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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6월 20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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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에서 내 이름을 빼오라

“야스쿠니에서 내 이름을 빼오라”

일제 때 징용 나갔다가 전사자로 처리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생존자들의 울분과 탄식

노인들의 몸은 작은 공처럼 둥글게 말려 있었다. 그들의 기억은 혼미했고, 언어는 파편처럼 흩어져 한데 뭉치지 못했다. 노인들은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중반에 태어나, 스무 살 안팎의 나이로 태평양전쟁에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가난한 조국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고, 일본은 멀쩡히 살아남은 그들을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으로 기록해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모셔두고 있다. “제발 내 이름을 빼줬으면 좋겠어.” 노인들이 말했다.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억눌린 외침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왜 야스쿠니에 모셔진 것일까. <한겨레21>은 4월9일부터 사흘 동안 일본인 기자 스나미 게스케와 함께 야스쿠니 생존 합사자들의 증언을 채록했다. <한겨레21>은 노인들의 증언을 시작으로 야스쿠니를 넘어 동북아시아의 평화 정착의 길을 고민해보는 새 캠페인에 들어간다. 캠페인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한국인 유족들의 야스쿠니 합사 철회 소송을 지원하는 일본 쪽 지원단체 ‘노합사(No 合祀)’가 공동으로 진행한다. 편집자


△ 노인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야스쿠니신사에서 내 이름을 빼달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김지곤, 박원주, 제윤옥, 전인표씨. 이미 고령인 노인들은 머잖아 하나둘 세상을 떠날 것이다

▣ 광주·군산·대전·벌교·진주=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김지곤(89)씨는 “어이가 없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늙어 쪼그라든 육신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꿈틀거렸고, 흥분한 채 웅얼대는 목소리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김씨는 일왕을 위해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 죽은 영령(英靈) ‘가네무라 다케사다’(金村武治)로 일본 도쿄 야스쿠니신사에 모셔져 있다. 그가 “지랄 같지도 않은 일”이라고 흥분하자, 부인 곽월례(83)씨는 “그딴 거 아무렴 어떠냐”며 남편을 핀잔했다.

‘생존 합사’라는 이름의 코미디

김씨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안 것은 15년 전쯤이다. 춘천에 있는 태평양전쟁희생자 유족회 관계자에게서 “야스쿠니에 합사된 것 같은데 어찌된 일이냐”는 전화가 걸려왔다. “뭐라고?” 김씨는 “멀쩡히 산 사람에게 무슨 해괴한 일인지 몰라 짜증이 났다”고 말했다. 그는 “내 이름을 빼오라”고 자식들을 닦달하기 시작했고, 지난 2005년 그의 외손자가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하기에 이른다.

외손자 손정국씨가 2005년 6월20일 야스쿠니신사로부터 받아온 회신을 보면, 신사는 보관 중인 제신명부(야스쿠니에 모셔진 신들의 정보를 관리하기 위해 작성한 카드식 명부)에 적힌 김씨의 이름 옆에 ‘생존 확인’이라는 글자를 써넣은 것으로 나타난다. 야스쿠니신사는 “그것으로 문제는 해결된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김씨는 야스쿠니신사의 모든 기록(상자기사 참조)에서 이름을 빼주길 바라고 있다.

김씨는 어떤 과정을 거쳐 야스쿠니의 ‘살아 있는 영령’이 된 것일까. 그는 1919년 기미년에 전남 영암군 시종면 월롱리에서 태어났다. 열아홉에 평양에서 실업학교를 졸업한 뒤 비행기를 수리하는 일본 육군 군속으로 취직했다. 첫 월급은 35원, 근무지는 평양이었다. 이후 그는 함흥, 만주 통화 등을 거쳐 1943년께 필리핀 ‘제7항공야전보급대’로 전출 명령을 받았다.

