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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6월 19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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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영유권 문제에 관한 국가 기본입장의 재정립

김영구(金榮球: 한국해양대학교. 국제법)


<제목차례>

1. 한일(韓日)관계 전반적 발전의 맥락에서 본 독도문제의 실상(實狀)

(1) 최근의 한일관계 진전

(2) 독도(獨島)문제의 실상(實狀)

(3) 한국 정부(政府)의 대일(對日) 정책

가. 1996년의 대일(對日) 초강경(超强硬) 자세

나. 김영삼 대통령의 합리적 근거 없는 양보

다. 1997년 말 한국 정부의 대일(對日) 강경정책(强硬政策)

라. 1998년초 일본의 일방적 협약파기(協約破棄)와 한국의 대일(對日)강경정책(强硬政策)

마.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양보(讓步).

바. 한국 정부의 마지막 강경 입장

사. 한국 정부의 예상되는 양보(讓步)


2. 독도에 관한 국가 기본입장의 정리
(1) 영유권 확보와 주장에 관한 국제법상 기본적 원리
(2) 독도 영유권 문제에 있어서의 기본적 고려 사항
가. 독도 영유권 문제에 관한 국가기본 입장의 재정립
나. 실효적이고 평화적인 영역주권의 일관된 행사

독도 영유권 문제에 관한 국가 기본입장의 재정립


1. 한일(韓日)관계 전반적 발전의 맥락에서 본 독도문제의 실상(實狀)


(1) 최근의 한일관계 진전


한국과 일본이 공동 주최하는 2002년 World Cup Game 본선 첫 경기가 다음 달(5월) 말에 서울에서 열린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인접국(隣接國)일 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우호관계를 증진해 가고 있는 우방(友邦)이기도 하다.
특히 지금의 한국 대통령 김대중(金大中)씨가 집권한 이래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획기적으로 접근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는 남한과 북한과의 관계도 개선시킴으로서 지난 2000년 10월에는 「노벨 평화상」을 타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뿐만이 아니라 세계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나라에 속한다. 정치적인 의미에서는 물론이고, 적어도 근래(近來) 중요시되는 국가의 경제적 능력면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 두 나라가 서로 협력하여 자기들 나라의 국제적인 위상(位相)을 높이고 국제사회에 중요한 기여(寄與)를 해나가
는 것은 모두가 바라는 바일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두 나라가 공동으로 개최하고 있는 2002년 World Cup Game이 성공적으로 치루어 지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두 나라가 모두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으니 이 축구의 제전(祭典)이 잘 치루어 질 것으로 낙관(樂觀)한다. 이 화려한 축제(祝祭)를 계기로 두 나
라간의 관계가 실질적으로 진전되기를 나는 바란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작년 봄(2001년 3월)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에 이어서, 금년에도 지난 4월 10일 신문 보도에 의하면, 이번에 일본 문부성 검정을 통과한 6개 출판사의 역사교과서 내용이 문제되고 있다. 이번에는 작년 중학교 역사교과서 문
제보다 더욱 심각하여, 메에세이사(明成社)라는 출판사에서 제출한 일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최신 일본사(最新 日本史)』의 경우에는 종래(從來)에 언급되지 않았던 독도 영유권 문제를 특정적으로 거론하여 기술(記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서 한국인의 반일(反日) 감정을 촉발시키고 있다.


더욱 나쁜 것은, 지난 달(2002년 3월) 22일, 한국과 일본의 국가 정상(頂上:김대중-고이즈미)들이 서울에서 만나 양국 간의 협력에 관해 구체적인 합의를 하는 중에 역사왜곡방지를 위한 「역사공동연구기구」 설치에 합의하였고, 실무선(實務線)에서 역사교과서 검인정 내용을 한국 정부에 통보한 바가 있으나, 이때
에 독도 문제에 관한 내용만이 일본 정부에 의해 고의(故意)로 누락(漏落)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독도(獨島)에 관한 일본 정부의 진정한 저의(底意)는 무엇인가?

지난 달 22일 한일 양국 정상회담(頂上會談)은, 물론 자유무역지구(FTA) 설정을 위한 협정 등에 관한 협의가 같이 거론되기는 했으나, 주로 양국이 공동 주최하는 2002년 World Cup Game을 성공적으로 만들기 위한 양국 간의 긴밀한 협력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진, 말하자면 "월드 컵 정상회담"이었든 셈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사실상 한일 양국 간의 진정한 협력관계의 구축을 위해서 꼭 필요한 전제(前提) 즉, 역사인식에 관한 양국 간의 심각한 갈등을 해소해나가기 위한 문제들, 예컨대, 역사교과서 왜곡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을 위한 일본 정부의 의지(意志) 표명, 일본 수상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포기(抛棄)하겠다
는 확실한 약속(約束)과 같은 것들은 의도적으로 논의조차 회피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작년 10월 15일 고이즈미 일본 수상의 서울 방문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 고이즈미의 서울 방문 목적은 대규모 자위대를 아프칸에 파병(派兵)하는 일본의 이례적 행보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지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시아인들의 일본에 대한 집요한 경계심과 평화헌법(平和憲法)이
라는 법적인 장애를 무시하고 감행되는 일본의 해외 파병을 국제적으로 기정사실화(旣定事實化: fait accompli) 하기 위한 수순(隨順)으로 감행된, 일본의 중요한 정치적 행사에 불과하였다.


고이즈미 일본 수상은 작년 8월, 서울에 오기 바로 두 달 전에 총리 자격으로 야스꾸니 신사를 참배하였다. 그의 야스꾸니 신사참배는 그가 총리로 당선되기 위해서 일본 유권자들에게 내걸은 중요한 보수성향(保守性向)의 catch-phrase 였다. 당시 강력한 하시모토 파(派)에 대항하여 나선 2001년 총리 경선(競選)에
서, 전형적인 보수 파벌의 핵심(核心)답게 그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의 인정", "야스꾸니 신사의 총리자격 참배"를 공언(公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돌출된 보수(保守) 성향의 catch-phrase 가 일본 유권자들에게 공감(共感)을 얻어서, 그는 예상을 뒤엎고 총리 경선(競選)에서 당선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그의 공언(公言)을 실천한 것에 불과하다.


작년 정상회담과는 달리 이번 3월 회담에서는 역사인식 문제와 역사교과서 왜곡방지문제가 의제(議題)로서 논의되었던 만큼, 당연히 일본 총리의 신사 참배를 용인할 수 없다는 한국의 진지한 국가적 입장이 정확히 전달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당연하고 중요한 문제가 이번에도 되외시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바로 며칠 전 4월 21일 보란듯이 일본 총리 고이즈미는 다시 이 야스꾸니 신사를 참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스꾸니"(靖國)신사(神社) 란 어떤 곳인가?

