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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5월 24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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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간도지킨 이중하

목숨 걸고 간도 지킨 이중하를 아십니까 


 

간도되찾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뉴스메이커]는 이중하 선생의 행적을 발굴했다. 두 장의 바랜 사진을 통해 100년 동안 잠들었던 그의 당당한 위풍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증손자인 규영(78)-규청(70)씨 형제는 집안에서 소중하게 간직해오던 이중하의 모습을 공개했다. 관복을 입고 앉은 이중하의 사진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젊  은 시절과 중년 시절에 찍은 것이다. 특히 젊은 시절의 사진은 당시 패기만만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규청씨는 "증조부가 외국 선교사들과 자주 교류했는데 이때 선교사가 증조부의 사진을 찍어준 것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한 일간신문 칼럼에서 '이미 나라의 지배 밖으로 떠난 유민들의 터전을 지켜주기 위하여 목을 내걸고 항쟁한' 이중하를 '의인'이라 평했다. 함경도 안변부사였던 이중하는 1885년 조정으로부터 감계사로 임명받았다. 조선과 청나라 간 국경선을 결정하는 을유감계담판(국경회담)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외교관이 된 것이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서울 용산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청은 조선에 대해 종주국임을 자처했다. 원세개가 가마를 타고 궁을 드나들고 선 채로 고종을 알현할 정도로 청의 위세는 대단했다고 한다.

박용옥 전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청나라 대표가 조선의 종주국 행사를 하며 아주 위협적으로 경계를 획정하려 하였으나 이중하는 국토 수호에 강한 의지를 내비치며 이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간도를 '분쟁 지역'으로 이끌어내
청나라는 간도땅에서 조선족 유민을 쫓아내려 했다. 조선족 유민은 청에 귀화하든지 두만강 이남으로 다시 돌아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압록강-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하려는 청의 압력에 맞서 이중하는 1712년 백두산정계비에 나타난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니라 북쪽으로 흘러가는 송화강의 지류임을 끝까지 주장했다. 

이중하는 청측 대표 덕옥-가원계-진영 등과 함께 직접 백두산정계비를 답사하면서 논란이 된 강의 원천을 조사했다. 이 답사로 청측은 자신들의 주장이 먹혀들어가지 않게 됐다. 결국 양국은 경계를 결정짓지 못했다.

1887년 정해감계담판에서 청측은 더욱 고압적인 자세로 나왔다. 이때에도 감계사로 임명받은 이중하는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로 청측의 요구를 묵살했다. 그는 양보를 하는 척하면서도 현명하게 대처, 협상을 결렬시켰다. 경인교육  대 강석화 교수(사학)는 "국가간의 국경회담에서 일단 영토에 관해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게 이중하의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고 평가하면서 "이분이 일부러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영토 문제에 관한 한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말했다. 타협점을 찾지 못한 이때의 회담 덕택으로 간도의 영토 문제가 아직도 '분쟁 지역'으로 유효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감계일기] 영유권 주장 소중한 자료
백두산정계비 답사를 통해 당시의 협상 내용과 정계비-토문강의 현장 기록을 세세하게 남겨놓은 것도 이중하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감계일기] [감계전말]은 간도 영유권 주장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감계일기]에서는 청측 대표와 함께 1885년 10월 거의 한 달 동안 겨울의 백두산을 답사하면서 고초를 겪은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10월 17일 30리를 가서 절파총수의 엽막에 도착하니 날이 저물어서 잤다. 이 막사는 지어진 것이 매우 열악하였고 또한 온돌도 없었다. 종일토록 눈과 싸워온 나머지 사람과 말이 모두 얼었는데도 노천에서 새벽을 기다렸다. 어렵게 하룻밤을 지냈다."

9월 말 함경도 회령을 출발, 무산을 거쳐 10월 18일 백두산정계비에 갔다가 다시 10월 27일 무산에 도착하는 여정이었다. "(청측 대표들이) 천천히 좇아오는 것이 마지 못해 하는 모습이어서 또한 가소로웠다"라는 일기에서 이중하의 대담한 기개가 드러나고 있다. 그는 또 답사 중에서도 몇 편의 시를 지어 왕명을 받고 백두산에 오른 심정을 담담히 서술했다.

취재팀은 이중하의 후손을 통해 백두산정계비 답사 당시의 생생한 일화를 발굴해냈다. 이 일화는 아들 이범세가 집필한 이중하의 행장에 실려 있다. 청의 가원계가 복통으로 신음하는 것을 보고 이중하는 미리 준비해둔 환약을 써보라고 주었다. 그러나 약을 먹은 후 복통이 더욱 심해지자 청측 대표는 자기를 죽이려고 독약을 준 것이라고 흉기로  이중하를 위협했다. 이때 이중하는 청측 대표 앞에서 남은 약을 입에 털어넣었다. 다음날 아침 복통이 가라앉자 청측 대표는 사과했다고 한다. 

토문감계사였던 당시 행적만 나와 있을 뿐 이중하의 모습은 이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1909년 일진회가 한-일합병을 주장하자, 민영소-김종한 등과 함께 국시유세단을 조직, 임시국민대연설회를 열고 한-일합병의 부당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간략하게 나타나 있다.

취재팀이 발굴해낸 이후 행적에서 그는 뒷모습조차 아름다운 의인이었다. 종1품 혹은 2품에게 주어지는 '규장각 제학'이라는 벼슬에 이르렀지만 그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자 아들과 함께 경기도 양평으로 낙향했다. 퇴직한 은사금으로 나라에서 3,000원을 주었다. 그러나 그 돈을 받지 않았다. 이후 그에게 합병기념 훈장까지 내려졌다.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반박문과 함께 돌려보냈다. 증손자인 이규청씨는 "나중에는 증조부가 눈이 멀어 총독부가 주는 후작 작위를 받지 못한다고 했더니 일제가 이를 시험하기 위해 눈에 송충이를 넣었다고 한다"며 "그때 증조부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부릅떴다"고 부친이 해준 이야기를 전했다.

한-일합방이 된 지 7년 후인 1917년 이중하는 나라를 잃은 분노를 잊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는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창대리 선산에 있다.

아들 이범세 역시 이중하의 뜻을 이은 올곧은 선비였다. 그는 이시영-이상설과 함께  '한양의 세 천재'로 불렸다. 이들과 함께 신학문을 배우며 교분을 두텁게 했다고 한다. 그는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지만 아버지인 이중하와 함께 한-일합방 후 낙향했다. 이후 서울에서 [시대일보] 사장을 맡으며 항일의 뜻을 펴려 했지만 신문은 곧 폐간되고 말았다. 그도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0년 별세, 부친인 이중하와 나란히 양평 창대리 선산에 묻혔다.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뉴스메이커 559호 2004.2.5.

 
"차라리 내 목을 쳐라, 그러나 국경선은 한 치도 결코 내놓을 수 없다."19세기 말 토문감계사 이중하는 두만강 국경선을 확정시켜 간도땅을 차지하려는 청나라의 강압적인 태도에 목숨을 걸고 맞섰다. 그러나 그는 일제식민지 시대의 암울한 역사를 거치면서 잊혀진 인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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