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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9월 18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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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황족 이우, 야스쿠니에 있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의친왕의 둘째 아들,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한 뒤 합사된 사실 최초 확인

▣ 전주=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스나미 게스케 프리랜서 기자

“글쎄, 잘 모르겠는데.” 의친왕의 11번째 아들인 이석(67)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4월3일, 그를 만나러 전주 한옥마을을 찾은 <한겨레21> 취재진은 황망한 걸음으로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랬을 수도 있을 거야. 이우 형님께서 돌아가실 때 일본 군인 신분이셨으니까. 야스쿠니신사라고 했나? 고약한 일이구만.” 이석씨는 헛기침을 했다. 늦은 오후, 전주 한옥마을의 공기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야스쿠니 100년사>에 짧은 기록 남아

다른 친인척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의친왕의 손자로 인정받고 있는 이혜원 국립고궁박물관 자문위원은 “그런 얘기를 들은 적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우 삼촌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긴 한데, 확인해본 적은 없습니다. 오랜 전 일이지 않습니까. 정확히 잘 모르겠네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조선 황족들은 없을까? 야스쿠니신사에 강제 합사된 조선인들의 사연을 취재하던 <한겨레21>과 민족문제연구소는 옛 조선 황족 가운데 일부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됐다. 이따금 언론에 동정이 소개되는 황족 후손들을 중심으로 취재가 진행됐다.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거나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증언은 대부분 전언이어서 신뢰하기 힘들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일왕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버린 군인·군속 246만여 명의 영령이 일본의 ‘수호신’으로 모셔져 있다. 이 가운데 조선인 출신 합사자는 2만1천여 명, 대만인 출신 합사자는 2만7천여 명에 이른다. 조선 황족 가운데 일본 군복을 입었던 사람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897∼1970), 영친왕의 형 의친왕의 장남 이건(1909∼91), 의친왕의 둘째아들 이우(1912∼45) 등 3명이다. 이 가운데 이우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양자로 들어가 법적으로는 운현궁의 후손이 된다. 이우는 제2 총군사령부 교육담당 참모(중좌·우리의 중령)로 근무하던 중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피폭돼 다음날인 8월7일 숨졌다.1945년 8월9일치 <매일신보>는 1면에서 ‘이우공 전하, 7일 히로시마서 어(御)폭사’라는 톱 기사로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우공 전하께서는 재작 6일 히로시마에서 작전임무 어(御)수행 중 공폭에 의하야 어(御)부상하시어 작 7일 어(御)전사하시었다.” 조선 황족 중 누군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면 그 가능성이 제일 높은 사람은 이우인 셈이다.

<한겨레21>과 민족문제연구소는 문서 등 기록자료 분석에 들어갔다. 해결의 실마리는 뜻밖에도 쉬운 곳에 있었다. 1869년 도쿄에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란 이름으로 역사에 첫 모습을 드러낸 야스쿠니신사는 1987년 6월30일 세 권짜리 분량의 책 <야스쿠니 100년사>(비매품)를 펴낸다. 이 책의 506쪽에서 이우의 야스쿠니신사 합사와 관련된 짧은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세부봉안제서류철’(이우공 합사제 서류 포함) 소화34년 10월 ~소화35년 10월

이우 공은 소화 20년 8월7일 히로시마에서 전몰했다. 34년 10월7일 초혼식을 집행하여 상전에 합사하였고 17일 4만5천여 명의 육해군 군인, 군속과 함께 본전 정상(正床)에 합사하게 되었다. 본 철은 이에 관한 자료가 중심이 되고 있다.

기록은 이우가 1959년 10월17일 4만5천여 명의 육해군 군인들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구체적인 합사 경위는 ‘영세부 봉안 제 서류철’에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내용까지 확인할 순 없었다. 이석씨는 취재진이 이런 사실을 전해주자 “조국이 해방을 맞은 게 벌써 62년 전인데 형님이 야스쿠니신사에 억눌려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은 기막힌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는 사실은 국내 학계에 알려진 바 없다.

일본 황족과 같은 대우 받지 못했다

작가 정범준씨는 조선 황족들의 역사를 다룬 책 <제국의 후예들>에서 “이우는 아버지(의친왕)처럼 호방한 성격을 지녔고 일본을 증오했다”고 적었다. 1912년 11월15일에 태어났고, 모친은 수인당 김흥인이었다. 1915년 경성유치원, 3·1운동이 나던 해인 1919년 종로소학교를 거쳐 1922년에는 여느 일본 황족들처럼 일본 유학을 떠나 귀족학교인 학습원에 입학했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뒤져보니 “이우가 탄 자동차가 행인을 치었다”거나 “말에서 떨어져 작은 부상을 당했다”거나 “도쿄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등 자잘한 단신 등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지금의 기준으로도 “잘생겼다”는 감탄사가 터져나오는 옥골선풍의 귀공자였다.

