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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의 탈을 쓴 폭력조직

우익의 탈을 쓴 폭력조직


지난해 5월 30일 밤 일본 지바(千葉)현 기사라즈(木更津)시에 있는 한 초밥집. 도검상(刀劍商)인 무라가미 이치로(村上一郞-55)는 신문을 펴들고 흥분했다. 도쿄(東京)도 스기나미(衫竝)구에 위치한 아레프 시설에 총탄 1발이 날아들었다는 기사가 실린 것이었다.  아레프는 1995년 도쿄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뿌려 일본 열도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옴진리교의 새 명칭이다. 아레프에 대한 협박은 무라가미가 결성한 우익단체 건국의용군의 첫 '거사'였다.

건국의용군은 이후 조선정벌대라는 이름으로 야당 사민당에 협박 편지를 보냈고, 재일 북한계 동포들이 운영하는 금융기관 건물에 발포하기도 했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에 대한 항의였다. 지난해 9월에는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외무성 심의관 집에 사제 폭발물을 설치했다. 대북 비둘기파라는 것이 이유였다. 무라가미는 경찰에 체포된 뒤 "아버지는 전쟁 때 제로센(일본 전투기)를 탔고, 전후에는 자위대원이었다. 당당하고 자랑스런 일본을 만들어 아버지와 영령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고 주장했다. 건국의용군의 회원은 7명. 회원 중에는 치과의사와 도쿄시내에서 미장원 4곳을 운영하는 경영자도 있었다. 당시 일본 사회는 보통사람들 속에 깊숙이 파고든 우익들의 사고와 행동에 새삼 놀람을 표시했다.

이념의 뿌리는 천황 중심 국수주의
일본 경찰청 공안자료에는 우익단체 규모에 대해 850여 곳, 12만여 명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중 일상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단체는 50여 곳, 2만여 명 정도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우익단체나 인원의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한다. 단체간 이합집산이 심한 데다 분파도 수시로 이뤄지고, 같은 인물이 복수의 단체에 중복가입하거나 단체에 소속된 인물이 혼자서 별도의 단체명으로 행동하는 등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 이유다.

일본의 우익 역시 통상 좌익에 대칭되는 개념이다. 이념은 보수적, 체제옹호적, 국가주의적, 반공적이다. 그러나 다  른 나라의 우익에 없는 이념도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천황의 존재를 정점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우익들은 이를 '천황존숭'(天皇尊崇)이라고 표현한다. 이같은 천황중심사상은 일본 우익의 역사와도 무관치 않다.

일본 우익의 뿌리는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이지유신은 일본에서 도쿠가와(德川) 막부 체제가 무너지고 서구식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 국가를 이루려는 시기였다. 근대화 세력들은 막부 대신 천황을 국가의 정점으로 옹립했다. 이른바 존황주의(尊皇主義)다.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유신파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은 한결같은 '존황지사'였다.

이같은 존황주의는 일본의 근대화 정책과 맞물리면서 자연스럽게 우익운동으로 번져나갔다. 우익단체의 실질적인 원조는 1881년 도야마 미쓰루(頭山滿)가 세운 현양사(玄洋社)다. 현양사는 '일본은 아세아 민족 흥륭(興隆)의 지도자임을 자처한다'는 문구를 강령의 맨 윗자리에 내걸고 천황중심주의, 국수주의를 내세웠다.

현양사는 이후 흑룡회(黑龍會), 낭인회(浪人會), 대일본생산당(大日本生産堂), 대동숙(大東塾) 등 수많은 단체로 파생됐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 때 일본에서 건너온 낭인들은 한결같이 이곳 출신들이었다.

