집'에서 총독부 주도의 '관 알선'으로 변화

▶ 1944년 이후에는 사할린의 조선인들이󰡐이중 징용󰡑을 당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이 이중 징용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1944년이 되면 일본은 미국의 잠수함 때문에 사할린에서 파낸 석탄을 본토로 가지고 갈 수가 없게 된다. 배도 그 수가 점점 줄어들게 되어, 결국 일본은 수송력을 잃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할린에서는 노동자의 수가 남아돌게 되고, 반대로 일본 본토에서는 징병 등으로 인해 노동자의 수가 적어지게 되었다.
  이에 탄광기업들이 사할린에서 본토로 노동자를 이주시켜 줄 것을 일본 정부에 요청하게 되고 일본 정부는 각의(閣議) 결정으로 이를 수락했다. 이에 따라 조선인들은 처음에는 한반도에서 사할린으로, 이후에는 다시 사할린에서 홋카이도나 규슈 등으로 이동되는데 이걸 이중 징용이라고 한다"

▶ 이중 징용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했으며, 일본 정부는 여기에 어떤 책임을 갖고 있는가?
 "사할린에서 2~3년 살게 되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는데, 남자가 혼자서 일본 본토로 가게 되면 이혼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때 처자가 함께 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당시 일본 정부는 먼저 노동자가 혼자서 가고, 나중에 가족을 불러들이겠다고 약속했지만, 전쟁말기의 혼란한 상황에서 이러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이중 징용으로 인해 사할린 한인들 속에서는 많은 이산가족이 생겨났다. 일본 정부의 각의 결정에 의해 이중 징용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이산가족이 양산되는 결과가 나타난 것에 대해 일본 정부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 종전 후, 조선인들은 왜 사할린에 남게 되었는가? 또 여기에 일본 정부는 어떤 책임이 있는가?
"종전 후 1946년 말부터 <소련지구귀환미소협정>에 의해 사할린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본격적으로 일본 본토로 돌아가게 되었다. 당시, 일본 본토는 미군의 점령 하에 있었다. 따라서 소련과의 일본인 귀국관련 교섭은 일본정부가 아닌 도쿄에 있던 미군 사령부가 했다.
  하지만 소련도 미국도 사할린의 조선인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할린의 조선인 상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일본 정부 또한 뒤에서 소극, 적극적으로 대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다."

사할린에서 다시 일본 본토로 '이중 징용'

▶ 일본 정부가 뒤에서 '소극,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는 부분에 대해 좀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
 "미군도 사할린에 조선인이 남아 있다는 문제를 몰랐다. 사할린으로부터 GHQ(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에 '조선으로 보내달라'는 귀국요망이 들어오자, 도쿄의 GHQ는 서울의 미군사령부에 문의를 했다. 이때 서울의 사령부는 맥아더 밑에 있던 조직이었다. 서울의 미군은 전후의 혼란을 이유로 사할린의 조선인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도쿄의 GHQ도 그 이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정권은 조선인에 대해 차별정책을 취하고 있었는데 일본에 있던 조선인들도 추방시키려 했기 때문에 사할린의 조선인에 대해서는 더더욱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 소극적이란 말은 일본 정부가 사실을 은폐하려 하는 등 조선인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는 뜻이고, 적극적이란 말은 미국과 소련 측에 적극적으로 조선인을 제외하고 일본인만을 돌봐달라고 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 이러한 일본 정부의 책임문제를 포함해 지금까지 사할린 한인 문제에 대한 재판은 없었나?
 "지금까지 이 문제와 관련되어 2건의 재판이 있었는데, 2건 모두 내가 관여한 소송이었다.
  최초의 소송은 1975년 12월8일 '사할린잔류 한국 · 조선인 귀국 청구소송'이었는데 원고가 사망을 하는 바람에 1988년 취하되었다. 그 후 1990년 8월 28일 두 번째 소송인 '사할린 한인·조선인 보상 청구소송'이 있었고, 이 소송에서 사할린에 강제 연행된 21명이 일본 정부에 1인당 1천만 엔(약 1억 원)의 보상금을 청구했는데 1994년 7월 14일 취하되고 말았다.
  이유는 당시 일본 정부가 사할린에서 영주 귀국할 사람들을 위해 양로원 건설비 등을 지원하는 '50주년에 관한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다며, 만약 재판결과가 잘못 나올 경우 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원고 측에 소송을 취소할 것을 권유했다. 결국 원고 측은 재판을 중지하고 정부와의 타협에 주력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여 소송을 취소했다."

