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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동해를 본다] ③ 동해 경영의 꿈이 움텄다



시대따라 교통·어업 활용도 늘어

삼척 정라항은 조선시대 삼척포진이 설치돼 동해안 해방(海防)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사진 왼쪽). 삼척시 정라동 육향산 정상에 있는 척주동해비에 동해표기가 선명하다 (오른쪽). 조선시대 삼척부사를 지낸 미수 허목이 세운 것으로 해일 피해를 물리친다고 해 퇴조비(退潮碑) 라고도 불린다.

이번호 취재는 이규대 강릉대 교수, 장정룡 강릉대 교수, 강원대 삼척캠퍼스 배재홍 교수, 전영만 강원도 환동해출장소장, 김영섭 국립수산과학원 동해수산연구소 소장 직무대행, 김태수 삼척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전유길 양양군 학예연구사 등이 자문을 해 주셨습니다.
고려시대 이래 나라에서 강향사를 보내 제를 올렸던 국가 제사터인 양양 동해신묘.

고려∼ 조선시대에도 '동해' 명칭 사용
왜구 극성 고려말도 바닷길 교통로 이용


최근 모나코에서 개막됐던 국제수로기구(IHO) 총회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은 '동해(East Sea)와 일본해(Sea of Japan)' 표기문제를 놓고 다시한번 첨예하게 맞섰다.
 
동해 표기를 둘러싼 양국의 이같은 긴장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되풀이 될 가능성이 높다.
 
동해(東海)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끝에 위치해 있고, 세계가 우리를 '극동(極東)'으로 부른다는 측면에서 볼 때 가장 보편타당한 표기겠지만, 우리에게는 역사성도 깊은 명칭이다.
 

물론 광개토대왕비에도 '동해'라는 표기가 새겨져 있고 많은 사서(史書)와 지도에도 동해가 등장하지만, 지금 도내 양양과 삼척에도 동해의 역사성을 상징하는 선조들의 유물이 실존 한다.
 
먼저 양양의 동해신묘(東海神廟). 고려사 익령현조에 "동해신사(東海神祠)가 있다"고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조에도 "동해신단은 동쪽으로 3리에 있는데, 고려때 중사(中祠)로 조선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고 했으니 신묘의 연원은 최소한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난 2005년 강원도민일보사 주최로 삼척대(현 강원대 삼척캠퍼스)에서 열린 강원문화아카데미에서 '문명교류의 꼭짓점 동해 새롭게 들여다보기' 강연을 한 주강현 한국역사민속학회장은 "용신·해신 등에게 제사지내는 신사, 굿당 등이 즐비하지만, 동해신사는 국가에서 강향사(降香使)를 보내 제(祭)를 올린 국가 제사터 이기에 더 각별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삼척시내 정라항 뒤편의 육향산에 서 있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조선 현종 원년(1660년)에 삼척부사로 부임한 미수 허목(許穆)이 해일, 즉 조수(潮水)의 피해를 물리치기 위해 세웠다고 해 일명 퇴조비(退潮碑)라고도 부르는데, 이 역시 '동해'라는 명칭이 사용됐다. 동여진족 해구(海寇)와 왜구에 맞서 바다를 지킨 선조들이 고려∼조선조로 이어지는 동안 줄곧 동해라는 명칭을 사용했던데서 오늘 우리가 그 뿌리와 정체성을 가벼이 볼 수 없는 것이다.
 
동해는 시대를 거듭할수록 교통·어업 등의 활용도가 높아지고 일반인들의 바다 진출도 활발해진다.
조선 태조실록에는 전주의 안렴사와 틈이 생겨 일가 170여호를 이끌고 삼척으로 옮겨왔던 태조의 4대조 이안사(李安社·목조)가 전주에서 자신을 죽이려했던 산성별감이 관동의 안렴사가 돼 동해안으로 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다시 170여 일가와 함께 함길도 의주(宜州)로 옮겨가는 사실이 기록돼 있는데, 삼척에서 배를 타고 바닷길을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 나온다. 삼척시립박물관 김태수 학예연구사는 "목조가 전주에서 삼척으로 옮겨올 때도 육로보다는 바닷길을 이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왜구들이 극성을 부렸던 고려말에도 백성들이 바닷길을 용이한 교통로로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도 왜구의 침탈은 그치지 않았지만, 정치질서의 혼란과 민심 불안이 극심했던 고려말보다는 많이 안정세를 되찾아 갔다. 이에따라 상인, 어민들이 더욱 활발하게 바다로 진출한다. 그들 상인과 어민들이 조류·풍랑 등에 의해 일본으로 표류해 간 일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우리와 일본측 사료에 나타나는 표류민 기록은 일반 백성들이 얼마나 활발하게 동해를 활용했는지 실감케 한다. 표류민은 향후 '동해 교류' 편에서 자세히 살펴볼 예정이므로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고 넘어가겠다.
 
끊이지 않는 위협이었던 왜구의 침탈을 막기 위해 동해안 수군, 즉 해방(海防) 조직도 강화된다.
강원·경북 동해안 수군 기구의 중심은 삼척포진이었다. 현재 삼척시 오분항에 자리잡았던 삼척포진영은 조선 중종 때인 1510년 인근 정라항 쪽으로 옮긴다. 그곳에는 수군 첨절제사(僉節製使)가 주둔했고 월송포, 울진포, 안인포, 고성포 등 동해안 4곳에 수군 만호(萬戶)를 뒀다. 포진에는 현재 삼척 육향산 아래 흔적이 남아 있는 삼척포진성 처럼 석성으로 성곽을 쌓아 방어 역할을 강화했다. 안인포의 수군 만호는 뒤에 양양의 대포영으로 이전하는 등 포진체계에 일부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뒤에는 보다 전문적인 무장인 '영장'직을 만들어 삼척포진에 배치했다.
 