테러를 위한 합숙훈련까지 실시
이들은 한반도뿐 아니라 신해혁명, 만주사변 등 중국 근대사의 이면 공작에도 개입,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 첨병 역할을 했다. 일본 내부적으로도 1910년대 후반 좌파운동이 본격화되자 정계는 물론 군부, 재계와 손잡고 반사회주의, 반노동자운동을 전개하면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했다. 1918년에는 흑룡회는 〈아사히신문〉이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내각 비판 기사를 게재했다며 〈아사히신문〉 사장을 납치해 공원 가로등에 매어다는 테러를 저질렀고, 1930년에는 애국사 단원이 당시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총리를 저격하기도 했다.

이들 우익은 전후 맥아더 군정의 해체 명령 등으로 일시 활동이 중지됐으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반공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재결집한다. 특히 60년대 일본의 안보투쟁이 격화되면서 일본 정치권이 정권 유지 차원에서 우익을 활용하면서 목소리가 커졌다.

당시 우익의 힘은 최대 거물이었던 고다마 요시오(兒玉譽士夫-84년 사망)의 실력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1911년생인 고다마는 18세 때 우익단체인 건국회에 들어간 뒤 군부를 배경으로 군납을 독점한 데 이어 상하이에 '고다마 기관'이라는 첩보망을 만들어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패전 뒤 A급 전범으로 분류돼 한때 옥살이도 했던 그는 석방 뒤 과거 축적해뒀던 힘과 부를 바탕으로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내각을 탄생시키면서 막후 실력자로 등장, 일본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75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를 낙마시킨 록히트 사건 때는 일본측 에이전트로 암약하기도 했다.

70년대 이후 일본 우익들의 지향점도 조금씩 바뀐다. 친미-반공 노선인 기존 우익노선에서 한 발 나아가 2차대전을 매듭지은 얄타회담과 포츠담선언 체제 타파를 외치고 있다. 이른바 신우익이다. 이들은 얄타회담으로 일본의 북방 영토가 소련으로 넘어갔고, 포츠담선언으로 반천황-반민족-반국가적 전후 상황이 전개됐다고 주장한다.

일본 우익들이 최근 들어 영토 문제나 과거사 문제, 개헌 문제, 히노마루(국기) 게양 및 기미가요(국가) 제창 등을 줄기차게 제기하고 있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입맞에 맞는 행위는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우익단체들은 88년 오쿠노 세이스케(奧野誠亮) 국토청 장관이 "과거 전쟁 때 일본은 침략의 의도가 없었으며, 침략전쟁을 한 것이 아니다"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뒤 사임하자 '당연한 발언' '용기있는 발언'이라고 추켜세우며 오쿠노를 경질한 다케시다 노부루(竹下登) 당시 총리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반면 입장이 다른 행위에 대해서는 결사항전 자세를 취한다. 천황국가제, 민족, 애국주의를 표방하는 우익단체에 공산당, 사회당, 일교조(일본교직원조합) 등은 '일본 적화를 꾀하는 혁명집단'이다. 때문에 우익은 이들 단체의 집회나 행사 등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적극적인 반대행동을 벌인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활동이 더욱 과격해지고 있다. 89년에는 쇼와 천황에 전쟁 책임이 있다고 발언한 모토지마 히토시(本島) 나가사키 시장이 피격됐고 92년에는 북한을 방문했던 가네마루 신(金丸信) 자민당 부총재에게 권총 3발을 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들의 이같은 과격함은 '1인1살(一人一殺)'이라는 표현으로 압축된다. '한 사람이 반드시 한 명을 맡는다'는 의미다. 이들은 실제 테러를 위해 합숙훈련도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합숙훈련은 종교적 계율을 연상케 한다. 오전 6시 기상, 오후 10시 취침. 오전 중에는 무술훈련과 좌선, 오후에는 농장 등에서 작업, 저녁식사 뒤에는 일본 역사나 우익 역사, 사상 공부에 집중한다. 특히 절도를 중시해 계율에 어긋날 경우에는 선임자가 죽도로 어깨를 내려치기도 한다. 합숙 중에는 술은 물론 여자도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활동자금 기업들 협박 받아내
우익단체의 활동자금은 상당 부분 기업에 의존한다. 단체별로 차이는 있지만 우익단체들이 지방자치단체에 제출하는 정치자금 수지 보고서에는 수입란의 40% 정도가 기부금이나 찬조금이다. 이어 자체 사업 수입이 20~30%, 각 단체가 규약으로 정해놓은 단비(團費) 등이 10~20% 정도다. 자체 사업 역시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기관지 등의 광고료나 구독료 등이어서 전체의 70% 정도를 기업들로부터 받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무늬만 우익'인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로 1980년대에 들어 일본 정부가 폭력배 단속과 상법 개정에 의한 총회꾼 주총 참석 금지 조치를 내린 이후 이들이 우익단체로 위장한 경우가 크게 늘었다. 경찰당국은 아예 우익단체의 80% 정도가 실질적으로 폭력조직일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신야쿠자' 혹은 '특수우익'으로 불리는 이들은 기업들의 불법행위 등을 포착한 뒤 사무실로 찾아가 협박하는 등의 수법을 통해 돈을 갈취하고 있다.