"야스꾸니"(靖國)란, 말 그대로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즉 일본의 호국신사이자 황국신사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몰자(戰歿者)를 호국(護國)의 영령(英靈)으로 제사하고, 여기에 천황의 참배라는 특별한 대우를 해줌으로써 국민에게 천황숭배(天皇崇拜)와 군국주의(軍國主義)를 고무, 침투시키는 데
절대적인 구실을 하는 곳이다. 또 전몰자들은 천황을 위해 죽음으로써 생전의 잘잘못은 상관없이 신(神)이 되어, 국민의 예배를 받는다. 일본 도쿄 지요다 구[千代田區]에 있는 일본 최대의 신사(神社)인 이곳에는 태평양전쟁 전몰자 246만여 명의 위패(位牌)가 안치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동경국제군사재판소에서 A급 전범으로 판결을 받은 14명의 위패도 함께 안치되어 있다. 14명중 7명은 사형(死刑)을 당해서 죽었고, 7명은 무기형(無期刑)의 선고를 받아서 옥사(獄死)하였다. 동경국제군사재판소에서 2차 대전 A급 전범(戰犯)으로 형이 확정된 자들은 모두 25명이었다. 이들 중 7명은
교수형(絞首刑)을 당했으며, 무기형(無期刑)에 16명, 20년 금고형(禁錮刑)에 1명, 7년 금고형(禁錮刑)에 1명이 각기 형 집행을 당했다. 그러니까 이들 중에서 사형을 당했거나 옥사한 자들만이 "야스꾸니"(靖國)신사(神社)에 안치된 것이다.

소위 "A급 전범"의 죄명(罪名)은 "평화에 관한 죄"이다. 즉, 침략전쟁 또는 국제법을 위반한 전쟁을 계획·개시·수행하는 과정에서 범한 죄 또는 그 계획 ·모의에 참가한 죄이다. 이 침략전쟁(侵略戰爭)의 수괴(首魁)들을 일본 국민이 호국의 영령으로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일은 참으로 가증(可憎)스러운 일이지만, 천황(天皇)이 참배를 하던, 총리가 공식 자격으로 참배를 하던, 사실상 한국이 특별히 관여할 일은 아니다.

한국이 특별히 참을 수 없어 하는 이유는 이들 14위의 A급 전범 중에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 과정에서 한국의 민족적인 자존심을 정면으로 훼손시킨 장본인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말기 조선 총독으로 미나미 지로오(南次郞)와 고이소 쿠니아끼(小磯國昭)가 있다.

미나미 지로오(南次郞)는 한국에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단행한 악명 높은 총독(總督)이다. 그는 동경국제군사재판소에서 A급 전범으로 금고형(禁錮刑)을 받았으나 복역 중 발병(發病)하여 자택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이 신사(神社)에 안치되지 않았다.

고이소 쿠니아끼(小磯國昭)는 미나미 지로오(南次郞)의 후임 총독으로 1942년 5월부터 1944년 7월까지 재임하는 동안, 조선 반도에서의 완전 징병제를 강행하여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을 그들의 침략전쟁터에 내몰아 죽게 하였다. 또 그는 한국의 젊은 여인들을 종군 위안부(從軍 慰安婦)로 강제로 끌어내서 여성(女性) 인권(人權)을 유린하였으며 많은 한국의 남자들을 노동자로 징용하여 전쟁터로 내보냈다.

그는 A급 전범으로 무기형(無期刑)을 선고받아서 복역 중 옥사(獄死)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 신사(神社)에 안치된 것이다.

일본이 식민통치 기간 중에 한반도에서 한국민에게 자행한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파렴치한 행위들에 대해서 반성(反省)하고 사죄(謝罪)하기 위해서는 고이소 쿠니아끼(小磯國昭)와 같은 자를 호국의 영령으로 모시는 일 같은 것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일본 총리 고이즈미는 "야스꾸니 신사의 총리자격 배"를 공언(公言)하여 총리에 당선된 사람이며 작년 여름에 이 공언(公言)을 실천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한국민의 자존심을 새삼스럽게 정면에서 훼손한 사람이다.

한국 정부는 고이즈미의 서울 방문이 있기 직전까지 일본 총리의 신사 참배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거듭 천명하고, "역사 인식은 한일관계의 근간(根幹)에 해당하는 문제이므로 일본측의 성의(誠意)있는 조치가 없는 한 정상회담은 불가능하다."고 되풀이 해왔다. 어떤 정부의 고위 인사는, "일본은 이일을 두고두
고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까지 강경(强硬)하고 단정적(斷定的)인 언사를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작년 10월 서울 정상 회담은 그 준비 단계에서 중요 현안에 대한 양국의 입장 차이를 사전 조율하기 위한 외교체널의 통상적인 실무조정 조차 전혀 거치지 않은 체로 이례적(異例的)으로 강행(强行)되었다.

뿐만이 아니라, 염려하고 예상한 그대로 당시 정상회담에서 일본 고이즈미 총리는 역사교과서 왜곡과 그 자신의 야스꾸니 신사 참배 등으로 제기되어 있는 일본의 잘못된 과거사 인식에 대하여, 전진적으로 변화된 자세를 보장하는 성의(誠意)있는 약속을 하기는커녕, 재발 방지에 관한 모호한 언질(言質)조차 주지
않았다. 당시 중요한 외교현안(外交懸案)으로 제기되어 있던 남쿠릴 해역 꽁치 조업 문제에 관해서는 오히려 이것이 영토문제(領土問題)이며 일·러 간의 북방 4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한국의 꽁치조업 요구는 고려 될 수 없다는 일본의 입장을 이 정상회담을 통해서 공식 확인하였을 뿐이다.

더욱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고이즈미 총리의 한국 방문 직후, 한국 정부는 정상회담의 성과를 "긍정적(肯定的)인 것"(?)으로 보아, 한일 양국의 관계정상화의 기초가 잡힌 것이라고 평가(評價)하고 대일문화개방의 중단이나, 한일군사협력의 중지 등 일본에 대한 한국 측의 대응 보복조치들을 해제(解除)하였다는 사실
이다.

일본 총리의 방한(訪韓) 직전까지 과시(誇示)된 한국 정부의 대일(對日) 강경입장(强硬立場)을 상기해 볼 때, 이것은 참으로 일관성이 없는 반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정부는 역사인식(歷史認識)이야 수정되건 말건 일본과의 관계진전을 위한 전기(轉機)를 고이즈미 총리의 서울 방문(訪問)에서 찾아보려고 한 것이다.

결국 한국 정부에게 있어서, 대일(對日) 강경정책(强硬政策)이란 어디까지나 국민의 반일(反日) 감정을 무마하기 위한 일시적 방편(方便)이며, 정책적 일관성 및 국가적 의지(意志)나 진실된 정책목표(政策目標)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새롭게 다시 대두된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에 관해서도 한국 정부의 움직임에는 같은 태도를 엿볼 수 다. "World Cup Game을 앞두고 채택율 0.4%밖에 않되는 교과서 때문에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다..." 는 등 되도록 이번 일로 국민의 반일(反日) 감정이 촉발되지 않을 것을 바라는 강한 암시를 언론에 내비치는 언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어차피 보수(保守) 일변도(一邊倒)로 편향(偏向)하고 있는 지금의 일본 정부는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검인정 사건에 이어서 또 하나의 움직임을 보였다.

