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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8월 07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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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민족주의의 뿌리와 오늘

“미일동맹으로 재충전 그러나 재몰락 향한 길”
해외 전문가 기고 ㅣ 을사조약 100년 · 해방60년, 다시 일본 민족주의를 묻는다.

 

민족21 minjog21@minjog21.com

 

이찬우|사사가와평화재단 주임연구원

2004년 일본에서는 태풍이 10번이나 상륙하였고, 니이가타현 중부지방에는 진도 7의 강진이 발생하여 인명과 재산 피해가 많았다.

피해지역의 주민들의 회생노력과 자원봉사자들의 지원, 지방자치단체와 중앙 정부의 조직적인 복구 노력을 보면서, 일본인들이 위기에 반응하는 행동양식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기도 한다.

가능성 있는 자연재해에 대한 충분한 준비, 침착성이라는 사회문화, 상호부조를 위한 자발적이면서도 조직적인 행동들은 분명 외국인이 배워야 할 점이다.


‘한류’는 자기보완적 하위문화


반면 경제면에서는 10년 이상 장기에 걸친 경기침체의 원인이 상당부분 정부의 경제정책의 실수에 기인함에도 불구하고 이렇다할 데모나 정부 비판의 시민운동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현상을 보면서 역동성이 사라진 사회문화라는 이미지를 느낀다.

인구의 노령화로 2004년을 정점로 2005년부터는 인구 감소가 시작된다는 보고도 있어 노쇠한 일본 사회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오늘의 일본은 청소년들이 어린이 때에는 예절바른 아이였다가 10대 중반이 되면 갈 방향을 잃은 새떼들처럼 도시의 밤을 배회하고, 향락문화에 신속히 빠져드는 이들로 넘쳐난다. 노인에 대한 공경은 없고 돈을 얻기 위해 또는 그냥 취미로 원조교제, 마약, 강도질, 이지메(왕따)를 일삼는다.

어린이 유괴살해 사건도 뉴스를 장식하는 주 메뉴가 되었다. 이러한 이들이 수적으로는 소수일지언정, 장래의 꿈보다는 눈앞의 쾌락을 더 만끽하고자 하는 청소년들에게 일본 사회의 장래는 강 건너 불과 같다.

일본 사회는 지금 분명 위기에 처해 있다. 사회 전반에 나타나는 무기력증, 급속히 증가하는 부정부패, 부진한 경제개혁, 연금와해의 불안 등으로 인해 일본인들은 일본 사회에 대해 더욱 냉소적으로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문화의 역설적 반영인가, 2004년에는 한류(韓流)라는 한국 문화 붐이 일본 사회를 강타하였다.

한국의 인기 드라마 〈겨울연가〉의 방영으로 촉발된 ‘욘사마’(탤런트 배용준에 대한 존칭어) 붐은 일본의 40∼50대 아주머니들에게 ‘순수’ ‘부모 자식간의 애정’ ‘박진감’ 등 잃어버렸던 것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겨울연가〉의 경제 파급효과는 일본과 한국을 합쳐 약 2000억 엔(2조 원)에 이른다는 일본 내 민간연구소의 보고도 있다.

그만큼 한국 문화가 일본 사회에 아주 가까워졌지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고 김치를 더 자주 먹고 한국 드라마에 빠지게 된 일본인들이 지닌 재일 조선/한국인에 대한 차별의식은 그만큼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일본인들에게 오늘의 한국 문화는 우월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향수의 회복이라는 보완적 하위문화(Sub-Culture)로서 일정 시기에 유행하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한국인들은 일본에서의 한류(韓流)를 즐기되 이를 문화적 지배니 점령이니 하는 식민주의적 발상은 배제해야할 것이다. 현재 일본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불안한 사회, 냉소적인 사회문화를 극복하기 위한 자주적인 처방전이다.

이 글에서는 2005년으로 전후 60년을 맞이한 일본이 어떠한 방향으로 국내 정치와 사회 문화, 대외관계를 끌고 갈 것인가를 주시하면서, 일본이 걸어온 역사, 일본의 전후 민족주의와 미일동맹의 결합으로 나타난 안보정치에 초점을 맞추어 일본 민족에게 민족주의의 희망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허구적 단일민족주의=보수우익

일본의 공영방송 NHK는 2001년 8월에 ‘일본인, 멀고 먼 여행’이라는 타이틀로 일본인의 기원을 조사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이후 매년 이를 재방송해오고 있다.