'조선수군사'를 펴낸 북한학자 오붕근 박사는 세종실록지리지를 인용, 당시 강원도내 선군(船軍·수군) 수가 1384명이었다고 밝혔다. 오 박사는 "전국적으로는 당시 모두 4만9317명의 선군이 있었는데, 전체 병력 가운데 선군이 차지하는 비중이 50% 이상이었다는 것만 봐도 리조(조선시대) 초에 수군무력을 증강하는데 얼마만한 힘이 돌려지고 있었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수군이 되고자 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늘상 바닷물과 함께하고, 잡역이 많은 수군이 지는 역(役)이 병졸들 가운데는 가장 고됐기 때문이다. 수군은 당번 근무때 필요한 무기와 군복, 식량 등을 자체로 부담해야 했고 먼 산간 마을에 거주지가 있는 수군들은 한달에 한번 교대를 위해 수백리씩 이동해야 해 왕복하는데 휴번기(휴가)를 다 소모하기 일쑤였다. 이로인해 부모나 처자, 형제가 식량을 먼 포구에까지 날라주는 형편이었다는 것이 세종실록 등에 전한다. 특히 강원도 수군은 본래 인원이 적었기 때문에 왜구의 침입 등 적정이 긴장한 때는 교대없이 장번근무를 서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 세종실록에 전하고 있어 고충이 특히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된 부담으로 수군 확보가 여의치 않자 조선시대에는 수군 세습제를 시행하기도 하고, 또 수군 무력을 증강하던 초기에는 무술에 능한 자를 우대하는 등의 시책을 일부 펴기도 했다.
 
어선 등 배를 만드는 일도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강릉대 장정룡 교수는 1660년 9월∼1662년 8월까지 2년여 동안 삼척부사를 역임한 미수 허목이 재임중 곡식을 수송할때 구조상 어선을 사용하는 것이 위험하다면서 올린 장계와 척주지 등을 살펴보면 당시의 어선 건조 및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고 소개했다.
 
"동해는 바람과 파도가 사나워 배와 노의 제도가 서해나 남해 같지 않습니다. 어부들은 7∼8월에 장마가 끝나거나 2∼3월에 눈이 녹고 따뜻해지면 모두 농한기를 이용해 여러날을 두고 양식준비를 해서 산중에 들어가 소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 배를 만들고, 그것을 끌어내릴 때는 소를 이용하는데, 큰배는 30마리나 동원합니다. (중략) 지금 곡식을 급히 수송해야 할 때를 당하여 곡식은 일만섬이나 되는데, 고깃배로 백번 수송해봐야 겨우 몇천석에 불과할 것 입니다. 지금 영동 9개읍에 십여척씩의 배를 만들게 해 1백여척을 준비토록 한다고 해도 한읍당 소가 삼백마리에 장정 오백명이 소요됩니다." 최동열·전제훈

● 조선시대엔 오징어가 귀했다

"조선시대에도 동해안에서 지금처럼 오징어를 즐겨 먹었을까" 사료가 보여주는 답은 '그러지 못했다' 이다. 조선시대 진상품 등을 기록한 각종 사료에도 오징어는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삼척시립박물관 김태수 학예연구사는 "척주지 등 각종 사료를 살펴봐도 문어 연어 복어 등 여러 어·패류들이 자주 기록에 오르내리는데 이상하게도 오징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채낚기 등 어획법 미개발 일상서 접하기 쉽지 않아

 
강릉대 장정룡 교수도 "임영지(臨瀛誌) 관동읍지 등 향토사료와 허균의 '도문대작(屠門大爵·1611년)' 등에 동해안 수산물이 많이 언급되는데, 오징어 기록은 많지 않다"고 강조했다.
 
장 교수는 "정약전(丁若銓·1758∼1816년)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 오징어 관련 설명이 나오는데, '까마귀를 즐겨먹는 성질이 있어서 물위에 떠 있다가 까마귀가 이를 보고 죽은 줄 알고 쪼려 할 때 발로 감아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 잡아먹는다고 해 오적(烏賊)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적고 있는데, 이 오적어(烏賊魚)라는 이름이 오징어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 이라고 덧붙였다.
 
국립수산과학원 동해수산연구소 김영섭 어업자원팀장(소장 직무대행)은 "오징어 어법이 발달해 있지않아 지금처럼 흔한 고기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오징어는 바닷가 연안에서 크는 어종이 아니어서 이를 잡으려면 집어등 불을 밝히고, 채낚기 낚시를 하거나 트롤이나 저인망 등의 어법으로 넓은 바다를 그물로 훑어야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그런 어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결혼식 전날 함진애비가 오징어를 얼굴에 쓰는 것이 풍습으로 자리잡았지만, 조선시대 의례를 그린 평생도나 풍속화 어디에도 오징어 가면을 쓴 장면은 볼 수 없다.
 
최동열 dychoi@kado.net 2007-05-16 21:39 강원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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