지난 4월 16일 각의(閣議)에서 『무력공격 사태 법안』 등 3개 법안 -소위 유사법제(有事法制) 관련 법안- 을 일본 국회에 제출키로 결의함으로서 일본이 군사대국(軍事大國)으로 국제사회에서 능동적으로 군사적 활동할 수 있는 실질적인 법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참으로 흥미 있는 것은, 과거의 전쟁 책임을 제대로 반성하거나 사죄한 일이 없는 일본이, 평화헌법을 사실상 사문화(死文化)하고, 2차 대전 이후 일본에게 가해져있던 가시적(可視的) 제한(制限)들을 하나씩 스스로 해제시키는 이러한 일본 정부의 확실한 움직임에 대해 일본 국내에서 상당히 강한 반대 여론이 일어나고 있는 것에 비해서 일본 군국주의(軍國主義) 침략의 직접적인 희생자였든 한국 정부나 한국 사회에서는 아무런 대응이나 반대 또는 우려(憂慮)의 표명조차 없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한국 국민과 한국 정부가 일본의 과거사 인식에 대한 것을 문제삼고 있는가? 또 문제삼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좀더 근본적으로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한국과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서로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고 존재할 수만 있다면, 일본 정부나 그 국민이 자기들의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 어떠한 인식(認識)을 갖고 있던 한국으로서 관여(關與)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국제사회는 필연적으로 국가와 국가 간의 접촉과 신뢰관계가 요구된다. 한국과 일본이 어떤 형태로건 국가 대 국가 또는 국민 대 국민간의 관계를 가져야만 한다면, 정당한 상호존중(相互尊重), 상호신뢰(相互信賴)의 관계가 성립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존중, 상호신뢰관계의 성립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올바른 과거사 인식을 기초로 해야하는 것이다.

한반도(韓半島)에 대해서 무력적(武力的) 침략(侵略)과 경제적 착취(搾取) 및 비인도적(非人道的) 잔학행위(殘虐行爲)를 저지른 지난 세기 일본제국(爪)의 만행(蠻行)은 현대 국가 일본에 의해서 그 침략성(侵略性), 잔인성(殘忍性), 및 그 비인도적 야만성(野蠻性)이 확인되고 그 범죄성(犯罪性)이 인정되어야 한
다.

또 그 범죄적 역사의 희생이 되었던 개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인접국의 국가적 자존심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을 위해서 적절한 조치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일본국가가 응분의 주도적 역할을 맡아야 한다.

제국주의 일본국가의 야만성의 확인, 범죄성의 인정, 희생자에 대한 일본의 국가적 차원의 정중한 사과가 없다면, 한국은 이런 국가와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계속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선 반도에서의 완전 징병제를 강행하여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을 그들의 침략전쟁터에 내몰아 죽게 하고, 한국의 젊은 여인들을 종군 위안부(從軍 慰安婦)로 강제로 끌어내서 여성(女性) 인권(人權)을 유린하였으며 많은 한국의 남자들을 노동자로 징용하여 전쟁터로 내보낸 장본인, 고이소 쿠니아끼(小磯國昭) 전 조선총독과 같은 자를 국가적 호국 영령으로 모시고 있는 야스꾸니 신사(神社)를일본의 총리가 공식 자격으로 참배(參拜)하는 것과 같은 행위는 일본이 한국과의 상호존중, 상호신뢰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거부(拒否)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국가나 국민은 가치지향적(價値指向的)인 존재이다. 국가가 만일 그때 그때의 이익(利益)과 편리(便利)에 따라 어떤 악당(惡黨)하고도 담합(談合)하고, 어떤 사술(邪術)이라도 감행(敢行)하여 일관된 가치지향적(價値指向的) 존재로서의 특성을 포기(抛棄)한다면 그것은 마피아나 조직폭력집단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
며 국제사회에서 문명국가로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게 될 것이다.

우리의 주권적 실체를 유린(蹂躪)하고 우리의 강토를 침략(侵略)하여 착취(搾取)했으며 우리의 애국자와 부녀자에게 비인도적(非人道的) 만행(蠻行)을 저지른 엄연한 역사적 사실들을 합법적이고 정당한 행위였다고 강변하는 일본의 공식적인 주장(主張)과 인식(認識)을 수용(受容)한다면 이는 자존심 있는 국민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며 국제사회에서 정당한 주권적 주체로서 인정받기를 포기(抛棄)하는 것과 같다.



(2) 독도(獨島)문제의 실상(實狀)


지금까지 나타난 한일관계의 진전 과정을 종합해 볼 때, 한국의 대일정책(對日政策)은 원칙(原則)이 없이 강온(强溫)의 진폭(振幅)이 너무 크고, 그때그때 각 국면(局面)을 미봉적(彌縫的)으로 다룰 뿐, 국익(國益)을 신장(伸張)시키기 위한 종합적이고 통일된 의지(意志)와 능력(能力)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독도(獨島) 문제에 관련해서도, 예외는 아니며, 한국 정부의 태도는 일본이 취하는 돌발적 조치들에 대해서 한국국민이 첨예한 반일(反日) 감정을 들어낼 때마다 아무런 대안(對案)이나 정견(定見)도 없이 강경 자세를 과시(誇示)하다
가, 흐지부지 중요한 점을 양보하여 이른 바 한일 관계개선의 성과를 선전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독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을 살펴보면,


"다케시마(독도)는 역사적으로는 물론이고, 국제법적 관점에서도 명백히 일본의 영토이다. 이것은 일본정부의 명확하고도 일관된 입장이다."


라는 것이다. 2000년 9월 17일에는 모리 일본 총리(總理)가 한국 공영방송인 KBS의 미리 준비된 질문에 대한 공식적(公式的)인 답변으로 이러한 견해를 분명히 하였다. 국영 방송인 KBS는 이 부분을 삭제하고 방송하지 않았으나 결국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 정부는 한국 영토인 독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국가 의사가 이런 식으로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태(事態)에 직면해서도 아무런 대응 조치를 취한 바가 없다. 다만, 한국 국회(國會)에서 여야(與野)간에 이것이 망언(妄言)이냐 실언(失言)이냐를 가지고 실랑이를 버리다가, 국민의 반일(反日) 감정이 삭으러들자 흐지부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일본의 주변 도서 영유권 문제로는 한국과 대립하고 있는 독도/다께시마 문제 이외에도, 러시아와의 북방 4도 문제, 중국과의 조어도/센카꾸 열도 문제 등이 있다.

그 중에서 북방 4도 문제는 일본 국민들에게 아주 잘 알려져 있어서 일본 국민 모두가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당장 영유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러시아에게 실질적으로 점유된 상태가 오래되어있고 양측의 주장이 양립된 채로 별 진전은 없다. 그러나 양국은 주변 해역에서의 어로(漁撈) 문
제 등을 상당히 실질적으로 해결해 가고 있다.