이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기에 대략의 내용만 소개하자면, 일본 열도에 최초의 현대 인류가 들어온 것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해서이다.

하나는 2만 년 전 이전에 시베리아 대륙의 맘모스 사냥꾼들이 남하하는 맘모스를 좇아 홋카이도로 들어온 경로, 둘째는 1만 년 이전에 동남아, 중국 남부지역으로부터 남방인들이 바다의 흑조를 타고 큐슈로 들어온 경로이다. 이렇게 일본에 들어온 현대 인류는 기원전 약 1만 년 정도부터 기원전 500년경까지 토기, 간(마제)석기를 사용하면서 주로 수렵과 채취 생활을 하는 죠몬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런 가운데 기원전 6000년 전부터 지금의 대한해협(쓰시마 해협)을 통해 동해로 따뜻한 난류가 흐르게 되자 일본 열도는 3분의 2가 삼림으로 뒤덮인 온난한 지역으로 바뀌어 기원전 5세기 말인 춘추전국시대부터 기원후 3세기 경까지 수 백년에 걸쳐 중국과 한반도에서 쌀 농사문화와 청동기를 가진 약 100만 명 정도가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이렇게 이주한 도래인(渡來人)들이 야요이 문화를 형성하였고, 도래한 야요이인들과 재래의 죠몬인들의 혼혈로 현재의 일본인의 원류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죠몬인과 야요이인들의 인구 비율은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달라 3대7, 5대5, 9대1 등 논쟁이 있지만 약 기원 전후 시기의 100만 명 규모는 상당한 규모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일본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한반도인들과 혈통이 비슷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현대 일본인은 두 가지의 염색체를 갖고 있는데 YAP(+)염색체는 죠몬인에게서 받은 것이고 YAP(-)염색체는 도래인인 야요이인에게서 받은 것이다.

현재의 오키나와인과 홋카이도의 아이누족은 야요이인의 염색체를 갖고 있지 않은 죠몬인의 후예라고 한다.

일본인의 조상은 단일 민족이 아니라 죠몬인과 야요이인의 결합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이 정설이 되었다. 고대 일본에는 별도의 일본인이 존재하고 이들이 한반도로부터의 도래문화를 수입한 것이 아니라, 도래인이 기술과 문화를 일본에 갖고 들어와 발전시키고 기존의 재래인들과 융합하면서 현재의 일본 문화의 원류인 나라지역의 아스카 문화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에도 일본의 일부 ‘단일 민족설’ 주의자들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회’(1996년 12월 설립)을 세워 《새로운 역사교과서》(후쇼사 간행)을 발간하고 이시하라 신타로 씨가 지사로 있는 동경도 등 일부 자치체 교육위원회에서는 각 중학교에 이를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들의 입장은 일본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단일 민족설을 주장하고 고대부터 일본 민족이 독자의 우수한 문화를 갖고 한반도 등으로부터의 도래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입하였다는 입장이다.

이는 ‘국가위신 회복형’의 국수주의이다. 증명할 수 없는 허위를 우기는 것보다는 일본 문화의 원류는 동아시아 문화의 일부이고 일본인도 동아시아인의 혼혈인 것을 솔직히 인정함으로써 일본 문화와 일본인의 진정한 ‘독창성’을 재발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 에도막부 말기와 메이지유신정부 시기에 활약한 가츠 가이슈(勝海舟)의 고백을 음미해볼 만하다. 그는 말년의 담화집(《氷川淸話》, 1888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으로 말하면 반쯤 망한 나라라거나 빈약국이라거나 하면서 경멸하고 있지만, 나는 조선도 이미 소생의 시기가 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조선을 바보로 보고 있는 것도 최근의 일이고, 옛날에는 일본 문명의 씨는 모두 조선에서 들어온 것이지. 특히 토목사업은 모두 조선인이 가르쳐 준 것이다.”


천황제의 역사적 본질은 ‘변화’


일본의 민족주의는 애국사상으로 달리 표현할 수도 있는데, 논자들에 따라 애국심(‘파토리오티즘’), 에스니즘(종족으로서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국민주의, 자민족중심주의, 배외주의, 천황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국수주의, 우익사상 등 다양한 표현을 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민족주의가 가진 변화무쌍성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일본의 민족주의는 천황제와 함께 시작되었고 현재에도 천황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민족주의의 원류인 천황제를 알아본다.

