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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도 지역도 우리 땅이었다

서간도 지역도 우리 땅이었다

 
"고구려 국내성이 있던 집안현 일대가 구한말까지 우리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돼 있었다."

광무 6년(1902년, 고종 39년) 조사된 변계호적안(邊界戶籍案)을 보면 중앙 정부의 힘이 어떻게 서간도에 미치고 있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변계호적안이 작성된 지역은 모아산면-간도면-신별면 등의 8개 면으로 당시 이 지역에 정착한 이주민의 본래 고향과 연령분포가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호적안에 나오는 지명을 당시 중국 명칭과 대조해서 지도에 표시를 해보면, 조사가 이뤄진 지역이 한반도가 아니라 서간도 일대임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표시한 국경선은 청나라 강희제가 프랑스 측량전문가인 레지에게 지시해 만든 지도의 이른바 '레지선'과 거의 일치한다. 서간도가 조선의 땅임을 청나라도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 변계호적안의 작성자는 '관리변민사무 서상무'이다. 서상무는 1897년 서변계관리사로 임명돼 서간도 일대에 파견되기도 했다. 원본을 소장하고 있는 서울대 규장각은 이 호적안이 궁내부의 관할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정부가 서간도 문제에 적극 개입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에는 1902년 (정부에서 서간도) 관내에 향약을 설치하고 의정부 참찬 이용태를 향약장에, 서상무를 부향약장에 임명하여 사무를 관장케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서간도 지역의 주민을 관장하기 위한 관리를 중앙에서 직접 파견함으로써 실제 '통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레지선과 거의 일치 '주목'
서간도를 우리 영토로 인식하고 있다는 실마리는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사 지역의 단위가 우리나라 고유의 행정구역인 '면(面)'으로 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서울대 국제대학원 최장근 박사는 "보통 중국은 '현(縣)'이란 고유의 행정구역을 사용하는데 이를 면으로 표기한 것은 이 지역이 우리나라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평가했다. 청나라의 주장과 관계없이 우리나라의 영토가 서간도에까지 이르고 있었음은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번계호적안의 영인본을 출간한 양태진 박사도 서문에서 이 책을 "무엇보다 국제법상 영유권 분쟁에 있어 매우 의미있는 사료"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변계호적안은 일부만 발견됐기 때문에 서간도 전체의 상황을 가늠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보다 1년 후인 1903년 5월, 유지시찰단으로 압록강 대안지역을 조사한 양지달과 김상흡 등이 남긴 호적조사의 기록을 보면 서간  도 일대의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서간도 지역에는 모두 32개의 면이 편제돼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가운데 고구려 국내성이 있던 집안현 일대에는 대황면-구룡면-신상면 등 모두 7개의 면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고구려의 옛 영토와 역사적으로 멀어진 것이 불과 100년도 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이다.

우리 고유 명칭 '면(面)'으로 표기
그럼에도 서간도 지역이 영토분쟁에 있어서 거론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천대학교 노영돈 교수(국제법)는 "서간도를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려면 우선 백두산 정계비와 그에 따른 국경획정의 효력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질 당시의 정황을 보면 합법적인 국제협약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국제협약은 양 당사국의 완전 합의를 통해 성립되는데, 청나라가 정계비의 위치와 비문의 내용을 임의로 정한 점 등은 합의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설명이다. 이후에도 서간도가 우리의 실질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점도 당시의 국경인식이 정계비의 효력 자체를 부정하는 증거라는 것이다.

간도 연구가 이일걸 박사는 "강희제의 명을 받아 레지가 지도를 완성한 것은 1718년으로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이후의 일이지만, 실제 만주지역의 측량을 하던 때는 1708년 무렵이다.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때 의도적으로 서간도 지역을 배제하기 위한 모종의 작업을 했을 정황은 충분하다"며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백두산 정계비를 통한 국경선 획정 때 의도적으로 서간도를 빼기 위한 사전작업이 미리 진행됐을 수도 있다는 해석이다.

청은 1677년 강희제의 명을 받은 무묵눌이 백두산을 답사한 것을 비롯해 1684년과 1710년 등 모두 세차례 백두산 일대를 탐사하려고 시도했다. 이런 움직임들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서간도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었다. 대한제국이 백두산 정계비를 국경 획정의 유일한 근거로 여겼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1909년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간도협약이 맺어지면서 서간도에 대한 대한제국의 영향력도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유병탁 기자 lum35@kyunghyang.com  2004.3.18. 뉴스메이커 5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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