중국과의 조어도/센카꾸 열도 문제도 독도 문제보다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상으로 미국이 신탁통치를 한 이후에 일본에 반환한 것으로 되어있는 이 조어도/센카꾸 열도에 관해서는 일본의 입장이 중국에 비해서 강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두 경우와 비교해서 독도/다께시마 문제는 일본 국민에게는 가장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한 편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일반 국민의 관심도 가장 희박하다. 그러나 소수의 일본 전문가 층에서는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주장이 근거가 희박하고 무리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동안 보수 성향 일변도(一邊倒)로 발전 되어온 일본 정부의 태도는 "다케시마(독도)는 역사적으로는 물론이고, 국제법적 관점에서도 명백히 일본의 영토이다. 이것은 일본정부의 명확하고도 일관된 입장이다."라는 식으로 점점 더 확고하게 정착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특히 1951년 San Francisco 강화조약 체결 시에, 일본 정부는 연합군 최고 사령부 정치고문으로 있던 William Sebald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 강력한 배후 lobby를 한 결과, 그 제2조 a항 중, 일본의 잔존주권(殘存主權)을 배제해야할 도서의 범위를 규정하는 조항에서 처음부터 열거되어 있었던 독도를 삭제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일본은 이 사실을 중요시하고 이 것을 근거로 독도에 관한 한, 국제법적으로 일본의 입장이 한국에 비하여 강하다고 믿고 있다.

한국 측에서는 한국의 주변 도서(島嶼)는 3215개나 되는 데 여기에 열거된 섬은 3개뿐이므로 여기에 열거되지 않았다고 해서 모두 일본의 잔존 주권이 인정된다는 해석은 나오지 않는 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당시 한국 정부가 독도를 다시 그 제2조 a항의 열거에 포함시켜 줄 것을 미국에 요청하였고, 미국은 독도/다께시마를 한국의 영토가 아닌 일본의 영토로 인정한다는 이유로 한국 정부의 요구를 거부하여, 미국 국무성의 공식적(公式的) 답신(答信)이 있었다는 사실을 중요시하고, 한국 측의 반론은 의미가 없다고 간주한다. 특히 이 점에 관한 일본의 주장은 일본 내에서 일본 영유권의 중요한 근거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점에 대한 한국 측의 국제법적 반론(反論)은 좀더 보완(補完)되지 않으면 않된다.

최근에 나는 동경에 거주하는 다로오 코겐이라는 일본 청년으로부터 이점에 대한 질의(質疑)를 받아서, 이것에 관해 국제법적으로 설명을 해준 일이 있다. 몇 번의 서신이 오고 갔으나, 이 청년은 나의 국제법적인 설명을 모두 받고 나서 더 이상 질문(質問)를 해오지 않았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일 수밖에 없는 국제법적 근거에 관한 나의 설명에 승복(承服)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적어도 나의 이론에 대해서 일본측으로서 더 이상의 반론(反論)은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에게 설명해준 나의 새로운 국제법상 논거(論據)에 관해서는 곧 발간(發刊)될 예정으로 있는 『어느 일본 청년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명(題名)의 나의 저서를 참고해 주시기 바란다.


1951년 San Francisco 강화조약의 협상 과정에서, 미국 정부 -특히 William Sebald대사(大使)- 를 상대로 독도/다께시마의 일본 영토화(領土化) 작업에 참여한 것은, 당시 수상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일본 수상을 필두로 한 일본 정부 자체였다고 한다. 일본 외무성 조약국에서 실무자로 여기에 가담한 가와까미 겐조(川上健三)는 『죽도(竹島)의 영유(領有)』라는 제목의 정교(精巧)한 보고서를 제출하여 일본 측 국제법적 주장의 이론적 골격을 준비하였으며, 나중에 이를 『죽도의 역사, 지리학적 연구』라는 본격적인 저서로 발간하였다. 이 책은 지금까지도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관한 국제법적 이론의 원전(原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죽도 일본 영유권론"(竹島 日本 領有權論)에 관한 그의 이론은 일본의 역사학자와 한국의 학자들에 의해서 그 허구(虛構)와 모순(矛盾)이 철저히 분석, 입증되었다.


"죽도 일본 영유권론"(竹島 日本 領有權論)을 주장하는 일본 정부나 일본 학자들의 논거 중에서는 국제법상의 『무주물(無主物) 선점이론(先占理論)』이 중요한 근거로 제기되고 있는 데, 이는 1905년 1월 28일, 일본 제국주의 정부 각료회의(閣僚會議)에서는 독도/다께시마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기로 최종 결정한 사
실에 기초하는 것이다.

이 영토 편입조치에 관한 시종(始終)의 경위(經緯)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일본 정부가 나까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라는 민간인이 독도/다께시마 에서 해려(海驢) 수렵에 관한 전권(專權)을 얻으려는 행위를 이용하여, 당시 일본의 고위 정부 각료, 즉, 수산국장 마끼 보꾸신(牧朴眞), 해군 수로부장 키모쓰끼 겐
꼬(肝付兼行), 그리고 외무성의 야마자 엔지로(山座圓次郞) 정책국장 등이 배후에서 조작한 사기극(詐欺劇)에 지나지 않는다고 종합할 수밖에 없다.

그때까지 일본인들 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독도/따께시마 의 원래 명칭인 "리앙꼬 시마"라는 이름을 버리고 "다께시마" 라는 이름을 사용키로 인위적(人爲的)으로 결정하고, 이 섬을 일본의 영토에 편입키로 은밀하게 결정한 것은 한반도에 대한 본격적인 제국주의 침략을 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취약(脆弱)한 인접국(隣接國)인 한국 정부에 대해서 전술적인 사기극(詐欺劇)을 벌린 것임이 이미 입증되어 있다.

그러므로 최근에 일본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독도는 현재도 일본의 영토이며, 아주 오랜 예로부터 일본 고유의 영토로 있어 왔으며, 이 암도(岩島)에 관한 일본의 영토적 권원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완벽한 증거에 의해서 성립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정신지체아(精神遲滯兒)들이 자신이 꾸며낸 거짓말을 나중에는 진실된 사실로 믿는 버릇이 있는 것처럼, 1905년 일본 제국주의(爪主義) 정부가 수행한 해묵은 전술적 음모의 전말(顚末)을 망각하고, 엉터리로 날조된 법 이론인, 이른 바 선점이론(先占理論)을 이제는 유효한 법적 근거로 믿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현재 일본 정부 고위 관료들의 이러한 독도에 관한 인식은, 역사교과서를 왜곡하고, 유사법제(有事法制) 관련 법안을 서둘러 만들어서 군국주의(軍國主義) 일본을 재건하려는 일본의 새로운 열기(熱氣)와 동일선상(同一線上)에 서 있는 정신 상태에서 유지(維持)되고 고무(鼓舞)되는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정신상태는 구석기시대의 문화유적을 조작(造作)하여 일본에도 70만 년 전 구석기 문화가 존재한다고 거짓 학설을 발표했다가 들통이 난 후지무라 신이찌 교수와 같은 사람을 배출한 시대착오적인 외국 혐오적(嫌惡的) 국가우월주의(國家優越主義)의 망령(妄靈)들에 사로 잡혀 있는 일본 사회의 광기(狂氣)의 일
종에 불과한 것이다.


독도 영유권 문제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새로운 해양법 규범에서 배타적 경제수역이라는 광대한 관할수역제도의 등장과 더불어 새롭게 제기되는 일반적인 도서영유권 분쟁과는 그 본질적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일본이 러시아나 중국과 관계에서 갖고 있는 북방 4도 문제나 조어도/센가꾸 문제와도 반드시 구별해서, 절대로 동류(同類)로 보아서는 않되는 특별한 문제이다.