우선 고대의 천황제는 ‘직접 통치자로서의 천황제 성립’을 의미한다.

일본의 역사에서 ‘천황(天皇)’이라는 호칭은 텐무천황(天武天皇) 시대(서기 673∼686) 이후 성립되었다. 그 이전은 오오가미(大王)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다. 왕권 강화라는 고대국가의 성립과정과 함께 서기 645년 이른바 다이카개신(大化改新)으로 한반도로부터의 도래인 계통인 호족 소가(蘇我) 씨와 기타 호족들이 실권을 잃고 대왕 중심의 통치구조를 갖게 된다.

천황 가계가 도래인계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고, 역사서(속일본기)에는 781년에 천황이 된 간무천황(桓武天皇)의 생모가 백제 무녕왕의 자손이라고 되어 있어 현 헤이세이천황(平成天皇)도 2001년의 생일 기자회견에서 이를 시인한 바 있지만, 서기 7세기 말부터는 천황 명칭 사용과 함께 한반도와의 정치적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고 독자적인 통치체제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한반도에서 백제, 고구려의 멸망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712년에는 천황을 신격화한 신화인 《古事記(고서기)》가 출간되었다. 이것이 일본 (원시)민족주의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황이 직접 통치한 기간은 길어야 200년 남짓이었다.

이후 봉건시기의 천황제는 명목상의 천황제였다.

서기 866년에 귀족인 후지와라 요시후사(藤原良房)가 섭정하면서 통치권은 귀족의 손으로 들어갔다. 이후 고대의 율령제 지배는 붕괴하고 중세사회가 시작된다. 동시에 천황은 명목일 뿐 섭정정치가 정치를 독점하게 된다.

1221년부터는 1867년까지 무가(武家)에 의한 정치 독점이 이어졌다. 천황에겐 쇼군(將軍)에게 ‘세이에비스다이쇼군(征夷大將軍)’이라는 칭호를 수여하는 역할만이 주어졌다. 천황은 궁중 밖을 나온 적도 거의 없고 일반 국민들은 영지를 지배하는 영주(다이묘)와 장군(쇼군)을 통치자로 인식하였다.

그후 일본에서 천황제 통치가 부활한 것은 근대 이후였다.

메이지천황(明治天皇)은 메이지유신 1년 전인 1867년에 14세의 나이로 즉위한 소년이었다. 교토의 궁궐에서 자랐기 때문에 당시의 관습에 따라 얼굴은 하얗게 화장하고 눈썹도 그렸다.

메이지 유신 이후 소년 천황 메이지가 쉽게 권위를 가지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유신정부는 천황의 신격화를 통해 권위를 부여하려 했다. 이를 위해 《古事記(고서기)》《日本書紀(일본서기)》 등에 기록된 신화를 가지고 천황을 ‘아라히토가미(現人神)’로 종교화하였다.

일본 국민들이 천황을 직접 체험하도록 메이지 천황은 19세이던 1872년부터 32세가 된 1885년까지 6회에 걸쳐 홋카이도(北海道)로부터 가고시마(鹿兒島)에 이르기까지 전국을 순행(巡幸)하면서 민정시찰을 하였다.

이후 메이지 천황은 개인적으로도 식사를 줄이면서 사재를 털어 부국강병 정책을 지원하는 것으로 근대국가 형성의 지도자로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조선과 중국 왕실의 부패와 대조되는 부분이다.


천황 군국주의로 되돌아가나


1889년(메이지 22년) ‘대일본제국헌법’이 제정되었는데 그 내용은 “제1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손(万世一孫)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 제3조, 천황은 신성불가침이다. 제4조,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하며 이 헌법의 규정에 따라 이를 시행한다. 제11조,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로 되어있다.

메이지 천황시대 이후 1945년까지 일본은 천황이 대원수(大元帥)로 군권을 행사하고 신사(神社)를 통해 정신적으로도 지배하며, 교육칙어(1890년 반포)를 통해 국민의 일상 생활까지 지배하는 정치, 군사, 종교, 교육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천황군국주의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천황이 절대왕권을 행사했다기보다는, 천황의 신성 불가침성을 내세워 신하들(관료, 후에는 육군)이 헌법에 따라 통치하는 입헌군주제의 구조였다고 볼 수도 있다.

