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도본부는    · 시작페이지로    · 즐겨찾기    · 오시는길    · 메일보내기    · 사이트맵

2017년 11월 22일 수요일

내용검색  

옛지도

요즘지도

기사

칼럼

논문

그 외

 

  현재위치 > 독도본부 > 동해? 조선해 > 그 외

 


[역사로 동해를 본다]① 동해를 넘어야 강자가 된다

우산국 정벌 당시 신라 장군 이사부의 출항지로 추정되는 삼척 오십천 하구인 오분포구 현재 모습.

아! 대동해

"바다를 넘어야 강자가 된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불변이다. 따라서 강원도는 동해를 넘고, 잘 경영해야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 동해는 역사적으로 강원도를 비롯한 동해안 주에게 시련과 거친 세파의 상징처럼 여겨졌지만, 한편으로는 교역의 통로요, 생명 자원의 보고요, 인간 한계의 시험무대였다. 국토의 막내둥이 '독도(獨島)'를 품고 있는 바다. 그것만으로도 동해는 보배같은 존재겠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다보면 가슴이 아리고, 벅찬 순간들을 동해에서 한두번 마주치는 것이 아니다. 우산국 정벌에서부터 왜구와 해구(海寇)에 맞서 동해를 지킨 수군들, 그 바다를 생업의 터전삼아 천년 생명력을 간직한 토속 문화와 민속을 창조해낸 선조들이 있었다. 가까이는 반세기 냉전의 벽을 허물고 화해의 물꼬를 튼 금강산 관광이 또한 동해에서 시작됐으니 '대화퇴(大和堆)' 황금어장의 꿈을 일구던 동해 바닷길의 소중함이 더하다. 

그러나 그런 벅찬 역사에도 불구 대륙지향적 정책으로 인해 바다가 상대적으로 경시되는 풍조에다 중앙에서 먼 지리적 한계 등으로 인해 동해는 지금까지 그 가치와 중요성을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강원도민일보는 일본의 독도 침탈 도발행위가 계속되고, 환동해권 국가나 지역이 동해를 무대로 새로운 자원, 관광, 문화 각축을 벌이는 시점을 맞아 고대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해 개척∼관리∼경영의 역사를 비롯해 동해안 사람들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교류의 바다, 자원의 바다 중요성을 다시 살펴 미래 동해경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차원에서 오는 10월까지 6개월간 대동해 시리즈를 게재한다.

강릉 초당동에서 발굴된 원저광구호(왼쪽)와 오수전은 1∼4세기 동해를 이용한 활발한 교역의 증거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동해 경영 노하우 계승해야 미래 보장

1961년 옛 소련의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인류역사상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 유리 가가린은“지구는 푸르다”는 말을 남겼다. 우주에서 지구를 육안으로 직접 본 최초의 우주인이 지구는 푸르다 라고 말한 것은 그만큼 지구에서 바다면적이 넓다는 말로 대비된다.
 
우리 바다, 동해를 말할때 그래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은 신라장군 김 이사부(異斯夫)의 우산국 정벌.
 
고구려에 맞서려는 군사적 목적에서 지증왕 6년(서기 505년) 현재의 삼척지역을 기반으로 하고있던 실직국(悉直國)을 완전히 신라에 복속시켜 실직주(州)의 군주가 된 이사부는 지증왕 13년(512년) 강릉 지역의 하슬라(何瑟羅) 군주로 옮겨가면서 우산국 정벌을 단행했다. 이 원정은 동해상 망망대해의 두 섬 울릉도, 독도를 최초로 우리 역사에 편입시킨 기념비적 해상 원정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사부가 우산국 정벌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기반도 따지고 보면 당시 동해안의 수군력이 그만한 뒷받침을 해 줬기에 가능했다.
 
이사부가 정벌을 하기 훨씬 이전에 강원도와 경북 동해안에는 강릉의 하슬라국, 삼척의 실직국, 울진의 파조국(波朝國) 등 군장국가들이 존재했다. 뒤에 고대국가로 세력이 커진 신라와 고구려가 각축을 벌이면서 이들 군장국가들의 입지는 위축됐지만, 이사부 이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거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힘을 다퉜다.
 