그는 조선 황실에서 드물게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명확한 민족의식을 가진 청년이었다고 한다. 생전에 이우를 접했던 지인들의 전언이 이를 증명한다. 정범준씨는 <제국의 후예들>에서 1988년 9월15일 ‘히로시마 쥬코트’라는 방송사가 이우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 ‘민족과 해협’에 소개된 이우의 지인들의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일본인 동기생 아사카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속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공은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앞서려고 노력했지요”라고 말했고, 운현궁의 가정교사였단 가네코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었으므로 일본 육군에서도 두려워했다”고 증언했다. 역사학자 이기동은 1974년 5월치 월간 <세대>에 쓴 글 ‘이우공, 저항의 세대’에서, 이우가 일본의 정략 결혼을 피해 조선인 박찬주(후작 박영효의 손녀)와 결혼을 밀어붙여 뜻을 이루고 마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영세부봉안제서류철’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을까. 이에 대한 암시를 주는 기록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카자와 시로우가 쓴 <야스쿠니신사>(이와나미서점, 2005년 7월20일 출판)를 보면 이우의 합사 문제를 처리하면서 일본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고민들을 읽을 수 있다. 숨질 때 이우는 일본의 황족과 동등한 취급을 받던 조선의 왕공족이었다. 조선인 강제 합사에 대한 야스쿠니신사의 공식 의견은 “죽은 시점에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지킨 신으로 모시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일본의 논리를 그대로 따른다면 죽는 시점에 일본 황족과 동등한 지위였던 이우는 (합사 자체가 부당한 일이긴 하지만) 일본 황족과 동등한 취급을 받고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어야 한다. 1959년 10월6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옛 황족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신노(北白川宮 能久親王)와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오(北白川宮 永久王)는 “황족과 평민을 같은 자리에 모실 수 없다”는 궁내청의 의견을 받아들여 두 황족을 따로 모실 수 있는 미타마시로(御靈代·야스쿠니신사의 영령이 깃든다는 거울)를 새로 만들어 혼백을 모셨다. 두 황족을 위해 따로 만든 거울은 신사 왼쪽에, 기존의 미타마시로는 오른쪽에 안치돼 있다.

숨진 이우는 일본 황족과 같은 대우는 받지 못한다. “히로시마에서 피폭 사망한 옛 왕족(대한제국의 왕가로 한국 병합 후에 황족에 준하는 지위로서 편입했다)의 이우공의 합사 처리는 야스쿠니신사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옛 왕족인 이우공을 특별 ‘일좌’(一座)로 합사된(새로 미타마시로를 만들어 따로 혼백을 모신) 옛 황족의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등 2주와 동등하게 취급할지 말지라는 문제다.”(<야스쿠니신사>)

일본에 안 가려고 설사약까지 먹어

논의 끝에 이우는 일본 황족처럼 일좌로 합사되지 않고, 수백 명의 육해군 군인과 같은 수준에서 합사되는 것으로 결정됐다. “달리 취급한 이유는 불명하지만, 여기에도 궁내청 쪽에서 암시가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책은 적고 있다.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이우는 그날 오후가 돼서야 히로시마 혼가와 상생교 아래에서 흙투성이로 변한 채 발견됐다. 그날 밤 이우는 히로시마 남단의 니노시마라는 섬으로 후송됐고, 해군 병원에서 의식을 조금 되찾았지만 이튿날 새벽 고열로 신음하다 숨을 거뒀다. 이우는 히로시마로 전출되기 전 운현궁에 머물면서,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일본에 가지 않기 위해 설사약을 먹으면서까지 버텼다고 한다. “남에게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보기에도 일본의 패망은 기정 사실인데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니 조선 해방도 뒷수습이 큰일입니다.”(김을한 <인간 영친왕>)

유해는 1945년 8월8일 서울로 운구됐고, 의무관들에 의해 방부 처리됐다. 일주일 뒤인 1945년 8월15일 정오, 히로히토 일왕은 라디오에서 새어나오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항복을 선언했다. 이우의 장례식이 열린 것은 일왕의 ‘옥음 방송’이 끝난 직후인 8월15일 오후 1시, 지금의 동대문운동장인 경성운동장에서였다. 조선 신궁의 궁사가 제주로 동원된 조선군사령부 주관의 육군장이었다. 젊은 미망인과 어린 두 아이의 모습이 도드라져 침통하고 구슬픈 장례식이었다고 한다.

2007. 5. 8. 한겨레21 제6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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