독도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 차이에서 오는 뼈아픈 역사적인 과제(課題) 그것이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의 과정에서 가장 먼저 울릉도와 함께 이 독도를 유린(蹂躪)하였으며, 2차 대전 이후에는 이 명백하고 당연한 한국 영토에 대해서, 시대착오적인 군국주의적 우월감에 근거하여 터무니없는 영토적 권원(權原)의 주장을 해 옴으로서,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을 계속해서 폄하(貶
下)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기간 중, 일본 제국주의 정부는 "독도/다께시마는 한국에 속한 섬"이라는 일반적 인식(認識)을 일본 국민들로부터 불식(拂拭)시키기 위해서 여러 모로 노력하였으나, 1905년 이후, 일본 제국(爪)이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를 시행하던 전 기간을 통해서, 독도/다께시마는 한국에 속한 섬이라는 이
일반적 인식은 일본인들의 뇌리(腦裏)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다께시마가 고유의 일본 영토라고 하는 일반적인 인식이 일본 국민들 사이에 자리 잡은 것은 1945년 이후라고 하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逆說的)인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
다.


일본 정부는 오히려 2차대전이 종결된 1945년 이후에서부터 "죽도(竹島)의 영토화(領土化) 작업"을 신중(愼重)하고 지속적(持續的)인 태도로 계속하였으며, 영유권 주장과 홍보를 계속해 온 것이다.

일본 정부는 1951년 San Francisco 강화조약의 협상 과정에서 연합국 측에게 조직적인 lobby를 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이후도 계속해서 일본 국내 지도(地圖)와 교과서 등 각종 문헌(文獻)에 독도(獨島)를 죽도(竹島)로 표기하여 일본의 영토로 나타냄으로서 독도가 일본 영토임을 홍보(弘報)해 왔다. 뿐만 아니
라 일본은 집요한 노력으로 구미(歐美) 각국의 문헌에 독도가 일본 영토로 표기되도록 집중적인 노력을 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상당한 효과를 내고 있다.(그림 1. 참조)

이러한 일본의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은 독도(獨島)에 대한 신중하게 수립되고, 일관성(一貫性) 있는 영유권 유지 정책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특히 최근에 와서, 한국 정부(政府)는 연속적으로 경솔하고 즉흥적인 정치적 계산에 의해서 한일(韓日) 간의 첨예한 영유권 분쟁 구도(構圖)를 심각하게 훼손(毁損)시켜 놓았다




(3) 한국 정부(政府)의 대일(對日) 정책


가. 1996년의 대일(對日) 초강경(超强硬) 자세


1996년 2월초, 일본 하시모토 총리가 200해리 경제수역을 독도에서 기점(起點)하겠다는 발언을 하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신중론(愼重論)을 펴는 외무부를 질타(叱咤)하고, 정부대변인의 특별 논평을 통해서 일본의 주장을 공격적(攻擊的)으로 반박하였다. [소위 "버르장머리를 고쳐준다."는 김 대통령 발언 사건]

이러한 한국정부 -정확히 말하면 김영삼 대통령- 의 초강경(超强硬) 자세는 1월부터 독도에 관해 일본 정부가 취한 일련의 공격적인 태도에 격분(激忿)하고 있던 한국민의 반일(反日) 감정을 예민하게 읽었던 김영삼 대통령의 탁월한 정치적 감각이 발동된 것이며, 아울러 동년 4월 11일에 예정되어 있었던 총선(總選) 등을 의식한 정당정치적(政黨政治的)인 배려가 작용한 것일 뿐, 일본에 대한 한국의 단호한 영토정책이 따로 새롭게 마련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은 독도문제에 관련된 기본 입장으로, "EEZ는 양국간의 경계가 획정된 이후(以後)라야 협정 적용수역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므로 경계획정 협상과 어업협정 개정의 협상은 동시(同時) 연계하여 진행되어야 한다." 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나. 김영삼 대통령의 합리적 근거 없는 양보


1996년 5월 9일부터 열린 한일(韓日)간 어업협정 개정을 위한 실무자 회의에서까지도 이러한 한국의 기본입장은 재확인되었으나 이미 이러한 어려운 입장이 흐지부지 와해(瓦解)될 수 있는 소지는 3월부터 대통령 자신에 의해서 마련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국내용(國內用)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김영삼 한국 대통령의 대일(對日) 초강경(超强硬) 발언은, 신중하게 검토되지 않은 감정적(感情的) 발언으로서, 대일관계(對日關係)에서 한국 정부에게 결과적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외교적 부담(負擔)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한국 대통령의 초강경 발언이 있은 지 한 달도 못된 3월 2일부터 태국 방콕에서 열린 ASEM 회의에서 하시모도 일본 수상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신 해양법 협약상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 제도의 도입과 관련해서 필연적으로 제기될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김영삼 대통령은 하시모도 일본 수상에게 특별한 언질(言質)을 주지는 아니한 것 같다.

하시모도 일본 수상과 김영삼 한국 대통령은 동년 6월 23일 제주 정상회담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데, 이 자리에서 하시모도 일본 수상은 똑 같은 의제(議題)로 다시 김영삼 대통령을 압박하였다. 이에 대해 김대통령은 "영유권 문제와 어업협정은 별개의 문제로 하여 해결하자."라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김동조 전 주일대사(駐日大使)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 한일(韓日) 정상회담에서 일본 총리의 발언에 김영삼 한국(韓國) 대통령이 말려들은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즉 김대통령의 이 발언은, "한일간에 독도에 관한 영유권 문제가 현안으로 존재한다."는 일본의 주장을 묵살하지 않고 인정한 셈이 되는 것이다. 김동조 전 주일대사는 "일본 언론까지 나서서 김대통령과 한국 정부의 태도 변화를 『유연한 자세...』 운운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사실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회
고(回顧)하고 있다.

이어서 1997년 1월, 일본 규슈 벳뿌에서 열린 한일(韓日)간 정상(김영삼-하시모도)회담과 외무장관회담에서 1996년 초부터 경색되어온 한일관계(韓日關係)를 개선한다는 원칙적 합의가 있었다. 즉 한국 대통령의 결정적인 양보(讓步)가 확인된 것이다.

대통령의 양보(讓步)로 한국은 종래의 기본입장을 수정하여, 1997년 3월 6일부터는 경계획정 문제(영유권 문제를 전제로 하는)와 어업문제(漁業問題)를 분리(分離) 협상하자는 일본의 주장을 받아드렸다. 한국은 이어서 같은 해 10월 8일 동경에서 열린 제6차 한일 어업실무자 회의에서, 동해(東海)의 독도(獨島)를 포함한 수역에 잠정조치수역(暫定措置水域)을 설정하는 안에도 결국 동의하였다.



다. 1997년 말 한국 정부의 대일(對日) 강경정책(强硬政策)


1997년 말까지, 한일(韓日)간 어업협력 실무협의의 주요쟁점은 1974년 북부대륙붕경계협정상 제35번점 이북의 [잠정합의수역]범위를 획정하는 문제로 집약되었다.