메이지유신정부는 봉건시대를 국민국가시대로 전환하기 위하여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여 백성들에게 ‘일본’이라는 국가의식과 민족의식(국민의식)을 갖게 하고자 ‘천황제’ 정치체제를 선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천황제 시기에서 일본의 민족주의는 근대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로서 성립되어 천황군국주의로 성장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의 천황제는 상징적인 제도로 변화했다.

1946년 1월 1일 쇼와천황(昭和天皇)은 ‘신일본 건설에 관한 조서’를 발표하고 스스로 천황의 신격(神格)을 부정하였다(천황인간선언). 1946년 11월에 제정된 ‘일본국 헌법’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들어갔다.

“제1조,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국민통합의 상징이고, 그 지위는 주권을 갖고 있는 일본국민의 총의에 근거한다.
제4조, 천황은 (…) 국정에 관한 기능을 갖지 아니한다.
제9조, (1)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이 발동하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이를 영구히 포기한다. (2)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기타 전력을 갖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 신헌법은 맥아더의 지휘아래 연합국군 총사령부(GHQ)의 민정국원 21명에 의해 불과 1주일만에 작성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헌법을 미국은 일본 정부에 협박하여 받아들이게 하였다고 한다. 일본측은 별도로 마츠모토안(松本案)이라는 독자의 헌법개정안을 내놓았는데 이는 대일본제국헌법을 약간 고친 정도로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한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즉 천황이 주권자인 국체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 소련, 오스트레일리아 등은 천황을 전범으로 재판할 것을 강경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미국 내에서도 천황을 전범으로 재판하라는 요구가 강하였지만, 맥아더는 천황을 전범으로 재판하여 사형이라도 하면 일본인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점령정책을 희생 없이 수행하기 위해 천황을 보존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대신 천황주권을 없애고(4조), 전쟁수단과 교전권을 포기(9조)하고, 미국의 군사적 보호 하에 두는 조치(오키나와 점령 유지)로서, 미국의 안전보장상의 이익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상 역사 속에서 천황제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일본인이 천황을 존경하는 것이나 숭배하는 것이나 그것이 개인적인 범위 혹은 민족 내부에 국한되는 것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천황제가 필요한지 없어져야 하는지는 일본인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다.

그러나 일본 정치권에서 나타나는 보수 우경화의 흐름에 대한 우려는 미국에 의해 강요된 전후체제를, 다시 과거의 천황 군국주의 시대로 되돌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일본이 미국에 대해 자주적인 입장을 갖는 것은 한 국가로서 당연한 일이다. 군대를 보유하는 것도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하지만 자주적인 정책을 갖는다고 해서 그 내용이 모두 정당화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평화와 친선의 국제관계를 유지하고 지키는 일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에서 일고 있는 보수 우경화의 흐름과 일본 민족주의의 연관성을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팍스 재팬’ 속에 아시아 번영 있다?


먼저 보수우경화 움직임의 주체인 우익(右翼)의 입장이다. 이들의 소망은 패전 전의 일본 민족주의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식민지 지배와 태평양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전후 미국식 개인중심의 자유주의가 학교교육의 중심으로 되어온 것에 대항하여 일본민족중심주의, 국가중심주의 사상을 일본의 정치와 사회, 교육현장에서 당당히 실현하고자 하는 소망이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국기·국가법의 실시 등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40대 이상의 한국인이라면 박정희 유신시대의 역사시간에 배운 민족주의, 국가주의 교육을 떠올릴 때, 일본 우익이 주장하는 민족주의가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 유신정권 시기 횡행하던 민족주의가 국가 파시즘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는 점에서 일본 우익의 민족주의가 우려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제국주의적 팽창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사용된 반면, 한반도의 식민지시대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피지배자의 해방운동으로서 정당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 본질적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한편 일본에 있어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인 민족주의의 형성을 좀 더 들여다보자.
19세기 후반의 국제정세에서 일본은 구미열강의 제국주의 침탈에 대항하여 부국강병 정책을 실시하고 근대적인 국가로 탈바꿈하는 것을 초미의 과제로 삼았다. 구미열강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쳐 합리주의와 개인주의라는 자본주의체제를 뒷받침하는 사상적 기반과 정치적 민주주의제도를 형성하면서 근대문명을 창출해냈다.

이는 필연적으로 경제적 팽창으로서 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적 수탈을 동반하였다.

일본의 근대화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개혁을 통해 서구문명을 학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근대적 개혁이 성공 궤도에 들어선 이후의 진행에 대해서는 서구 지향의 ‘탈아입구론’과 일본형의 ‘아시아국가론’이 양립하였다.

