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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동해를 본다] ② 우리의 내해(內海)를 넘보지 말라

신라시대 무월랑과 연화부인의 애틋한 사랑 얘기가 전하는 강릉 남대천변의 월화정(사진 위). 왜구들의 집단 근거지였던 대마도 이즈하라항은 조선시대 들어 한·일교류에 중요한 연계선 역할을 하게 된다.

종교 전파까지 바닷길 통했다


이번호 취재에는 강릉대 장정룡·이규대 교수, 방동인 전 관동대 교수, 강릉시 오죽헌·시립박물관 정항교 관장, 강릉시 김흥술 학예연구사 등이 자문을 해주셨습니다.

영동에 불교 유입 경로 추정 발해인 36차례 일본 방문
여진족·왜구 노략질 잦아 수군 강화 제해권 장악 노력

"우리나라는 해양 국가인가? 대륙국가인가?"
몇년 전 해양수산부는 거꾸로 된 세계지도를 제작, 이목을 끈 적이 있다.
 
지구본을 바로 세우면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단에 걸쳐 있는 모양새지만, 지구본을 거꾸로 놓고 보면 영락없이 오대양으로 뻗어나가는 힘찬 기상의 중심에 대한민국이 있다.
 
중국과의 관계 등으로 인해 우리가 대륙지향적 정책을 펴 온게 사실이지만, 해양으로부터의 외침을 끊임없이 막아 국토와 바다를 지켰다는 점에서 해양이 지닌 무게를 가벼이 볼 수 없다. 특히 강원도와 경북 동해안은 서쪽으로 30리도 채 못가 곳곳에서 거대한 백두대간 준령에 막히고, 험준한 산줄기가 바다까지 뻗친 곳도 많아 바다는 생활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강릉대 사학과 이규대 교수는 "한송사, 한송정 등의 유적과 영동지역의 사찰 창건 유래 등을 살펴보면 영동지역은 불교 또한 삼국시대에 바다를 통해 유입, 전파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03년 강릉 남대천변에 복원된 '월화정(月花亭)'도 그 배경이 된 천년 설화의 내용구성이 바다 물길과 관련이 깊다. 고려사 악지의 명주가(溟州歌)와 증수임영지에 월화정의 사랑 얘기가 전하는데, 주인공은 강릉김씨 시조인 김주원(金周元) 공의 부모인 김 무월랑(無月郞)과 연화(蓮花)부인 박씨다. 사랑을 약속한 화랑, 무월랑이 경주로 떠난뒤 연락이 끊기자 연화부인 박씨가 잉어를 매개로 경주의 무월랑에게 편지를 전하는 클라이맥스가 바다 물길이 아니고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하다.
 
고대 군장국가 간의 전쟁,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고구려 신라의 남하와 북상 등 동해안의 역사적 궤적뿐만 아니라 신앙과 생활까지 모두 동해 바다와 통했음을 다시 실감할 수 있다.
 
이같은 해상 운용 능력은 발해대에 접어들어 더욱 빛을 발해 숱한 인력과 물자가 쉴새없이 동해를 가로지른다. 발해는 그야말로 동해를 내해(內海)로 삼았던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 해양사 연구의 권위자인 윤명철 해양문화연구소장은 그의 저서 '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에서 사서를 인용, "발해가 무왕 때인 727년 일본에 첫번째 사신을 파견한 이후 926년 멸망할 때까지 일본에 파견한 공식 사절만 무려 34차례였다"고 밝혔다.
 
"상인들을 태운 민간배들도 종종 독자적으로 출항, 서기 746년에는 발해인과 철리(鐵利·말갈)인 1100여명이 일본에 간 적도 있다"고 윤 소장은 덧붙였다.
 
그러나 발해인들의 동해 종단은 모험의 여정이어서 727년에 발해가 첫번째로 파견한 사신단은 파도에 휩쓸려 엄청난 희생자를 낸뒤 일부만이 일본에 도착해 "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고 전할 수 있었다는 것.
 
연변대 방학봉 교수가 쓴 '발해 사절단이 왕래한 항로'를 보면 777년에는 사행 120명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46명만이 생존했고, 815년에는 사신이 귀국길에 태풍을 만나 표류중 사망하기도 했다. 한겨울에 일본쪽으로 부는 북서 계절풍을 맞기위해 발해 범선들은 겨울에 출발하는 일이 많았다고 하니 목숨을 걸고 동해의 격랑을 넘은 그들의 해양 도전 의지에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고려시대 들어 동해에는 여진족들이 자주 출몰한다. 여진족들이 동해 바다에 자주 출몰했다는 것은 한편 의아스럽지만, 그것은 대륙중심사(史) 서술의 영향 때문이고 고려사 기록에는 함경도와 강원도, 경북 일원에 침입한 동(東)여진족 해구(海寇)에 대한 기록이 일일이 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강원도 침입 기록만 봐도 1028년 10월에 15척의 여진 해적선단이 고성에, 1029년 3월에 10척이 명주(강릉)에, 같은해 5월에 400여명이 양양에 각각 침입해 노략질을 자행했다.
 
고려사절요에는 여진 해구들이 1018년에 울릉도를 침입한 기록도 전하고, 이듬해인 1019년에는 무려 50여척의 선박을 거느린 여진족들이 대마도(對馬島)까지 들이친 기록도 보인다.
 