제7차 실무회담(97.11.29.) 이후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어업협정의 조기 타결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일본은 본래 협상 타결의 시한(時限)을 97년 7월 20일로 주장했던 것이지만 다시 97년 12월말까지로 협상 시한을 수정해서 통보하고 있었다. 협상의 조기타결을 위하여 12월에 일본 외무차관이 두번, 외무성 장관이 한번, 연속적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어업협상의 조기타결을 독촉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는 전속관할수역의 범위 문제에서 34해리를 고집하고 잠정합의수역의 동측한계를 136°로 할 것을 고집하여 어업협정의 조기타결(早期妥結)을 완강하게 거부(拒否)하였다.


이것은 독도문제와 한일어업협정과 관련한 김영삼 정부의 두 번째 대일(對日) 강경정책(强硬政策)이다.


독도(獨島)가 있는 동해(東海) 수역에 잠정적 합의수역을 설정한다고 하는 중요한 문제까지를 1997년 초에 이미 양보(讓步)해 놓고 있었던 한국정부가 1997년 말에 와서 무슨 이유로 이처럼 다시 한번 강경하게 일본의 협상 타결 요구를 거부(拒否)하고 있었을까?

한일(韓日)간 어업협력 실무협의의 주요쟁점은 1974년 북부대륙붕경계협정상 제35번점 이북의 [잠정합의수역]범위를 획정하는 문제로 집약되었다. 1997년 말까지, 한일 간의 실무 협상에서 접근된 각측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 전속 관할수역의 범위 문제

일본은 당초 80해리 주장에서 35해리로 접근하였다.

한국은 당초 24해리 주장에서 34해리로 접근하였다.

㉯ 잠정합의수역의 동측 경계선 문제

일본은 당초 134°에서 135° 주장으로 접근되었다.

한국은 136° 주장을 견지하였다.

㉰ 잠정합의수역의 법적 성격

일본은 공동관리수역으로 간주하였다.

한국은 공해(公海)적 성격을 견지할 것을 강조하였다.


당시 한일(韓日) 간 구체적 실무협상에 있어, 전속관할수역의 범위에 관해서 한국 측의 입장은 34해리로 접근되어 있었다. 본래 이 어업협정에서 한국의 입장은, 한국어선의 자유로운 어로가 가능한 어장의 범위를 확보한다는 취지에서, 협약으로 확정될 EEZ의 범위를 가급적 축소하고 [잠정합의수역]의 범위를 확대해 놓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34해리가 되든 35해리가 되든 범위를 확대한다는 관점에서 보드라도 거기까지 한국이 양보해온 과정으로 보아서 그 차이는 근소(僅少)한 것이며, 어차피 이것이 근본적인 쟁점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또, 동측한계선문제에 관해서 보면,

한국이 주장한 "동경 136°안(案)"은 독도로부터 200해리 범위를 고수(固守)한다는 상징적 의도(意圖)가 숨어 있었으며, 표면적으로는 "대화퇴 어장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설사 [잠정합의수역]의 동측(東側) 경계선으로 "동경 136°안(案)"이 채택된 경우라도 그것이 독도에서 200해리 EEZ가 확보된 의미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또, 협정 수역의 북측 한계가 38°37′선(線)으로 전제되고 있었으므
로 136°가 되든 135°가 되든 이것은 38°37′선 이북에 위치한 대화퇴 어장과는 처음부터 논리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면 무슨 사정으로 한국 정부는 이처럼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일본과의 협상 타결을 완강히 거부(拒否)한 것일까?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던 김영삼 정부가 일본에 대해서 그처럼 완강한 강경입장(强硬立場)을 견지했던 것은, 금융위기 사태로 국민의 신망(信望)을 상실해가고 있었던 당시에 또 하나의 정치적 악재(惡材)가 될 수 있는 이 잘못 되어가는 이 한일어업협정의 최종 타결을 차기 정부로 미루어 보자는 속셈이었다고 생
각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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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1998년초 일본의 일방적 협약파기(協約破棄)와 한국의 대일(對日)강경정책
(强硬政策)


한일 양국 사이에 파국(破局)을 회피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일관계는 경색(梗塞)되어 일본은 각의(閣議)의 결의를 거쳐 구 한일어업협정의 종결(終結)을 1998년 1월 22일에 일방적으로 선언하였고, 이 사연 많은 한일(韓日) 간의 어업협정은 매우 불행한 모습으로 종결(終結) 되게된 것이다.

이러한 파국의 원인이 표면적으로는 협정수역의 동쪽 한계를 동경135도로 고집하는 일본의 주장을 한국이 받아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는 하나, 자국 인근해역에서 조업하는 한국어선에 의해서 그 어족자원을 부당하게 수탈 당하고 있다고 강하게 반발하는 일본어민들의 불만이 일본 정부에 대하여 일종의 정치적 압
력으로 작용하였으며 또 하시모토 총리의 재정개혁 실패와 극심한 경기침체 등 일본 국내정치 문제를 한국에 대한 강경책으로 돌파하려는 일본의 의도가 있었든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일본이 구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종결한 조치는 협정상의 효력정지조항(동 협정 제10조 2항)에 따라 실시한 것이므로 협약규정 위반은 아니나, 신어업협정의 타결을 위해서 양국이 협상 중에 있었던 만큼, 협상내용과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종결조치를 감행한 것은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합리적 협력관계를 추구해야 할, 현대 국제사회의 기본적 신뢰의무(信賴義務)에 반(反)하는 것으로서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다.

한국민 사이에서 반일(反日) 감정은 다시 격앙되었으며 한국 정부는 국민감정 무마용 대일(對日) 강경방침을 다시 한번 과시적(誇示的)으로 감행하였다.


즉, 한국 김영삼 정부는 즉각적인 보복 강경조치로서 동 1월 24일 일본 주변수역에 대한 한국정부의 어업자율규제조치를 정지(停止)시켰다. 이 협정은 일방의 파기 통고일로부터 1년 후에 실효(失效)되므로 기국주의(旗國主義) 체제가 유지되는 이 1년의 유예기간(猶豫期間) 동안 한국 어부들은 일본측 수역에서 극한적으로 어로행위를 감행할 것이므로 설사 한국 정부측이 보적 강경책이라고 하여 조업자율규제조치를 정지(停止)하지 않았더라도 한국과 일본 어부들간의 극단적인 마찰과 충돌은 이미 어느 정도는 예정된 것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한국의 트롤어선들이 북해도(北海道) 근해어장에 들어가 조업을 강행하자 일본어민들은 해상시위를 감행하고 일본 순시선과 일본 어선은 합동으로 한국
어선과 물리적인 대치(對峙)와 추격(追擊)을 벌인바가 있다. 한국의 감정적인 보복 대응으로 인해서, 만일 한일(韓日) 어부들 간에 더 격렬한 물리적 충돌이 일어났더라면, 그 부담을 한일 양국이 같이 부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의 감정적인 보복 대응(對應), 즉 이른 바 "어업자율규제조치의 정지(停止)"는 일본측이 신뢰의무(信賴義務) 위반으로 부담해야 할 국제윤리적인 책임을 상쇄(相殺), 해소(解消)시키는 효과를 가져 왔을 뿐이다. 왜냐하면 어업자율규제조치란 사실상 구 한일어업협정의 합의내용의 중요한 일부를 구성하는 신사협정(紳士協定: gentleman's agreement)으로서 이를 일방적으로 정지(停止)하는 것도 일본의 일방 파기행위 못지 않게 국제법상 신뢰의무 위반이며, 국제윤리적으로 심각하게 비난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정부가 취한 일련의 대일(對日)강경조치는 독도 영유권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한다든지, 어업협정의 내용을 국익에 맞게 관철하기 위한 전략(戰略)이나, 정책초점이 있었다기 보다는 비등(飛騰)하는 국민의 반일감정(反日感情)에 정치적으로 영합(迎合)할 수 있는 극적(劇的)인 방도를 찾는 데에 몰두해 있
었든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마.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양보(讓步).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방법으로 구사(驅使)된 한국 측의 1997년 대일(對日) 강경조치(强硬措置), 즉 어업자율규제조치의 정지(停止)는 김대중 정부에 와서 1998년 7월 2일 아무런 명분(名分)도 없이 다시 양보(讓步), 철회(撤回)된 것이다.