특히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은 중국에게서 뺏은 랴오둥(요동)반도를 유럽의 간섭(3국간섭)으로 중국에 되돌려주어야 했고, 러시아의 적극적인 남하정책으로 조선 정부가 친러정책으로 전환하는 등 ‘국가안보’상의 위기 국면을 맞이하였으며 이를 타개하고자 무모하게 조선의 명성황후를 살해하기도 하였다.

러시아로부터의 위협으로 일본은 만주(중국 동북지역)를 국익 방어선으로 인식하게 되고 결국 1904년 러일전쟁으로까지 치달아 아슬아슬하게 승리함으로써, 일본에서는 ‘아시아국가’의 지도자로서 스스로를 인식하는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내셔널리즘)가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일본 민족주의는 구미열강에 대항한다는 측면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일본의 근대적 개혁의 산물이며 본질적으로 침략사상의 속성을 갖고 있다. 즉 일본 민족주의에는 아시아 피압박 민족의 민중이 갖는 시각이 없고, ‘팍스 재팬’의 틀 속에 아시아 민족의 번영이 존재한다는 시각만이 있다. 일본 민족주의의 다른 간판이 ‘아시아주의’였던 것은 이러한 시각의 반영이다.

메이지천황 시대의 45년간(1912년까지)은 일본의 근대화가 성립된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만과 조선반도의 식민지화도 달성했다. 이 시기에 일본 민족주의, ‘아시아주의’도 형성되었다. 이 사상이 실제로 공세적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이후 40년간 일본의 역사는 아시아제국을 형성했다가 1945년 8월 패전과 피점령이라는 극한 상황으로까지 파괴되는 말로를 맞이했다.

이는 일본이 산업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함으로서 발생하는 자원획득 욕구로 한반도와 만주를 일본 경제의 하위단위로서 건설하여 수탈하는 대상으로 삼았지만, 근대 문명의 가장 중요한 자원인 석유가 한반도와 만주에서 나오지 않음으로써, 석유자원이 있는 동남아시아로까지 경제지배 영역을 확대하고 이를 무력으로 확보한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민족의 경제적 계산이 깔린 ‘아시아주의’는 아시아 여러 민족의 민중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사상이 되었다. 비록 조선, 중국, 버마 등지의 민족 선각자들이 열강 지배국가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일본의 힘을 활용하였던 것이 사실이고, 일본의 ‘아시아주의’ 사상가들 중에는 조선, 중국, 버마의 독립을 위해 개인적으로 헌신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결국 일본 군부가 중심이 된 천황군국주의 세력이 ‘민족주의’ ‘아시아주의’라는 브랜드를 독차지하였다.

이러한 패전 전의 일본 군국주의가 전후 일본의 보수우익세력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일 민족주의 세 원류와 네 총리


전후 일본에서 민족주의는 보수우익 세력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리고 ‘아시아주의’의 사상은 정치사상의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반면에 좌익세력은 패전전의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자유, 평등, 민주주의, 인간에 대한 존엄, 국제적 연대라는 보편적 가치관에만 주력하였다.

범보수세력의 정치적 본산으로서 ‘파벌연합정당’인 자민당 내에서도 민주주의가 우선적인 가치관이 되었으며 민족주의는 보수우익 세력의 사상이 되었다.

자민당의 내부를 보면 ‘친미, 경무장(輕武裝), 경제우선’을 지향하는 보수본류(保守本流)와 ‘친미, 아시아와의 평화공존’을 주장한 보수온건, ‘자주헌법, 재무장, 정치우선’을 지향하는 보수우익의 세 흐름이 각기 파벌을 형성하면서 상호 협력과 갈등 속에 정치를 이끌어왔다. 세 흐름의 원류는 다음과 같다.