△ 야스쿠니는 국가를 평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야스쿠니신사는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치환시키는 역할을 한다.(사진/ 한겨레 이정용 기자)

파죽지세로 일본군을 몰아치던 미군이 필리핀 루손섬에 상륙한 것은 1945년 1월9일이었다. 그는 “미군의 폭격을 피해 산으로 도망갔다”고 말했다. 섬 밖의 본부와 연락이 두절됐고 일본 육군은 그가 전사했다고 결론낼 수밖에 없었다. 야스쿠니신사에서 찾은 자료에는 그가 ‘필리핀 루손섬에서 1945년 5월30일 전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가 합사된 것은 전사 이후 14년이 흐른 1959년 4월6일이다.

생존 합사라는 코미디는 김씨만의 일일까. <한겨레21>은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지금까지 살아 있는 야스쿠니신사 합사자 11명의 명단을 확보할 수 있었다(표 참조). <한겨레21>은 그들을 만나, ‘생존 합사’라는 코미디가 가능했던 배경을 조사해보기로 했다. 노인들은 <한겨레21>의 인터뷰 요청에 “부담스럽다”는 반응을 보였고, 격한 목소리로 인터뷰를 거부하기도 했다. 생존 합사자 11명 가운데 김자영·김병기·허홍범·김희종씨는 전화로 간단한 사연을 설명해줬고, 남천오·김용하씨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계훈구씨는 1970년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제윤옥·김지곤·박원주·전인표씨는 고심 끝에 인터뷰에 응했다. 위원회가 2006년 12월까지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했던 안태만·엄주력씨는 그 뒤 노환을 이기지 못하고 숨졌다. 노인들은 전쟁이 끝나고 62년이 흐르는 동안 “누가 와서 우리 사연을 물어보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전남 벌교에 살고 있는 박원주씨는 1927년 7월4일생이다. 그는 “살아온 세월을 잊어버릴까 두려워” 편지지에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깨알같이 써놓고 있었다. 노인의 회고록은 위원회가 확인한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신사 쪽 공식 기록과 일치하기도 했고 어긋나기도 했다. 그는 “이웃에 살고 있던 일본인 이장 야마모토씨와의 친분 때문에 군속으로 지원했다”고 말했다. 열일곱의 어린 나이였다. 박씨는 편지지에 쓴 4쪽 분량의 회고록 ‘恨 많은 苦生과 해고록(회고록)’에서 “1944년 11월에 벌교에서 출발, 아침 기차편으로 부산 항구에 도착, 각 도별로 소집 인원이 약 500명 됐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확인한 그의 사망 일자와 장소는 ‘1944년 8월10일, 괌’으로 돼 있다. 아마도 그는 1943년을 1944년으로 혼동한 듯싶다.

△ 신사는 일본인들의 삶의 일부다. 애초에는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비는 소박한 민간신앙이었다.(한겨레21 박승화 기자)

부산으로 이동한 그는 일본 시모노세키와 도쿄를 거쳐 요코하마 해군기지에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배에 오른다. 사이판에서 1차로 물을 급수한 뒤 ‘어디론가’ 향하던 1944년 2월10일 새벽 3시였다. “앞에 미군 잠수함이 있다”는 고함에 잠에서 깨어나 갑판 위로 뛰어올랐다. 전방에서 어뢰 두 발이 빠른 속도로 배를 향해 날아오는 광경이 눈앞에 희미하게 펼쳐졌다. 배 안에는 조선인 노무자 100여 명, 일본 군인 300여 명이 타고 있었다. 배는 어뢰를 피하기 위해 긴급히 선회했지만, 허사였다. ‘쾅’ 하는 폭음과 함께 배는 두 동강으로 갈라졌다. 그는 배 앞쪽에 있었는데, 왼쪽 눈에 쇠 파편이 박힌 채 까만 밤 바다로 떨어지고 말았다.

일본인들은 철저한 사망 확인 절차 거쳤지만…

파편이 박힌 왼쪽 눈에서 피가 철철 흘러넘쳤다. 눈을 뜰 수 없었다. 허우적거리는 그에게 열두 자 길이의 판자가 흘러들어왔다. 태평양전쟁에서 수세로 전환한 일본군은 미군 잠수함의 습격에 대비해 배마다 구명용 보트처럼 쓸 수 있는 열두 자 크기의 판자를 실어두고 있었다. 작은 판자에 32명이 매달려 넘실대는 파도와 사투를 벌였다. 판자의 양쪽 끝에는 건빵이 들어 있었다. 건빵으로 연명하며 파도와 싸웠다. 일본 구축함이 도착한 것은 그날 오후 7시께였다. 15시간 동안 사투를 벌인 끝에 갑판 위에 누웠고, “살았다”하는 안도감에 맥이 탁 풀렸다. 눈 위에 박힌 파편은 괌에 도착한 뒤 수술해서 빼냈다.