지금도 험준한 산악이 교통을 가로막아 터널이 아니고는 육로 이동이 힘겨운 곳이 적지않은 동해안은 당시의 군장국가들에게도 이동에 엄청난 제한이 따랐다.
 
따라서 가장 편한 길은 동해를 타는 바닷길이 될 수 밖에 없었고, 해상 교통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발달해 있었다는게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김일기(작고) 전 삼척대 교수 등 향토사가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왕) 23년(102년) 조(條)에 등장하는 실직국과 음즙벌국(音汁伐國) 간의 전쟁도 해상 전쟁이었을 것 이라고 추론한다.
 
즉, 삼척의 실직국과 경주 부근 안강을 거점으로 하는 음즙벌국이 육로로 전쟁을 벌이기에는 거리상 이동과 병참 등에 문제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전쟁은 바다 물길을 이용한 수전(水戰)이었다는 것이다.
 
김태수 삼척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전쟁을 하던 양국이 당시 강대국으로 성장한 신라왕을 찾아가 판결을 요청하는데, 묘하게도 신라왕은 당시 해상세력의 강자였던 금관국의 수로왕을 불러 판결을 내리도록 한 것만 봐도 이 전쟁이 바다와 관계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 당시 동해안의 해상교통이 발전해 있었다는 것은 삼국유사 권1 내물왕 김제상(삼국사기에는 박제상) 편을 봐도 실감할 수 있다.
 
서기 418년 신라가 박제상을 보내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왕자 복호를 데리고 올때 고성포(강원도 고성군 구읍리)에 정박하고 있던 신라배를 타고 돌아갔다는 사실이 전한다.
 
이를 두고 북한 학자 오붕근 박사는 그가 펴낸 '조선 수군사'에서 "고성포는 고구려의 수군기지"라며 "고구려의 수군은 4세기말 5세기초 동해에서도 원거리 항해를 함으로써 신라를 도와 왜(倭)의 수군이 날치지 못하도록 강하게 견제했는데, 동해안 북부인 원산, 고성 등지에서 떠나 부산 앞바다에까지 진출해 경계임무를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5세기 후반,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펴 경북 포항(흥해, 청하) 일원까지 쳐 내려왔을 때나 6세기 초 신라가 이사부 등의 활약에 힘입어 다시 북진정책을 펴 진흥왕때 현재의 함경남도 황초령, 마운령까지 북상했을때도 수군의 빠른 이동과 후방 침투 등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김태수 학예연구사는 "험준한 산악지형인 동해안에서는 병참 즉, 식량이나 군수물자를 쉽게 조달할 수 없기 때문에 해상 기동력이 확보되지 않으면 전쟁 엄두를 내기가 어렵다"고 추론했다.
 
이처럼 상상외로 발달한 동해안의 고대 해상 교통능력은 이후 발해(699∼926년)때 더욱 발달해 동해를 가로지르는 일본과의 교역이 수시로 행해지는 밑거름이 됐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는 발해가 일본과 국교를 맺은 727년 8월 발해 사신이 일본에 파견된데 이어 이듬해 사신이 귀국할때 일본에서 답례사신을 보냈다는 기록 등이 전해진다.
 
당시 발해의 해운 발전 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일본의 삼대실록(三代實錄)에도 전해지는데, 871∼872년 일본에 갔던 발해 사신 일행은 당시의 관례에 따라 배 두척에 105명 정도의 사절단으로 구성됐으며 수많은 무역품들을 싣고 갔다고 한다.
 
북한학자 오봉근 박사는 이정도라면 최고 100여t을 적재할 수 있는 배가 있어야 한다고 진단했다.
 
고대 동해안 주민들의 바다 운용능력은 출토 유물로도 곳곳에서 확인된다. 경주 고분에서 출토되는 배(船) 모양의 그릇은 신라가 왜(倭) 등에 맞서 수군력을 키웠던 시기인 5∼6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풍파가 심한 동해상 여건을 고려해 예리하게 선수(이물)와 선미(고물)를 높게 만들어 안전성을 확보한 선진기법이 눈길을 끌고있다.
 
