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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의 땅 日 유바리를 가다_ 上

폐허 방치 홋카이도 탄광지


     ▲ 일본 시민단체인 강제연행 진상규명 네트워크의 고바야시 히사토모 사무차장이 홋카이도 유바리시의 석탄박물관에 있는 과거 갱도를 가리키며 조선인 징용자들의 참혹한 삶을 얘기하고 있다. 유바리/박용채특파원 

지난 12일 일본 북부 홋카이도(北海道) 삿포로(札幌)에서 50㎞ 정도 떨어진 유바리(夕張)시.

한낮의 기온이 영하 7~8도에 달할 정도의 차디찬 땅이다. 갑작스러운 폭설로 순식간에 무릎까지 눈이 차올랐다. 시 중심부에서 10여㎞ 떨어진 산 중턱. 사람 키만큼 쌓여있는 눈밭 한 가운데에 한때 유바리 최대 탄광을 운영했던 홋카이도 탄광기선의 건물이 폐허처럼 방치돼 있다.

 “이런 눈밭에서 도망가는 것을 엄두나 냈겠습니까. 설령 도망치더라도 얼어죽었겠지요.” 일본 시민단체인 ‘강제연행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 포럼’의 고바야시 히사토모(小林久公) 사무차장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연행자들의 참혹한 삶을 떠올리면 가슴부터 미어진다고 했다.

유바리는 국제영화제에 멜론 특산지, 대규모 스키장으로 국내에도 낯익은 곳이다. 최근에는 거액의 부채를 이기지 못해 파산을 선언해 주목을 받은 곳이다. 일본 사회는 지자체의 이례적인 파산과 주민들의 삶의 변화에는 촉각을 곤두세우지만 조선인 강제연행자들의 존재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다. 실제로 유바리가 강제 징용의 역사가 얼어붙은 차디찬 유배지라는 곳을 기억하는 일본인은 거의 없다.

유바리는 탄광을 빼곤 설명할 수 없는 지역이다. 일본 근대화 때인 1888년 대규모 탄맥이 발견돼 2년 뒤인 1890년부터 채굴작업이 시작됐다. 탄광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1935년에는 연간 생산량이 100만t을 웃돌 정도로 규모가 커져, 홋카이도 최대 광산지가 됐다.

45년 일본 패전 뒤에도 유바리광은 계속 돌아갔고, 60년에는 탄광만 24개, 인구 11만6000명의 도시로까지 성장했다. 그러나 70년대부터 석유로 자원이 대체되면서 탄광은 빛을 잃기 시작했고 90년 미쓰비시가 운영하던 탄광이 마지막으로 문을 닫으면서 100년간 켜져있던 유바리 탄광의 불은 모두 꺼졌다.

유바리의 파산은 지자체가 탄광 대신으로 관광산업 등을 육성하는 과정에서 거액의 채무를 진데 따른 것이다. 현지 시민단체 관계자는 “유바리 탄광은 조선인 연행자의 피와 땀을 바탕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면서 이익금을 다른 곳에 투자해 자본주의 사회의 정점에 올랐다”며 “이런 유바리가 탄광으로 인한 부(負)의 유산으로 파산에 이른 것은 아이러니”라고 꼬집었다.

유바리에 조선인 갱부들이 등장한 것은 일제의 조직적인 강제징용이 시작되기 훨씬 전인 1916년부터로 알려져 있다. 탄광측에서는 ‘돈벌이를 위해 건너온 조선인 노동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식민지 시절 굶주리고 억압받던 상황을 감안하면 강제징용과 다름없는 ‘강요된 노동자’임이 분명하다. 탄광사고와 억압 등으로 매년 2~8명의 조선인들이 사망했고 30년에는 사망자수가 79명에 달했다. 유바리시 스에히로 히가시 혼간지 인근 산 중턱에는 이들의 죽음을 위로하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 침략전쟁의 길을 닦는 데 쓰여진 ‘타는 돌’을 캐내며 육신과 영혼까지 타버린 조선인 노동자들이 눈 덮인 이국땅의 찬 자리에서 이름없는 혼으로 떠돌고 있는 현장이다.

그러나 현지에서 조선인의 피로 이룩된 유바리를 기억한 사람들은 거의 없다. 유바리 시청에서 2㎞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석탄 박물관. 리조트 시설을 겸해 유바리 탄광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꾸며놓은 시설이지만 재정난으로 작년 11월말 폐관했다.