배 1척에 60여명씩 총 병력이 3000여명에 달했던 여진족은 대마도 남쪽의 이키섬까지 공략해 살인과 방화 약탈에 이어 239명을 포로로 끌고가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동국전란사(東國戰亂史)에는 고려 문종 6년(1052년) 동여진이 바다를 건너와 삼척의 임원을 공격했는데, 그곳을 지키던 장수 하주려(何周呂·고려사에는 河周呂)가 나가 싸웠다는 기록도 있다. 관동대 방동인 전 교수는 "여진족들의 바다쪽 침범은 당시 참으로 위협적인 사태"였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무차별적으로 여진 해구들의 침입과 약탈이 이어지자 고려 조정은 강원도 통천 등지에 선병도부서(船兵都部署)를 설치하는 등 동해안의 수군 무력을 대폭 강화하고 간성, 명주, 고성 등의 성을 대대적으로 새로 쌓거나 보수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 권5 문종 18년조 등에 전한다.
 
북한학자 오붕근 박사는 고려의 이같은 동해안 수군력 보강이 여진족 침입 제어에 상당한 방어 역할을 했고, 실제로 1019년 대마도와 이키섬을 쑥대밭으로 만든뒤 귀환하던 여진족들이 동해상에서 고려의 전함을 만나 큰 타격을 받고 쫓겨가기도 한다고 '조선수군사'에서 밝혔다. 이 해전에서 고려의 동해안 수군은 격전끝에 8척을 나포하고, 포로로 잡혀있던 일본인 다수를 구출해 대마도 등지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이 해전이 끝난뒤 고려 조정은 여진족 해구들의 노략질에 견디다 못해 그동안 동해안으로 피난해 와 있던 울릉도 주민들을 다시 울릉도로 돌아가 살게 했으며 고려사 의종 11년(1157년)조에는 '주민들을 더 이주시키기 위해' 명주도 감찰사 김유립(金柔立)을 보내 울릉도 등을 현지 조사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고려말에는 대마도 이즈하라(嚴原)와 후쿠오카의 하카타(博多)등을 근거지로 한 왜구들이 무수히 침탈 행위를 자행해 온다. 경상 전라 충청 등 삼남지방을 유린하던 왜구들은 1357년 6월 강릉부에 침입(고려사 권43, 권125)했고, 우왕 9년(1383년)에도 강릉과 안변 등지로 잇따라 침입했다(고려사절요 권32). 이 시기 왜구는 내륙지방인 영월, 홍천까지 노략질을 했다고 하니 그 피해상을 실감할 만하다.
 
왜구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고려는 창왕 원년(1389년)에 경상수사 박위로 하여금 대마도 정벌을 단행케 해 적선 300척을 불태우고, 고려인 100여명을 구해오기도 했다.
 
이러한 환란과 직결된다고 할 수는 없으나 동해안에는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복(福)과 안녕, 내세(來世)의 발원을 비는 치제(致祭) 의식이 유난히 많았다.
 
조선 현종때 삼척부사를 지낸 미수 허목(許穆)의 척주지(陟州誌)에는 고성 사선봉의 매향비를 인용, 고려 충선왕 원년(1309년) 동해안 관원들이 향나무 2500그루를 동해안 각 포구에 묻은 기록이 나온다.
 
미륵 부처가 환생하기를 빌며 향나무를 바닷가에 묻는 매향(埋香) 의식은 새 세상이 열리기를 바라는 동해안 주민들의 발원이 깃들어 있기에 주목된다.
 
지난 1999년 10월 삼척시 근덕면 맹방 해변에서는 그때 고려인들이 묻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해묵은 침향(沈香) 목이 발견돼 학계와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끌기도 했다.
 
장정룡 강릉대 교수는 "고려시대 밝은 미래를 기원하면서 묻은 매향의례에는 민심을 안정시키고,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왜구 등의 피해를 막으려는 염원과 의지가 함께 들어있다고 봐야한다"고 말했다.  

최동열·전제훈
지난 1999년 삼척 맹방에서 발견된 침향목을 정항교 강릉시 오죽헌·시립박물관장이 살펴보고 있다. 강릉/최원명

● 좋은 세상 도래 기원 '천년 침향'

고려인들이 동해 바닷가에 묻은 향(香)나무는 지금쯤 향 중의 으뜸이라는 '침향(沈香)'이 되었을까.
 
지난 1999년 삼척시 근덕면 맹방 해변에서 해묵은 향나무 한토막이 발견돼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확실하게 규명되지는 못했지만, 해묵은 향나무의 발견은 당시 새천년 밀레니엄 축제와 관련해 '천년을 묵어 침향이 된다'는 고려시대 매향 의례를 되돌아 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지금까지 매향비가 실제로 발견된 곳은 전국에서 모두 5곳. 강원도 고성 삼일포 매향비(1309년)와 평남 정주군 매향비(1335), 경남 사천 매향비(1387년), 전남 신안군 암태도 매향비(1405년), 충남 서산의 해미 매향비(1427년) 등이다. 고성 삼일포 매향비는 5곳 가운데 기록상 가장 빠르다.
 
고성 삼일포의 매향비 내용은 삼척부사를 지낸 미수 허목의 척주지와 관동읍지(關東邑誌)에 전하는데, "영동지방 각 고을의 지위가 높고 낮은 수령들이 강릉 정동진(310주), 양양 덕산망(德山望·200주), 간성 공수진(110주) 등 동해안 각 포진(浦津)에 모두 2500그루의 향나무를 묻었다(埋香)"는 것이다.
 
강릉대 장정룡 교수는 "매향의례는 미륵정토처럼 좋은 세상이 도래하기를 바라는 발원의 의미에다 후손들에게 좋은 향(香)을 제공하겠다는 포용적 세계관이 담겨있다"고 강조했다. 
 
해구와 왜구에 맞서 동해안을 지킨 선조들이 향(香)을 묻으며 기원하던 '좋은 세상'은 아직도 미래진행형인가.

최동열 2007-05-09 20:14 강원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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