1998년초,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정권을 정식으로 인수받기도 전에 김대중 정권은 부도(不渡) 위기에 당면한 국가 경제를 회생시켜야 하는 막중한 숙제를 떠 안게 되었다. 김대중씨의 신정권(新政權)은 외환위기(外換危機)의 극복과 경제회생(經濟回生)이라는 당면의 긴급한 국가적 과제에 매진함으로서 집권초기의 지지도(支持度)는 역대의 어떤 지도자(指導者)보다도 높았다는 자랑스러운 기록을 갖게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제 4년의 대통령 임기가 만료되려고 하는 지금 그 전체적인 실상(實像)을 보면, 집권 초기부터 잘못된 정책적 진단에 입각해서 즉흥적으로 시도된 여러 정책의 실수로 인해서 국정의 기본 틀이 우려스럽게 파행적(跛行的)인 행보(行步)를 치닫고 있는 것을 보고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 정권의 국
정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공과(功過)를 검토하는 것은 이 연구 목적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다만 독도 영유권 문제와 한일어업협정에 관련해서 이 정부가 취해온 정책적 자세를 여기서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진전과 한국과 일본을 "진정한 동반자 관계"로 접근시킨다는 것은 이 정부가 처음부터 가장 중요시하여 추진한 정책이다. 적어도 이 두 가지 국정과제에 관한 한, 정책적인 문제의식 자체는 과거 어느 정권보다도 탁월한 것이었으며 좀더 신중하고 합리적인 정책적 접근이 있었더라면 한국의 국가적 위상은 확고해 졌을 것이다. 물론 김대중씨 자신도 역사적으로 크게 인정받는 지도자로 기록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일본과 잠정조치수역을 설정키로 합의함으로서 이 독도 영유권 문제에 관해서 이미 김영삼 정권이 기본적인 실수를 해 놓은 상태였지만, 정권을 인수받은 김대중 정권에서 이 문제를 다시 처음부터 신중히 검토하여 한국의 곤란한 입장을 새로운 정책적 출발점으로 회복시킬 수 있었다면, 독도문제를 해결해 내는 훌륭한 업적까지 이 정권에서 완수 할 수 있었지도 모른다. 노련한 정치인인 김영삼씨가 차기 정권에 힘겨운 숙제로 이 문제를 넘긴 저의(底意)에는 이러한 의도가 깔려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정부가 집권을 개시하던 1998년 2월 25일은 일본이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종결시킨 1월 22일에서 한달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한국국민의 반일(反日)감정은 고조될 대로 고조되어 있었다. 이 시기는 말하자면 수교(修交)이래 한일관계가 가장 경색(梗塞)된 때였다고 할 수 있다. 한일관계를 획기적으로 접근시킨다는 중요한 목표를 가진 김대중 정부로서는 그러므로 한일어업협정 문제는 처음부터 커다란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새 정부측에서는 전 정부의 대일(對日) 강경노선은 이미 의미가 없었으며 대일(對日) 접근정책을 획기적으로 추진하는 문제만이 남아 있었다.

독도가 가운데에 위치한 동해(東海)에서 일본과 잠정적 조치수역을 합의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한일(韓日) 간에 실질적으로 첨예한 분쟁 대상이 되어 있는 독도의 영유권이 명백하게 한국의 권원(權原)으로 확인되고, 더 이상 훼손(毁損)되지 않기 위해서 독도(獨島)를 그 안에 내포하는 이러한 잠정적 조치수역이 합의되어서는 안된다는 비판적인 견해가 제기되어 있었으나, 편리하고 구체적인 대안이 없는 이러한 단순한 우려(憂慮)가 새 정부의 대일(對日) 접근정책과 양립하기는 어차피 어려운 일이었다. 오히려 전 정부가 실시한 대일(對日) 강경조치(强硬措置), 즉 어업자율규제조치의 정지(停止)를 어떻게 해소(解消)시키는가? 하는 문제가 당면의 과제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 전환의 계기는 1998년 6월 사토오 교오코 일본 자민당 국제어업문제 특별위원장의 방한(訪韓)으로 마련되었다.

구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일에 주역(主役)을 맡았으며, 한일(韓日) 간 어업협상에서 한국에 대해서 강경한 주장을 펴온 대표적인 인사인 사토오 교오코 의원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 측의 대일(對日) 보복조치인 어업자율규제조치의 정지(停止)를 해제할 것을 역설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
는 1998년 7월 2일 아주 조용히 이 대일(對日) 보복조치를 철회(撤回)하였다.

한국 측의 대일(對日) 보복조치가 해제된 것을 계기로 한일(韓日)간의 협상은 급진전되었다. 새로운 어업협정은 1998년 9월 24일 최종 타결되고, 1998년 10월 8일 양측 수석대표에 의하여 가서명(假署名)되었으며 1999년 1월 22일 비준서의 교환으로 발효되었다.

최종 타결된 이 어업협정의 내용을 보면,

전속관할수역의 범위는 일본의 주장인 35해리로 합의되었고

동측 한계선은 절충해서 135°30′으로 합의되었다.

대화퇴어장을 중간수역에 포함시키기 위해서 협정수역의 북측 경계로 전제되어 있던 북위 38°37′선의 적용을 북한 군사경계수역 범위로 제한하고, 잠정적 합의수역(중간수역) 북단에 추가로 삼각형의 돌출부분을 합의하여 대화퇴의 약 절반을 중간수역에 포함시켰다.

바. 한국 정부의 마지막 강경 입장


협약 발효 직후, 일본측은 한일어업협정의 구체적 시행을 위한 실무협의에 임하여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한국 측에 집요하고 조직적인 태도로 제시하였다.

