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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쟁의 본거지, 간도

항일투쟁의 본거지, 간도

용정 해란강의 용두레 우물 지명기원비에서 출발해 용정역으로 가려면 옛 천주교회 터를 지나게 된다. 이곳에서 기미년(1919년)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용정 주민은 99%가 조선인이었고, 나머지는 중국인 행상이나 영사관을 따라 들어온 일본인 관리-상인들이었다.

기미독립선언서가 북간도로 들어온 것은 3월 8일이었다. 용정의 지도자들은 수백 장을 인쇄해 돌리고 3월 13일 정오에 천주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거사할 것임을 알렸다. 정보를 입수한 간도 주재 일본총영사는 장작림 군벌에 사전진압을 요구했고 군벌사령관은 조선인 지도자들을 불러 엄중 경고하였다.

군대가 길목과 다릿목을 차단했으나 산벼랑을 타고 강을 건너 쏟아져 들어오는 군중을 막을 수는 없었다. 군중을 이  끄는 것은 명동촌의 명동학교 학생들이었다. 골목골목 메운 군중은 숨죽이고 기다렸다. 그러나 천주교회를 군벌군대가 포위해 지키니 종을 울릴 수가 없었다.

화룡현의 동성이란 마을에서 온 임민호라는 열 살 먹은 민첩하고 영리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어른들 모르게 우마차에 숨어 용정으로 왔다. 그리고 우연히 시위를 주도하는 지도자들 곁에 갔다가 그들이 종을 울리지 못해 초조해하는 것을 알았다.

소년은 살금살금 종루로 올라가서 종을 울렸고, 그것을 신호로 군중은 일제히 뛰어나와 군경을 압도했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1만 명이 넘는 시위대는 홍수처럼 일본인 상가와 용정역을 휩쓸고 영사관으로 돌진했다. 군벌군대와 일본영사관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했고 희생된 사람은 17명. 그 뒤 만세시위는 간도땅 전체에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용정의 만세시위는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규모로서도 국내 어느 곳의 시위보다 많은 1만 명이었고, 북간도는 물론 만주땅에 사는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 항일투쟁에 뛰어들게 했다. 다음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등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는 밑거름이 됐다. 

다음해 청산리전투 승리 이끌어내
당시 천주교회 종탑에 올라가 종을 울렸던 임민호 소년은 그 뒤 훌륭한 교육을 받고 연변대학 학장이 됐으나 문화혁명 때 민족의식이 강하다는 것이 지목돼 숙청당해 죽었다.

용정의 만세시위에서 희생된 17명의 순국열사들은 용정에서 두만강 국경 삼합(三合)으로 가는 길의 왼쪽에 모셔져 있다. 이 묘지를 간도 동포들은 '3-13 반일열사릉'이라고 부르는데 비교적 잘 정리돼 있다.

필자는 수 년 전 한 방송사와 함께 이 묘지를 취재하다가 중국 공안에 의해 연행된 적이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집중 신문을 받았다. 간도땅이 한국인들의 항일투쟁의 본거지였다는 사실이 강조되는 것을 중국 정부가 싫어한다는 것을 이때 확인했다.

필자는 우리 선열들의 투쟁 자취가 있는 북만주와 중국의 상하이-난징-우한-시안 등 등 많은 곳을 여행했으나 아무도 취재를 막지 않았다. 유독 간도에서는 입국 목적을 '취재'라고 쓰면 비자를 내주지 않는다. 입국 목적을 '관광'이라고 쓰고 신문-방송팀에 섞여 취재하면 여지없이 연행해버렸다. 물론 그것은 고구려 유적이 있는 서간도의 집안시 부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뉴스메이커560호 200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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