전황은 불리해져만 갔다. 그는 괌에서 방공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하는 일에 내몰렸다. “어찌나 더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그 고생을 말로 못해.” 미군은 1944년 6월15일 사이판에 상륙했고, 한 달 뒤인 7월21일 괌에도 상륙했다. 언젠가부터 미군의 함포 사격이 한 달 넘게 이어졌다. 일본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밀려 변변한 저항을 하지 못했다. 그는 괌의 밀림 속으로 쫓겨 들어갔다. “열매도 따먹고, 쥐도 잡아먹고, 도마뱀도 잡아먹고, 토인(괌 현지 사람들)들 식량도 빼앗아먹고, 그렇게 살았소.” 그는 1년 넘게 이발을 못해 머리가 허리까지 늘어졌다. 일본이 패망한지도 모른 채, 1945년 10월을 맞았다. “미군들 쓰레기장에서 잡지를 하나 주워왔는데, 아카키라는 일본인이 영어를 좀 했거든. 그 사람 말이 일본이 벌써 항복했다는 거야.” 결국 그도 연합군에 항복했고, 포로수용소를 거쳐 부산을 통해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집에는 이미 그의 전사통지서가 도착해 있었다. 집안 어른들은 “돌아왔다”고 문을 두드리는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 엄주력씨의 아들인 엄안섭씨는 61년 전 미군 장교가 써준 취업 소개장을 보관하고 있었다. 엄씨가 생전에 적어둔 낙서가 보인다
그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2006년 7월11일 조간 신문을 통해서였다. 신문 한 귀퉁이 기사에 합사자 가운데 생존해 있는 사람 5명의 이름이 실렸는데, 거기에 자신도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박씨는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왜 산 사람이 야스쿠니신사의 영령으로 둔갑한 것일까.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돈’이었다. 일본은 자국민 희생자들에게는 은급법과 ‘전상병자전몰자유족등원호법’(이하 원호법)에 따라 보상을 해줬지만, 한국인들은 ‘국적 조항’을 이유로 보상 대상에서 제외했다. 돈이 드는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사망 확인이 이뤄졌고, 발견되는 오류들은 즉시 시정될 수 있었다. 보상에서 제외된 조선인들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기 시작한 것은 1959년(쇼와 34년)부터다. ‘보상’에는 돈이 들지만, ‘합사’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야스쿠니신사는 가족들에게 합사 사실을 통보하지 않았고 동의를 구하지 않은 것은 물론, 생사 여부조차 꼼꼼히 확인하지 않았다. 어떤 기준으로도 무책임하고 불성실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편의적 일 처리였다.

야스쿠니신사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몰라

<한겨레21>과 함께 생존 합사자들을 방문한 일본 기자 스나미 게스케가 “전쟁에 끌려갈 때, 전사하면 야스쿠니신사에 혼령이 모셔진다는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박씨는 “야스쿠니신사에 가본 적은 있다”고 답했다. “도쿄에서 잠시 훈련받을 때 같이 갔던 사람들이랑 놀러 갔지. 그때 사람이 많아서 함경도 사람 두 명이 전차에 치여 크게 다쳤거든.” 식민지 조선인이었던 박씨에게서 “싸우다 죽으면 야스쿠니신사에 간다”는 일본인의 정서를 찾긴 힘들었다.

