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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6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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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이야기

이원규 교수의 간도 이야기-3 


일반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명동은 민족적 긍지를 가장 자랑스럽게 안고 있는 마을이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간도땅 삼합(三合)에 이른다. 멀리 코끼리 등모양의 오랑캐령 구릉이 보인다. 그것을 넘으면 육도하라는 작은 강을 따라 걷게 된다. 이 강을 따라 계속 가다보면 명동과 용정이 나온다. 옛날에 유민이나 망명가들은 점심을 명동에서 얻어먹고 저녁 무렵 용정에 도착했다. 지금 이 길은 탈북자들의 중요한 이동 루트가 되어 있다.

1899년 함경북도 회령과 종성에 살던 유학자 김약연-김하규-문치정 등은 이곳으로 옮겨와 황무지를 개척했다. 그들은 땅을 일궈 탐관오리가 없는  신천지를 만들고 조국을 구할 인재를 키우자는 큰뜻을 품었다. 횃불을 켜고 육도하 물을 끌어들여 논을 일구었다. 첫 추수가 시작되자 1할씩 떼어 학교설립기금을 모았다. 1907년 용정의 서전서숙이 문을 닫은 후 그들은 1908년 명동학교를 세우고 다음해는 중학교, 그 다음해는 여학교를 세웠다. 북간도 동포들은 자식들을 이곳으로 보냈고 졸업생과 재학생은 기미년 만세시위와 청산리전투 등 항일전쟁에 앞다투어 몸을 던졌다.

명동의 성장과 발전에는 김약연의 역할이 가장 컸다. 완고한 유학자였던 그는 신문물과 신사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정재면-황의돈-장지영 등 실력이 우수하고 민족정신이 강한 젊은 교사들을 초빙했  다. 그리하여 명동을 민족정기의 성지로 만들어갔다. 그는 항일시인 윤동주의 외숙이기도 하다. 그의 묘지가 명동 옆마을 장재촌(長財村) 뒷산 풀밭에 있다.

항일투쟁사 자취 뚜렷이 남아
명동학교 터는 지금 담배밭으로 변했다. 명동교회는 역사 전시실을 겸하고 있는데 예배도 보고 있다. 교회 바로 아래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명동 출신으로 영화계의 선구자 나운규도 있다. 명동교회 전시실에 그의 사진 몇 장이 남아 있다. 그밖에 문익환 목사도 있다. 그는 명동을 세운 세 사람의 선각자 중 하나인 문치정의 손자다.

명동에는 안중근의 숨결도 남아 있다. 1908년 러시아 연해주 독립군부대를 이끌고 국내진공을 감행해 회령에서 참패한 후 안중근은 이곳에 홀로 찾아와 명동 뒷산에서 절치부심하며 권총 사격 연습을 했다. 그리고 다음해 10월 하얼빈에서 이토오 히로부미를 명중시켰다.

명동에서 용정을 향하여 가다보면 거대한 바위가 일어선 듯한 선바위(立岩)가 있고 근처에 동랑고개가 있다. 1919년 11월 명동학교 출신 윤준희-임국정-최봉설 등은 일제가 거금을 용정 영사관으로 호송한다는 정보를 듣고 매복했다. 호송대를 사살한 그들은 일본돈 15만원이 담긴 자루를 메고 북국의 설원을 걸어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러나 기밀이 누설되어 최봉설을 제외하고 체포돼 총살당했다. 당시 일본군은 러시아 백위군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출병해 있었고 결국 15만원은 다시 일본군에 돌아갔다. 이때 독립군은 입대 희망자가 10만 명이 넘었으나 무기가 없어 받지 못했다. 마침 백위군을 도우려고 연해주에 출병한 체코 군대가 돌아갈 여비가 부족해 헐값에 총을 팔고 있었으므로 그 돈이면 소총 5,000정은 살 수 있었다. 그것이 홍범도나 김좌진에게 갔다면 독립전쟁의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2004.2.19. 뉴스메이커 5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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