우선 보수 본류에 해당하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1946. 5. 22∼47. 5. 24/48. 10. 19∼54. 12. 10)의 흐름이다.
패전 후 초기의 총리로서 일본의 독립을 다시 찾는 등 전후 일본 정치의 기반을 만든 외교관 출신의 요시다는 패전전 시기부터 친영미(親英美)의 입장을 갖고 있었다(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입구’론의 영향이 컸다). 따라서 군국주의적인 ‘대동아공영권’에 대해서 반대하며 영미와의 전쟁도 반대하고 전쟁종결에 노력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전후 피점령 시기 수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의 전전(戰前) 아시아 지배를 당연시하였으며, 특히 중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

요시다는 외교관으로서 1906년 중국 선양에 첫 부임한 이래 1928년 3월 봉천(奉天, 오늘의 선양) 총영사에서 외무차관으로 승진하기까지 합계 11년 간을 중국에서 보냈다. 그는 만주사변(1931년) 발생 4년 전인 1927년 4월에 이미 군사력으로 중국 동북지방을 탈취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존 다워, 《吉田茂와 그의 시대》, 中公文庫, 1991). 이러한 요시다의 입장은 한반도에 대한 태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는 1949년 GHQ(연합국총사령부)의 맥아더 최고사령관에게 재일한국·조선인의 모국송환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는데 그 이유로는 “(1)일본은 미국의 호의로 대량의 식량을 수입하고 있는데 그 일부를 재일 조선인을 부양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수입은 장래 세대에 부담을 지우는 것이 된다.

조선인을 위해 지고 있는 대미채무를 장래 세대에 부담시키는 것은 불공평하다. (2)대다수의 조선인은 일본경제의 부흥에 전혀 공헌을 하고 있지 않다. (3)더욱 나쁜 것은 조선인 중에 범죄분자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일본 경제법령의 상습적인 위반자이다. 그들 중 다수는 공산주의자 및 그 추종자로서 가장 악랄한 정치범죄를 저지르는 경향이 크며, 상시 7000명 이상이 옥중에 있는 상태이다”라는 것이었다(맥아더 문서관 소장). 이렇게 차별과 편견으로 가득찬 요시다의 서한은 GHQ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국이나 한국 등 아시아에 대해 우월한 입장을 갖고 있었던 요시다의 인식은 요시다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시 일본 보수정치계에서 지배적인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민당 우파의 스승, 기시 노부스케


일본 우익의 또 하나의 원류는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총리(54. 12. 10∼56. 12. 23), 이시바시 탄잔(石橋湛山) 총리(56. 12. 23-57. 2. 25) 등으로 대변되는 보수온건 노선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1915년부터 중의원 의원을 지낸 의회정치가로서 요시다와 함께 대미(對美)전쟁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전후 미군정으로부터 정치추방을 당한 바 있으며 보수정치계에서는 반(反)요시다 세력의 대표였다. 그는 1955년 보수대합동을 실현하여 자유민주당(자민당)을 탄생시키고 야당인 사회당과의 소위 ‘55년 체제’를 성립시켰다.

그는 반공주의자로서 미국 중심의 반공진영에 일본이 가담하는 것을 수용하였지만 총리가 된 이후 미국 일변도 외교에서 벗어나 1956년 소련과 공동선언을 통해 국교정상화를 달성하였다. 한편 헌법을 개정하여 자위대를 정식군대로 전환해야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시바시 총리는 언론인 출신의 자유주의 사상가로서  전쟁 전부터 전쟁과 식민지 정책을 반대하였다. ‘만주포기론’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동양경제신보》 사설에 “조선인도 하나의 민족이다. 그들은 그들의 특수한 말을 갖고 있다.

오랫동안 그들의 독립의 역사를 갖고 있다. 충심에서 일본의 속국인 것을 기뻐하는 조선인은 아마도 한 명도 없을 것이다”라고 이해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상기의 요시다와 완전히 다른 입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재임 기간 중에 그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상당한 의욕을 가졌다. 1959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였으며 ‘일·중·미·소 평화동맹’을 주창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시바시의 아시아와의 평화공존 사상은 일본의 적극적인 자주외교를 주창한 것으로서 냉전구조 하에서는 좌절되었지만 1990년대 중반에는 냉전후 시대의 사상으로서 각광을 받은 바 있다.

일본 민족주의 우익세력의 세 원류 가운데 전형적인 보수우익을 대변하는 인물이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총리(57. 2. 25∼60. 7. 19)이다.

기시 총리는 일본 전후 보수우익의 원류를 형성한 사람이다. 관료 출신인 기시는 전쟁 이전 만주국 산업부 차장으로서 사실상 만주국의 최고권력을 행사하였다.
일본 전시 총동원체제를 이끌어간 장본인으로서 전후(前後) A급 전범용의자로서 수감되었다. 그러나 국제적 냉전체제가 구축되어 1948년의 극동군사재판(도쿄 전범재판)에서 석방(그러나 정치추방명령 받음)된 후 1952년에 추방해제에 따라 정계에 복귀하였다.