지난 2004년 강릉시 초당동에서 출토된 오수전(五銖錢)과 원저광구호(圓低廣口壺)도 해상 교역의 증거품으로 확인된다. 중국 한나라 시대의 동전인 오수전과 일본 하지키(土師器)계 토기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의 원저광구호(3세기 중반∼4세기 초)가 강릉에서 출토됐다는 것은 강릉이 1∼4세기 한·중·일 교역의 중간지착지, 즉 해상무역의 허브 역할을 했을 가능성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발굴을 맡은 강원문화재연구소 지현병 연구실장은 "철기시대 중국, 일본과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졌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강조했다. 강릉대 사학과 이규대 교수는 "동해안 주민들이 고기잡이 등을 하면서 익힌 조류, 풍향 등의 노하우가 전승되면서 일찍부터 수군과 해상 교통 수준이 크게 발달했다"며 "이사부가 울릉도를 정벌한 것도 북진 이후 예상되는 해상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최동열·전제훈·남진천

이사부 장군 출항지는?

“우산국 정벌 당시 이사부의 출항지는 어디였을까?”
지증왕 13년, 서기 512년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한 것은 동해상 울릉도, 독도를 우리 역사에 포함시킨 역사적 쾌거였음에도 그 출항지는 아직 분명히 밝혀진 것이 없다.
 
논제는 출항지를 삼척, 더 구체적으로 말해 현재의 오십천 하구인 오분항으로 지목하는데서 출발한다.
 
이사부는 서기 505년 삼척의 실직국(國)을 복속, 완전히 신라로 편입시킨뒤 512년 하슬라 군주로 옮겨갈때까지 실직주의 군주 역할을 맡았던 인물인데다 삼척의 오분항은 자연 포구로는 동해안에서 가장 큰 규모에 속하고, 울릉도(우산국)와도 직선거리로 매우 가깝다는 논거다.
 
이후 고려∼조선을 거치면서도 오분항이 동해안 해방(海防)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삼척포진이 설치된뒤 수군첨절제사가 주둔한 것도 이사부의 인연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이에대해 강릉, 즉 당시의 하슬라를 이사부의 출항지로 보는 견해도 적지않다. 우산국 정벌이 서기 512년 이사부가 하슬라(강릉) 군주로 옮겨온 해에 단행돼 하슬라 군주로서의 정벌이기 때문이다.
 
이사부의 주력부대가 강릉으로 옮겨온 상황인데다 강릉에도 안목 등 자연 포구가 적지 않은데 굳이 다시 삼척으로 내려가 출항을 할 이유가 있겠냐는 의견도 나온다.
 
하슬라나 실직이 울진의 파조국과 함께 창해삼국(滄海三國)이라고 불릴 정도로 독자적인 군사력을 발전시켜 왔고, 당시의 수군이나 해상운항 능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어서 해풍이나 조류(물살)를 어떻게 타느냐가 문제지, 어디서 출항하느냐는 중요한 고려대상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일본의 독도 침탈 도발행위가 끊이지 않아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이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사부의 출항지 또한 궁금하기 짝이 없지만, 아직까지는 사서(史書)나 유물, 유적을 통해 전혀 발견된게 없기 때문에 논의만 있을 뿐 쉽게 규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최동열 dychoi@kado.net 2007-05-02 19:50 강원도민일보

※ 이번호 취재에는 강릉대 이규대 교수, 강원대 삼척캠퍼스 배재홍 교수, 삼척시립박물관 김태수 학예연구사, 강릉시 김흥술 학예연구사 등이 자문을 해주셨습니다.
관련
내용
관련내용이 없습니다

 


| 개 요 | 이 책은 2008년도에 일본 중의원에서 독도문제와 ...

 

 
  Copyright ⓒ 2001.독도본부. All rights reserved
전화 02-747-3588 전송 02-738-2050 ⓔ-Mail : dokdo2058@korea.com
후원 :국민은행 024-047973-01-019(독도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