박물관에는 실제 갱도는 물론이고 모형과 인형 등을 통해 채탄하는 모습이 전시돼 있지만 조선인 연행자들의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현지의 한 30대 남성은 “과거 조선인들이 이곳 탄광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들었지만 자세히는 모른다”고 냉랭하게 말했다. 일제의 강제 징용이 본격화된 39~45년에는 1만여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유바리 탄광에서 일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조선인 연행자들이 일한 곳은 탄광뿐 아니다. 홋카이도의 관문인 신치도세공항 바로 곁에 육상 자위대 7사단이 위치한다. 전시(戰時) 옛 일본 해군 부대에서, 전후(戰後)에는 미군기지로, 지금은 자위대 기지로 바뀐 곳이다. 이곳 활주로 공사에도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됐다.

일제의 강제징용이 본격화된 1939년부터 45년까지 징용된 조선인 72만여명중 14만5000여명이 홋카이도로 끌려와 유바리를 비롯한 탄광, 항만, 비행장, 댐 건설 노역에 동원됐다. 이중 상당수가 사망해 해방된 뒤에도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이름없는 혼으로 떠돌고 있다.

민단 관계자는 “재일 100년 역사에서 홋카이도는 규슈와 함께 가장 가혹했던 곳”이라며 “일본인들은 눈만 뜨면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를 얘기하지만 과거 강제연행의 상징적 존재인 유바리가 폐허가 되면서 강제연행된 동포의 굴욕과 피는 갈수록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72만여명 참혹한 노역 

일본 외무성 자료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때 끌려간 조선인 강제연행·강제노동자는 72만4787명이다. 연행 지역은 일본 47개 도·도·부·현 전역에 걸쳐있다.

특히 탄광과 항만 등이 밀집한 홋카이도(北海道)와 야마구치(山口), 후쿠오카(福岡), 사가(佐賀), 나가사키(長崎), 후쿠시마(福島)현에 70%가 집중됐다. 조선인 연행자들이 끌려간 곳은 탄광을 비롯해 광산, 토목건축, 항만 및 활주로 건설, 공장 등이다.
 
     ▲ 홋카이도 사뽀로 별원에 보관중인 조선인 강제징용자 유골 명부. 

강제징용 문제 연구가인 모리야 요시히코(守屋敬彦)에 따르면 1939~45년중 일본의 조선인 연행은 외견상 모집(초기), 관 알선(중기), 징용(말기) 등 3가지 방식으로 이뤄졌다. 다만 초기나 중기도 기본적으로 일본 정부 및 조선총독부의 감독, 지령에 따라 조선·일본의 관헌, 경찰관 등이 개입한 점을 감안하면 징용과 큰 차이는 없다. 연령은 20~40세가 전체의 85%를 차지하지만 1944년 징용방식으로 전환하면서 19세 미만의 청소년은 물론 농아인 등 신체장애인, 병약자까지 무차별 연행됐다.

징용자들의 실태는 차별, 위압, 학대 등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우선 현장에 투입되기 전에 기초적인 도구 사용법을 간단히 배운 뒤 나머지는 황민(皇民)사상 철저 등 정신훈련을 받는다. 주거의 경우 기숙사에 단체로 몰아넣은 뒤 도망 방지를 위해 창에는 격자를, 담에는 철망을 설치했다. 또 개도 키우고 사무실에는 일본도, 목도, 엽총까지 놓아 위협했다. 홋카이도의 경우 다코베야(문어방)로 불리는 토굴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도망자, 반항자에게는 경찰, 노무담당자에 의한 학대 및 폭력이 이뤄졌고, 죽음에 이르는 사건도 다반사였다고 모리야는 전했다.

임금도 차별을 받았다. 미숙련을 내세워 노동능력을 일본인의 70%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항만노역, 토목건축, 공장 등에서는 월 30~60엔, 갱내 노동은 60~90엔 정도였다. 그나마 임금을 실제 지급받는 경우란 많지 않았다. 급여일은 도망방지를 목적으로 10엔 안팎만을 현금으로 지불했을 뿐 강제로 저축을 들게 한 뒤 통장은 노무직원이 보관했다.

또 저축이 모아지면 국채, 채권 구입을 강요했다. 외견상 송금을 허용하고 있지만 회사에서 조선의 경찰서를 거쳐 가족에게 건네지게끔 돼 있어 실제 전달 여부도 불투명하다. 강제노동의 계약기간은 대체로 2~3년이었지만 통장을 주지 않거나 여행증명서를 발행하지 않는 등의 수법으로 사실상 계약기간을 멋대로 늘렸다.

〈홋카이도 박용채 특파원〉경향신문 2007년 01월 21일 17: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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