기시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냉전논리에 따라 친미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요시다의 친미를 비판하고 ‘자주헌법, 재무장, 강력한 정치’를 주창하면서 총리 시절 미일안보조약을 대등한 쌍무협정으로 개정하는 데 주력하여 성사시켰으며 동남아시아 각국과의 배상문제를 타결지었다.

그러나 기시는 친대만파(강경한 반공노선 추구)로서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하지 않았다.

반면 한국에 대해서는 반공전선의 최전선으로서 중시하여 이승만 정부와 관계개선에 노력하기도 하였다.

기시의 보수우익 노선은 자민당 내에 우파세력으로 자리잡았으며 후쿠다(福田赳夫), 아베(安培), 미츠카(三塚)로 이어지고 현재의 모리(森喜郞)파로 되어 있다. 현재의 고이즈미 총리는 이 세력에 속해 있다. 일본 민족주의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세력이 정권의 핵심에 있는 셈이다.


미일동맹과 민족주의 결합 추구하는 고이즈미


고이즈미 총리는 미국이 하라는 대로만 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으나, 필자가 보기에 그는 미일동맹의 강화와 민족주의를 결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미국의 일본 안보에 대한 정책이 변화된 데에 기인한다. 즉, 미국은 1990년대 이후 일본을 억제하는 정책보다는 미국의 대리인으로서 안전보장의 전선에서 공동협력을 강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고이즈미 정권은 냉전이 소멸된 국제질서에서 북(조선)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 전후시대를 종결짓는다는 정치적 의식이 있어 이를 해결함으로써 아시아에서의 정치적 지도역할을 추구함과 동시에, 미국과의 안전보장 협력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좇는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또한 일본이 아시아에서 평화유지의 중심적 역할을 하길 바라는 미국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중국에 대응하는 새로운 미일안보협력체제를 구축함과 함께 군사력을 증강하고 자위대를 정식 군대화하려는 전후 일관된 보수정책을 구체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전후 수면 하에 가라앉은 일본의 ‘아시아주의’가 구미열강에 대항한다는 측면이 희석되고, 미국의 하수인이 아닌 동반자로서 아시아의 리더, 나아가 국제사회의 리더(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가 되려는 것으로서, 국익 우선의 ‘아시아협력주의’로 탈바꿈하고 있다.  

2004년 12월 10일에 고이즈미 정권이 확정한 ‘신방위계획대강’에서는 안보위협요인으로서 기존의 북과 함께 최근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을 새로 포함시키고, 안보위협을 예방하기 위해 미사일방어(MD)체제를 미국과 함께 본격적으로 구축하면서 무기를 미국과 공동개발하고(무기수출3원칙 완화), 자위대의 해외활동을 본래 임무로 확정하며, 재래식 무기체계를 현대식으로 개편(장거리 공격 및 수송용 장비 도입)하는 등 방위산업 발전과 군사력 강화 계획을 분명히 하였다.

고이즈미 총리의 미일동맹 중심의 안보정치가 본격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안보정치는 일본 경제가 불황에 빠져 있을수록 그 강도가 더해질 것인데, 이는 앞에서 살펴본 1930년대 이후 일본의 천황군국주의의 경로를 보아도 유추할 수 있다.

일본 사회의 냉소문화, 경기부진, 안보위협의 점증 등은 일본이 안보정치로 가는 길을 더 재촉하고 있다. 고이즈미 정권은 미일동맹과 민족주의의 결합을 통해 일본 정치를 재구성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아시아의 안보를 일본과 나누어 가지려는 미국의 입장은 부시의 제2기 정부에 들어 더욱 강화될 것이다. ‘집단적 자위권’ 문제는 이미 미일동맹 강화문제에서 항상 듣는 키워드가 되어 버렸다. 이는 일본이 직접 침략을 받지 않더라고 미군이 공격받을 때 일본군이 미군을 무력으로 지원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미국의 2기 부시 정부는 일본에 대해 미일동맹을 NATO와 같은 수준으로 질적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키워드는 ‘버든 셰어링(공헌분담)’ ‘파워 셰어링(힘의 분담)’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의 헌법개정이 필요하고 자위대를 국군으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법 체계가 일단락된 주변사태법에 따라 미국은 일본과 공동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미국은 최근 동아시아 각국과 지금까지 추진해온 2국간 군사연습을 다국간연습으로 통합하고 더 나아가 이들 각국과 긴급사태에 대응하는 다국간 합동부대의 편성을 추진하고 동아시아에서의 미군을 전면적으로 재배치하여 일본의 역할을 강화하려는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

아직 일본 정치권내에서 이에 대한 의견이 통일되어 있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집단적 자위권’을 확보하기 위한 헌법개정 논의는 올해 일본의 정치권을 달굴 뜨거운 이슈가 될 것이다.


