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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6월 20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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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는 조선땅 중국지도 공개



 

1887년 ‘국경회담’ 때 한·중 대표가 직접 작성… ‘백두산정계비~송화강이 국경’ 확인
 
▲ 2차 감계회담 당사자였던 한·중 대표가 직접 제작한 지도. 국경을 표시하는 석퇴·토퇴의 위치를 밝힘으로써 당시 국경이 백두산 정계비~송화강으로 연결되는 선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창원대 총장을 역임한 원로 정치학자 노계현(盧啓鉉·72) 박사는 지도를 공개하면서 “이 지도는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면서 설정된 한·중 국경을 2차 감계회담 당사자들이 다시 한번 확인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국 길림문화출판사가 1993년 11월 발간한 ‘중조변계사’(中朝邊界史; 楊昭全·孫玉梅 著)에도 수록돼 있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李相泰) 사료조사실장은 이 지도에 대해 “2차 감계회담을 가진 한·중 양국 대표들은 함께 국경선을 답사한 뒤 두 장의 지도를 그려 각각 보관했다”며 “이 지도는 그 두 장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 실장은 “이는 두 나라 외교사절이 작성한 공문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평가한 뒤 “이것은 당시 한·중 양국이 국경으로 정했던 토문강이 두만강과 다른 ‘별개의 강’임을 증명해주는 것으로, 아직까지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료”라고 말했다.

영토 문제를 연구하는 인천대학 노영돈(盧永暾ㆍ국제법)교수는 “이 지도는 한·중 간에 설정된 국경이 백두산 정계비~송화강으로 이어지는 선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줬다”며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른 강임을 보여준 1909년 총독부 지도(2004년 9월 9일 조선일보 1면)와 함께 간도가 조선땅이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 그는 “1887년의 감계회담 이후 한·중 양국간 국경 문제가 공식 논의된 바 없기 때문에, 향후 간도를 둘러싼 영토 논의는 1712년 설정된 정계비~송화강 라인을 바탕으로 재정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측이 ‘중한감계지도(中韓勘界地圖)’라 이름붙인 이 지도에는 ‘1887년 중조 제2차 감계지도(中朝第二次勘界地圖)’란 부제가 붙어있다. 왼쪽 위편엔 광서십삼년오월이십육일(光緖拾參年伍月貳拾陸日)이란 제작 날짜가 기록돼 있다. ‘광서(光緖)’란 청나라 덕종(德宗)의 연호로, 광서13년은 1887년을 뜻한다. 날짜 밑에는 중국 감계관 팡랑·더위·친잉의 이름과 함께, 조선 감계사 이중하·위원 팽한주의 이름이 병기돼 있다. 지도 중앙 밑부분엔 ‘매촌이리(每寸二里), 매방사십리(每方四十里)’란 축척이 방위와 함께 표시돼 있다.

 
 
토문=두만강” 중국 측 주장 뒤엎어

간도는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대황(大荒)’이라고까지 불렸던 황무지다. 한·중 양국 모두로부터 외면당해 수백 년간 국경조차 명확히 설정돼 있지 않았던 이 땅에 ‘영토논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여진족이 대륙을 장악하면서부터다.

두만강 북쪽, 지금의 만주 일대에서 발원해 중국 대륙을 점령한 여진족은 자신들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부족 발원지 ‘부쿠리산’이 백두산이라 믿고 있었다. 1616년 만주에 청(淸)을 세운 그들은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며 신성시, 이민족인 한족(漢族)이 성지(聖地)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막는 이른바 ‘봉금정책(封禁政策)’을 폈다.

하지만 간도를 조선땅으로 여겨왔던 한인(韓人)의 유입은 계속됐고, 그 결과 농지 등과 관련된 분쟁이 빈발했다. 청의 강희제는 국경을 명확히 설정, 한인의 유입을 막고 ‘성지’ 백두산을 완전히 차지하려는 의도로, 1712년(숙종 38년) 5월 ‘오라총관’(오라·烏刺=만주) 무커덩(穆克登)을 파견해 조선과의 국경을 명확히 설정하라고 명했다. 조선은 참판 박권을 접반사(接伴使)로 임명해 일을 처리하게 했다.

하지만 무커덩은 “100리가 넘는 산길을 노인이 가기 어렵다”며 박권을 따돌린 채, 군관 이의복 등 조선의 하급관리만을 동행해 일방적으로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워 국경을 정했다. 이때 새겨진 비문이 유명한 ‘서쪽은 압록, 동쪽은 토문에 이르러(西爲鴨綠 東爲土門), 분수령상의 돌에 이를 새겨 기록한다(分水嶺上 勒石爲記)’는 것이다.

문제는 토문강의 흐름이 애매하다는 것이었다. 이 강은 일정 유역 물이 흐르다 땅 속으로 들어가 물길이 끊어지고, 또 다시 얼마 후 물길이 나타나 땅 위로 흐르기를 반복하는 복류천이었다. 따라서 중국 측 대표였던 무커덩은 “두 나라의 백성이 국경을 명확히 알도록 하기 위해, 혹은 나무 혹은 흙 혹은 멀고 가까운 형편에 따라 표를 세우고, 조선에서 (청에) 동지사를 보낼 때 공사의 진척 상황을 보고하라”고 말했다. 이에 조선은 목책(木柵)과 석돈(石墩=석퇴)·토퇴(土堆) 등을 쌓아 국경을 정하게 된다.(숙종실록 권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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