스나미는 “일본인은 조금 다르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예는 남편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는 이와이 마스코가 2002년 4월15일 오사카 지방재판소에 제출한 진술서다. “요즘 총리가 8월13일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신 것에 대해 불복하는 분들이 전국에서 재판을 걸고 있습니다. (중략) 남편이 생전에 ‘전사하면 반드시 야스쿠니에 혼령을 모셔준다’고 믿으며 사지로 떠난, 바로 그 야스쿠니신사를 욕보이는 것은 나 자신을 욕보이는 것의 몇억 배의 굴욕입니다.” 스나미는 “모두는 아니지만 애국심이 많은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갖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은 잘 모르겠지만, 일본인들 중 일부는 천왕이 전쟁에서 죽은 아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신도(神道)는 애초 마을의 안녕을 바라는 일본의 소박한 민간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메이지 시대에 접어들며 일왕을 ‘인간의 모습을 한 신’으로, 그가 다스리는 일본을 ‘신국(神國)이며 불멸의 나라’라고 믿는 국가 주도의 이데올로기로 성장했다. “이제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쓸쓸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나라를 위해 죽어 천자님께 칭찬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릴 만큼 기운이 난다.”(일본 잡지 <주부의 벗> 1939년 6월호)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본 어머니들의 마음이 괴기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기독교’와 ‘천주교’의 순교를 떠올린다면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싶다. 문제는 그 죽음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와중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야스쿠니신사의 생존 합사자들은 야스쿠니에 대한 신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신이 합사돼 있다는 사실을 통보받을 때까지) 야스쿠니신사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경남 진주에 사는 제윤옥(86)씨는 “미친 놈들, 살아 있는 사람을 왜 거기다 두냐”며 웃었고, 대전에 사는 전인표(84)씨는 야스쿠니신사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씨는 스물두 살이던 1943년 봄 반강제적으로 일본 육군에 자원 입대했고, 대만 남부에 있던 호리에초등학교에 머물다 말라리아에 걸렸다. “병이 나았지만 꾀병을 부린 덕에 필리핀에 안 갈 수 있었거든. 그래서 살았지.” 그는 “일본군이 싫어 멋대로 살다가 3년 동안 한 번도 진급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인표(84)씨는 “징용 가면 100원은 용돈으로 주고, 100원은 저금해주고, 100원은 집에 보내준다”는 약속에 속아 군속으로 자원했다. 그는 “19살 때 끌려갔다”며 정확한 연도는 기억하지 못했는데, 나이로 계산할 때 1942년이 아니었나 싶다. 야스쿠니신사의 기록에는 그가 1943년 1월12일 기루와(?)에서 숨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뉴기니에서 미군의 공격을 받고 오른쪽 팔에 파편이 박히는 큰 상처를 입어, 노동력을 잃었다. 미군들이 쓰러진 그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옮겼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다 해방을 맞았다. 부인 정순임(85) 할머니는 “집으로 사망통지서가 와 3년이나 제사를 모신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부모의 영혼을 빼내오려는 후손들

군산에 살던 엄주력(1919~2007)씨는 집 뒤뜰에 솟은 작은 봉분 속에서 취재진을 맞았다. 그의 아들 엄안섭(59)씨는 “부친이 지난 3월12일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고 말했다. 그의 유품 속에서 포로로 잡힌 그와 동료들을 위해 사이판에 있던 찰스 슬로안 대위가 써준 소개장을 찾을 수 있었다. 슬로안 대위는 소개장에서 “이 한국인들은 6개월 동안 수송대에서 2.5t 트럭을 몰아 우리가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을 줬다”며 “트럭 운전사로 미군 부대에 채용해도 좋을 것”이라고 적었다. 엄안섭씨는 미군 장교가 써준 공문의 내용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아마 숨진 엄씨도 그러했을 것이다. 엄씨는 지난 세월 자신이 겪은 고초를 잊지 않으려는 듯 소개장 위에 징용될 때부터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겪었던 일들을 짤막한 낙서로 표시해두었다. ‘머리 부상’ ‘해군 본부’ ‘6주 교육’ ‘싸이판’ ‘포로’ ’한국 도착’ 따위의 말들이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후손들은 야스쿠니에 합사돼 있는 부모의 영혼을 빼내오기 위해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신사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엄씨가 신사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고 있었는지 지금에 와서 확인할 도리는 없다.

