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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70년_ 上

연해주 지역의 개척자들

 ▲ 러시아 연해주 오브치니코보의 한인촌 상 멍고가이마을. 의병장 유인석 장군이 1909년부터 이듬해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올해는 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던 고려인 20만명이 스탈린의 탄압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1937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역만리 중앙아시아로 쫓겨난 러시아 한인들은 사막 벌판을 옥토로 만들며 ‘카레이츠’(고려인)로 우뚝 섰다. 현재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약 55만명. 경향신문은 전문가 기고를 통해 연해주·시베리아에서 중앙아시아로 내몰려야 했던 고려인의 역사성을 되짚어 보는 ‘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 그 자취를 좇아’를 연재한다.

한인의 러시아 이주는 1863년 겨울 함경도 농민 13호가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 남부 지신허강 계곡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뒤 1869년 대흉년이 들면서 함경도 육진의 농민 6500여명이 6월부터 12월까지 대거 이주하니, 이를 ‘경오도강(庚午渡江)’이라 부른다. 이들의 이주는 기아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었다.

중국과 달리 러시아 당국은 그런 한인의 이주를 환영했다. 연해주 지역은 인구밀도가 낮고 식민개발이 절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러시아는 ‘러시아인을 위한 러시아’라는 슬로건 아래 극동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러시아인의 이주를 적극 장려하고 있었다. 연해주 지역에서 러시아인의 정착이 크게 늘어가는 가운데 한인들의 이주도 꾸준히 증가해 1908년께에는 이 지역 인구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한인사회를 키워나갔다.

당시 연해주 한인들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으나, 품삯을 벌기 위해 온 ‘외품자리’라는 떠돌이 임금노동자, 납품업자들도 있었다. 그 중 ‘뽀드라치크’라 불린 납품업자들은 러시아군대와 관청에 쇠고기, 벽돌 등의 납품과 군부대 시설공사를 통해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러내각이 들어설 때, 이들 가운데는 공사관 직원이나 군사교관의 통역으로 조선에 들어오거나 조선 정부의 요직에 임명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연해주의 한인들은 러시아 당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난을 겪어야 했다. 한인의 이주를 받아들인 러시아였지만, 러시아가 일본이나 중국과 전쟁을 벌일 경우 한인 이주자들이 ‘적국(敵國)의 광범한 첩보조직’으로 기능할 것을 우려, 경계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물론 연흑룡주 총독 곤닷치 같이 연해주 지역에서 한인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후원하던 이도 있었다. 그는 1912년 신한촌을 직접 방문해 “한국을 사랑하지 않는 한인들은 러시아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겨 한인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한인사회의 형성과 함께 연해주 지역은 1910년 망국을 전후해 해외독립운동기지로 발전해 갔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지리적 이점과 북간도 지역에 비해 일제의 간섭과 탄압이 덜 미치던 연해주 지역은 독립운동기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러일전쟁 직후 간도관리사 이범윤은 이곳에서 의병을 이끌었다. 1908년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던 안중근 의병부대의 근거지도 바로 연해주 지역이었다. 한인사회의 지도자 최재형은 이들 의병을 적극 지원하면서 구국의 뜻을 펼쳐 나갔다. 한인사회의 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한인학교가 세워지고 한글신문인 ‘해조신문’ ‘대동공보’ ‘대양보’ ‘권업신문’ 등이 발간되면서 계몽운동을 꽃피워 나갔다. 1910년 여름 망국이 임박해진 가운데 의병과 계몽인사들이 힘을 합해 13도의군(十三道義軍)과 성명회를 조직하며 일제의 강제병탄에 맞서 최후까지 항쟁을 벌여 나갔다. 이후에도 이 지역 한인의 독립운동은 꺼질 줄 모르는 불꽃처럼 타올랐다.

 
러시아 하바로브스크에 있는 빨치산 희생자 추모기념탑. 한인사회당 창건자 김알렉산드라가 처형된 곳이다. 


1911년 12월에 조직된 권업회는 한인사회의 자치적 대표기관으로서 권업신문 발간, 학교 설립, 러시아 국적 취득 알선, 한인 이주 50주년 기념행사 등을 추진하며 독립운동의 장도적 방도를 모색해 갔다. 그런 가운데 1913년 말 이동휘, 이종호, 이상설, 이동녕 등이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면서 독립운동의 기치를 크게 올렸다. 이는 러일전쟁 10주년을 맞이해 제2의 러일전쟁이 발발할 것을 기대하고, 그때를 광복의 기회로 삼으려는 전략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러시아와 일제가 동맹관계로 돌변하고, 러시아 당국이 한국 독립운동을 탄압하면서 대한광복군정부의 구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17년 러시아의 2월 혁명은 한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2월 혁명을 열렬히 환영하던 한인들은 동년 6월 전로한족대표자회를 개최하며 활동을 재개했고, 대회 결의에 따라 신한촌에서는 ‘한인신보’,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는 ‘청구신문’이 창간되었다.

10월혁명 후 한인사회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족중앙총회,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 등이 만들어지며, 독립운동을 전개해 갔다. 전로한족중앙총회는 연해주 지역 3·1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러시아 지역, 서북간도, 그리고 국내의 대표들까지 아우른 가운데 대한국민의회로 확대·개편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더불어 해외 임시정부의 쌍두마차를 형성하던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가을 상하이 임시정부와 통합하기에 이른다.

그런가 하면 친볼셰비키적인 이동휘, 김립, 박애, 이한영, 장기영 등이 1918년 5월11일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하기도 했다. 그렇듯 연해주 지역은 해외 한인사회 가운데 어느 곳보다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이 크게 미치던 곳이었다. 볼셰비키 혁명 전선에서 크게 활약하던 한인들은 혁명을 반대하는 일본군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 4월에는 시베리아에 침투한 일본군에 의해 대규모의 방화, 파괴, 학살 등의 만행이 저질러졌다. ‘4월참변’이라 불리는 이 일로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등 한인지도자들이 학살되는 등 한인사회가 커다란 피해를 입고 말았다.

1922년 말 시베리아 내전이 종결되고 소비에트체제를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한인사회 역시 급격히 변질되어 갔다. 스탈린 정권은 민족적 가치를 철저히 배제하는 가운데 한인의 전통 마을을 집단농장으로 재편해갔다. 민족적 한인들에 대한 체포, 감금, 처형 등 대탄압도 거세졌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공, 1937년 중일전쟁 등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자 연해주 지역의 안보를 우려한 스탈린 정권은 80여년 가까이 이 지역을 개척하며 혁명 전선에 앞장서왔던 한인들을 배신한 채 1937년 가을 무자비하게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감행했다.

〈반병률|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경향신문  2007년 02월 27일 18: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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