동북아 국가들이 일본 견인할 때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역사는 대략 40년 주기로 성장과 몰락, 재성장이라는 파동을 그린 것으로 볼 때, 1990년대 이후 특히 2001년 9·11 이후 일본 사회는 혹시 다시 몰락하는 길을 걷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된다.

1910년대 이후 45년까지의 일본의 몰락 과정은 급속한 군사적 팽창과 민족주의, 아시아주의의 발흥, 그리고 전쟁에서의 패배였다. 

지금 일본에서는 다시 안전보장 우선론, 민족주의의 재발흥이라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안보위협에 따른 헌법 개정에 국민들의 반대가 수그러들었으며 미국이라는 패권국가가 분명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국 평화주의는 의미 없음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비록 1980년대까지의 전후 약 40년 간은 경제부흥(경제 내셔널리즘)이라는 한 길에 국가정책이 모두 맞추어지고 일본 사회는 전쟁 혐오와 평화헌법을 배경으로 민주주의와 국제협조, 합리주의와 개인주의가 비로소 성립되는 한편 경제적 강대국으로 재부상하는데 성공하였지만, 1990년대 이후는 냉전붕괴를 안보강화로 연계하는 정책에서 미국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 정책이 일본의 재몰락을 향한 길이 될지 우려된다.

미일동맹이 일본의 민족주의를 한 켠으로 밀어놓는 역할도 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로서는 미일동맹 강화도 국익이요, 민족주의도 국익인 면에서는 동전의 양면이다. 아세안 국가들과의 자유무역협정 체결 논의 등은 일본 정부로서 동아시아의 리더라는 역할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한 중요한 고리가 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를 볼 때 올해는 전후 60년이라고 해서 동북아시아에서 주요 과제인 북일관계 개선이 급속히 진행될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북과의 관계를 놓고 보면, 일본은 북과의 국교정상화를 추구하기는 하지만 북의 긴장유발 가능성을 기본 전제로 두고 정책을 설정하고 있다.

현재 일본인 납치문제는 북에 대한 불신, 일본의 안보위협을 국민들에게 선전하고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데 좋은 빌미가 되고 있다. 일본 민족주의를 전제로 한 북일관계 개선은 결국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국익이다.

여기에 걸맞지 않으면 미국과의 동맹 강화로 얻는 국익을 선택한다. 일본 정부는 2004년 초 북에 대한 경제제재를 상정하여 ‘외환개정법’과 ‘특별선박입항금지법’을 제정했다. 유엔 결의 없이 단독으로 북에 대해 송금, 자산동결, 수출입 규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의 안보정치는 이제 한국이나 중국, 북(조선)에 사과하지 않는 정치가 되었다. 앞으로 더욱 위험하다.


일본의 민족주의는 미일동맹의 힘을 받아 재충전되고 있다. 그래서 더 위험한 것이다. 일본의 민족주의를 견제하고 일본과 미래지향적인 협력을 추구할 국가는 현실적으로는 한국과 중국이다. 장래에는 북(조선)도 해당된다.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을 견인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일본의 민족주의가 패권적 식민지주의적 성격이 아닌 열린 민족주의로 변화하기 위해서 반식민주의적 민족주의의 역사를 가진 나라들이 힘을 내야 한다. 일본이 주도하는 ‘아시아협력주의’가 아니라 동아시아국가들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아시아지역협력에 일본을 참여시키는 형태로, 특정 국가의 패권을 지양한 지역 공동이익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21세기의 한국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넘어서 일본을 견인하고 평화를 위해 협력하는 동반자로 만들어야할 책임이 있다. 주변국으로부터의 비판을 안보위협으로 받아들이는 일본의 안보정치를 지역협력 우선의 정치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의 안전보장보다는 ‘민중의 안전보장(people’s security)’을 중심으로 한 시민 수준의 한일간 협력과 견인이 절실히 요망된다.

 

2005년 01월 01일 (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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