▶'50주년에 관한 프로젝트'라는 것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으며, 실제로 이행이 되었는가?
 "1987년에 결성된 초당파 의원들의 모임인 '사할린잔류 한국 · 조선인 문제 의원간담회'의 활동으로 일시귀국 프로젝트 이외에, 영주귀국 1세대를 위한 프로젝트(아파트와 요양원 건립)가 합의 되었다. 이 계획에 의해 1999년 인천에 요양원이 설치되고, 2000년에는 안산에 500세대가 살 수 있는 아파트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일본 정부가 32억 엔(약 307억 원)의 예산을 지원하고 한국정부가 토지를 제공하는 형식으로 건축되었다."

아직 청산되지 않은 '조선인 저축'

▶ 이러한 일본 정부의 조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1990년 이후 일시 귀국사업으로 약 2만 명의 사할린 잔류 한국 · 조선인들이 조국의 땅을 밟아볼 수 있게 되었고, 1999년에는 한국에 요양원과 아파트가 설치되었다.
  또한 2004년에는 일본 정부가 6억 엔(약 57억 원)을 들여 사할린에 노인센터를 건립하기도 했다. 이러한 가시적인 노력을 보면 일정 정도 일본 정부의 노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지만, 미숙한 부분도 많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가 일본 정부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이가라시 후미히코(五十嵐 文彦) 의원 등의 열정적인 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
  특히 이가라시 의원이 직접 외무성에 압력을 넣어 미집행 예산 32억 엔을 한국 국내 영주귀국을 위한 시설건립에 사용되도록 노력했다. 한편, 일본뿐만이 아니라 한국 국내 문제도 언급하고 싶다. 1994년에 일본이 예산을 지출하여 한국 내에 건물이 완성된 것이 1999년과 2000년도이다. 건물을 짓는데 5~6년씩이나 걸린 이유는 이러한 시설이 자기 지역에 생기는 것을 반대한 주민들 때문이었다. 외국에서 고생한 동포들이 자기 주변에 들어와 사는 것조차 반대하는 한국인이 차갑게 느껴진다."

▶ 앞으로 사할린 한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보는가?
 "일시귀국과 영주귀국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도 한국정부도 전향적으로 행동했다. 그러나 아직 문제가 남아있다. 우체국 저금의 문제다. 당시 사할린 조선인들이 저축한 돈이 60년 이상 지난 지금조차 청산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당시 물가와 지금을 비교하면 약 4000배 정도 올랐지만, 일본 우체국은󰡐청산하겠지만, 이자를 주는 것뿐이다󰡑라고 말하며, 당시 금액의 5배 정도밖에 지불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확실히 민법상 금리채권은 물가가 얼마나 오르던 간에 금리가 붙는 것만이 인정된다.
  그러나 사할린 한인의 문제는 특별하지 않은가. 사할린 한인의 경우 종전 후의 물가상승도 고려하여 150배 정도로 청구되어야 한다. 일본은 사할린 한인들의 저축을 전후 재정부문에 사용해 경제발전을 이뤘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수준에서 재평가해 돌려주어야 한다. 일본이 사할린 한인들의 돈을 돌려준다면, 한국정부와 함께 기금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한다."

※타카키 켄이치(高木健一)변호사는 1944년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일본 변호사연합 인권옹호위원회 조선인피폭자문제조사위원장 등을 거치면서 태평양전쟁당시 조선인의 피해보상에 대한 활동을 펼쳐왔다. 주요 저서로는 《종군위안부와 전후보상》《사할린과 일본의 전후책임》등이 있다.

민족21·KIN공동기획 | 망향의 그늘, 사할린을 말한다 
 [88호] 2008년 06월 26일 (목)  허재철 기자  touitu@minjog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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