참고 문헌

<일제강점기 도시사회상연구> 손정목, 1996

<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 다카하시 데쓰야, 2005

<야스쿠니신사 ‘한국인 합사’에 관한 진상조사 보고서>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2007


 
국가를 평안하게 한다는 신사

야스쿠니 신사의 역사와 동북아시아의 갈등

한국 사람들에게도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는 익숙한 이름이 됐지만, 그 정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야스쿠니신사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69년 도쿄에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로 창건되면서부터다. 신사는 10년 뒤인 1879년 별격관폐사(국가의 특별 관리를 받는 신사)가 되면서 야스쿠니라는 이름을 얻었다. 야스쿠니는 국가를 평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메이지 일왕은 야스쿠니신사를 특권화하고 군인·군속으로 전장에 나가 목숨을 잃은 전사자를 제사지내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슬픔은 일왕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으로 변했고, 더 나아가 “천황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신앙으로 발전했다. 다카하시 데쓰야 일본 도쿄대 교수는 야스쿠니가 불러오는 그런 감정의 변화를 ‘감정의 연금술’이라 부른다.
야스쿠니신사를 둘러싸고 빚어지는 동북아시아의 갈등은 1978년 11월17일 합사된 도조 히데키 등 14명의 A급 전범 때문이다. 일본에서 ‘A급 전범 분사론’이 나온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고, 지난해 7월 “쇼와 천왕이 A급 전범 합사에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다”는 메모가 공개되면서 힘을 받기 시작했다. 야스쿠니신사 쪽에서는 “신도의 교리상 분사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진보적인 일본인들은 “A급 전범도 문제지만, 신사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인 합사자 2만1181명

10년여 전에야 사실 알려지며 유족들 소송 제기

야스쿠니신사에 일본을 지키다 죽은 신으로 모셔진 조선인 합사자는 모두 2만1181명이다. 조선인이 언제부터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1926년 5월26일치 <매일신보>에 “조선인 배씨 야스쿠니에 합사”라는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봐 적어도 그 이전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전체 합사자의 절대 다수인 2만여 명은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14년이 지난 1959년부터 합사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유족들에게 합사 통보를 하지 않았고, 동의 여부도 묻지 않았다.

야스쿠니신사에 조선인 합사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10년여 전의 일이다.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유족 관련 단체들을 통해 1990년대 중반이 돼서야 합사 여부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후손들은 견딜 수 없는 치욕감을 느꼈다. 2001년 6월29일 한국 유족 55명은 도쿄 지방재판소에 “합사를 폐지해달라”고 소송을 냈지만 일본 법원은 “합사는 종교법인인 야스쿠니신사가 한 일이기 때문에 정부가 뭐라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며 원고들의 소를 기각했다. 후손들은 2007년 2월26일 야스쿠니신사와 일본 정부를 상대로 두 번째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수억원의 돈이 드는 소송 지원을 위해 한국의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의 ‘노합사(No 合祀)’ 쪽이 발벗고 나서고 있다. 오구치 아키히코(63) 변호사 등 진보적인 일본 변호사들이 무료 변론을 맡기로 했다.

야스쿠니에 합사됐지만, 살아서 고국에 돌아온 것으로 확인된 사람들은 60명이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가 확인한 수치다. 이 가운데 49명이 이미 목숨을 잃었고, 11명이 생존해 있다. 위원회에 서류를 접수하지 않은 생존자가 나중에 더 확인될 수 있다. 북쪽에도 생존 합사자가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확인은 불가능하다.

야스쿠니신사에는 합사자들의 이름이 적힌 세개의 명부가 있다. 하나는 영세부봉안소에 보관 중인 야스쿠니의 가장 중요한 명부인 ‘영새부’(靈璽簿), 두 번째는 사무소에 사무용으로 둔 영새부의 복사본인 ‘제신부’(祭神簿), 마지막으로는 야스쿠니에 모셔진 신령을 찾기 쉽게 작성한 카드식 명부인 ‘제신명표’(祭神名票)다.

생존 합사자들은 “당장 이름을 빼라”고 요구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제신명표 옆에 ‘생존 확인’이라는 글자를 기입했기 때문에 합사가 철회됐다”고 말하지만, 생존 합사자들은 “영새부·제신부·제신명표 모두에서 이름을 빼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종교적 이유 때문에 “영새부에는 손을 댈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2007. 4. 24. 한겨레21 제6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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