문제는 일본 사회의 우익을 대하는 분위기가 최근 들어 전례없이 좋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건국의용군이 다나카 심의관 집에 폭발물을 설치했을 당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는 "폭탄 설치는 당연한 일 아니냐"며 거들기도 했다. 즉각 테러 조장이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도쿄도에 접수된 도민의 목소리 중 절반 이상이 지사 발언에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시사평론가인 시노다 히로유키는 당시 이시하라 지사의 발언과 관련해 "우익단체의 대북 협박과 이를 당연시하는 지사도 문제지만 더 우려되는 것은 이를 허용하는 사회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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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시도카이 인터뷰
"기회 되면 또 찾을 것"

5월 6일 일본 오기(隱岐)제도에서 독도를 향하던 중 일본 순시선의 저지로 되돌아갔던 니혼시도카이(日本士道會) 회원들은 당당했다. 7일 낮 가가와현 다카마쓰시에 있는 니혼시도카이 본부에 전화를 했다. 홍보담당이라는 마사키가 수화기 저편에 나왔다. 성(姓)이면 되지 않느냐며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니혼시도카이는 일본 경찰청 공안조사자료의 우익 명부에도 올라 있는 단체다. 마사키에 따르면 24년 전인 1980년 설립됐다. 현재 회원은 17명. 전국 규모의 우익대회에는 자주 참가한다. 마사키는 "독도는 물론 중국과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이), 러시아와는 북방 영토로 마찰을 빚고 있다"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 일본 영토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에서 유명단체가 됐다.
"우리는 애국단체다. 한국에도 애국단체가 많지 않느냐."

이번에 독도로 향했던 사람들은 누군가.
"회장 마쓰시타를 비롯해 4명이다. 연령층은 20대에서 40대다."

독도에 가려했던 목적은.
"일본 국민들에게 다케시마(독도의 일본명)의 존재를 알리려 했다. 일본인 중 다케시마를 아는 사람은 10%도 안 된다. 독도는 일본 땅이다. 일본 정부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목적은 달성됐다고 보나.
"충분히 달성됐다. 오기제도에서 독도를 향해 13㎞나 항해한 것은 우리가 처음이다. 인터넷 등을 통해 한국 언론에도 많이 보도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 행동으로 한국인에게도 독도의 일본 이름이 다케시마라는 것을 알게 한 것만으로도 성과로 보고 있다."

독도계획은 언제부터 추진했나.
"6개월쯤 됐다. 모임에서 독도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다. 일본 땅인 독도를 이승만 정권이 빼앗아간 것이다."

또 갈 것인가.
"현재로서는 계획은 없다. 다만 기회가 오면 게릴라식으로 다시 독도를 찾을 것이다."

도쿄/박용채 특파원 pyc@kyunghyang.com
 2004.5.20. 뉴스메이커 5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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