① 일본은 1999년 7월 한일어업공동위원회가 가동(稼動)됨에 따라서 중간수역에서의 자원 보존을 위한 "이미 합의된"(또는 일본이 일방적으로 이미 상호 합의되었다고 주장하는) 조업규제를 즉시 채택, 실시할 것

② 일본은 중간수역에서의 자원관리 목적으로, 중간수역에 대한 각종의 어업규제사항 (상대방 국가의 위반어선에 대한 착색탄 발사와 같은 직접적인 위법확인조치, 공동 승선 규제, 등)들을 단계적으로 실시할 것

이들 일본이 제기하고 있는 중간수역내의 자원 보존 규제사항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 자원 보존 관리를 위한 양 당사국의 공동 규제

⹂ 지도와 단속의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타방 당사국 어선에 대한 실질적 규제

⹃ 상기 ⹁ 및 ⹂의 명분으로, 실질적으로는 일본 국내법령상 현행 규제방식을 한국 어선에 적용하려는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③ 일본 측 EEZ 구역에서의 한국어선 조업 어획량을 2차 년도에 13만 톤, 3차 년도에 상호 등량(等量) 즉 약 9만 톤 수준으로 합의할 것을 암시하면서 이러한 합의는 중간수역에서의 자원보존 조치의 실질적 조기실시와 연계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한국에 대한 이러한 일본의 강한 입장과 요구의 명분(名分)은,

첫째, 이미 발효되어 있는 양자조약의 체약 당사국으로서 한국은 조약규정 성실이행 의무가 있다는 것과

둘째, 협정의 목적상 이 지역(東海)에서 자원의 보존과 관리를 실효적(實效的)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은,


실무협상 단계에 들어와서 위와 같은 강한 요구를 제시하는 일본에 대하여, 한국 정부는 적절한 대응 방안의 수립에 부심(腐心)하였다. 1999년 9월 20, 21일에 서울에서 있었던 한일 양국간의 어업실무회의에서 한국 측은 일본측 EEZ수역에서의 조업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중간수역에서의 공동관리는 절대로 수용
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통보하였다.

중간수역 내에서 공동관리의 의미를 내포할 어떤 종류의 자원 규제 조치에도 합의할 수 없다고 하는 1999년 9월 한국 해양수산부의 정책 방침은 그 동안의 다수설에 입각한 낙관적(樂觀的) 소론(所論)들에 비하면 다소 의외의 것이겠으나, 한국이 독도(獨島) 영역 주권의 배타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것이었
다고 판단된다.

이것은 실제로 이 중간수역에서 자원 보존을 위한 관리형 어업을 주도해 나가야 하는 주무부서로서 당연히 갖고 있을 현실적 감각이, 그 동안 협상의 타결에만 급급해온 소위 협상 팀과 낙관적 다수설을 역설하는 일부 학자들의 몽상적 관념론을 극복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자원 관리를 위한 공동적 규제 조치 합의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협약주체로서의 신뢰의무(信賴義務)를 위반하는 것이 되므로 모든 문제가 이러한 강경방침(强硬方針)으로 궁극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 한국 정부의 예상되는 양보(讓步)

- 중간수역에서의 자원공동관리-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동해(東海) 중간수역에 관해서 어업공동위원회는 자원 보존과 관리를 위한 규제조치에 관한 합의 사항을 양 당사국들에게 "권고"하고 그들은 이를 "존중"하게 되어 있어서 자원관리에 관한 어업협정의 규정은 비기속적(非羈束的)이므로 따라서 이 중간수역은 공해적(公海的) 성격의 수역으
로 유지되고 있고, "자원의 공동관리가 배제(排除)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 정부와 일부 국내 국제법 학자들의 해석은 법률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잘못된 것이다.

최근에 와서 일부 국내학자들이 필자의 견해에 부분적으로 동조하여 한일어업협정상 동해(東海) 중간수역은 결국 유엔 해양법협약 제74조 3항에 의거한 잠정적 합의 수역이며 자원의 공동관리수역이 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독도가 포함된 동해 중간수역에서 결국 한국과 일본이 어업자원의 보존을 위한 관리와 규제를 공동으로 실시하게 된다고 해도 이는 독도 12해리 영해 이내의 범위에는 미치지 않으므로 독도의 영유권에는 아무런 침해를 가져올 수 없을 것이라는 단서(但書)를 잊지 않고 부치고 있다.


생각건대, 정부 측 학자들의 이러한 이론적 발전은 지금까지의 강경한 입장을 양보하여 한국 정부는 이제 중간수역에서 일본과 자원의 공동관리를 감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음 단계에서 한국정부가 채택할 것으로 예상되는 양보(讓步)이다.


생각건대, 합의된 잠정조치 수역 안에 독도와 같은 영토분쟁이 있는 육지가 없는 일반적인 경우 -즉 통상적인 grey zone- 에서는 위와 같은 주권적 권리의 배타성(排他性)이 제한되는 사례의 축적(蓄積)이 있다고 하드라도 그 것은 양 당사국이 그 구역의 경계획정을 하는 단계에서 최종적인 경계획정을 저해(沮害)하
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경계가 확정되지 않은 EEZ에 대해서 양국의 법적 지위는 대등(對等)하기 때문에 배타성이 제한되는 사례를 어느 일방이 자국에게만 유리하게 원용(援用)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 구역의 경계가 획정되는 순간 위와 같은 주권적 권리의 배타성(排他性)이 제한되는 사례의 법적 효과는 치유(治癒)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런 경우에 "어업문제와 영유권 문제는 별개"로 취급될 수 있다.

그러나 합의된 잠정조치 수역 안에 독도(獨島)와 같이 영토분쟁이 있는 육지가 있을 때, 위와 같은 주권적 권리의 배타성(排他性)이 제한되는 사례의 축적(蓄積)은 영유권의 귀속을 판단함에 있어서 기존의 영유권에 도전하는 당사국, 즉 일본에게 강력한 주권적 반론(反論)을 입증할 수 있는 근거를 부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 구역의 경계가 획정된 이후에도 위와 같은 주권적 권리의 배타성(排他性)이 제한된 사례의 법적 효과는 치유(治癒)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원의 공동관리가 진행되는 것만으로 즉시 그 연유된 영토(領土)에 공동영유(共同領有)가 성립되는 것으로 추정(推定)되지는 않으나, 시간의 경과와 함께, "필연적인 과정을 거쳐서" 문제된 영토의 본래적 주권의 배타성(排他性)을 훼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본래적 영토주권은 일본의 영토주권이
아니라 한국(韓國)의 영토주권인 것이다.


1999년, 독도(獨島)와 같은 민감한 섬이 있는 동해(東海)에서 소위 "중간수역"을 설정한 한일어업협정을 합의할 때, 우리정부의 논리적 피난처가 바로 "영유권문제와 어업문제는 별개"라는 것이었다.

2000년 12월에 한국 정부는, 일·러간 영유권 다툼이 있는 쿠릴열도 남쪽 인근해역에서, 소위 북방4도에 실효적 점유를 확보하고 있는 러시아와 15000톤 꽁치조업 입어(入漁)를 합의하였다. 일본이 일·러간 영유권 다툼이 있는 수역에서 러시아와의 합의만으로 한국이 조업할 수 없다고 영유권 문제를 이유로 완강하
게 반대를 하고 있었으나, "어업문제와 영유권 문제는 별개이므로", 해당 수역에 들어가 꽁치를 잡겠다는 것이 확고한 한국 정부의 입장임이 여러 번 천명(闡明)되었다. 한국 정부 당국자들은 국정감사 등에서 한국이 이 분쟁지역에 들어가 입어(入漁)하는 것은 "국제법상으로나 국제관례상으로 전혀 합당하므로" "일
본의 반대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장담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2000년 10월 초에 일·러 간에는 제3국의 입어금지가 합의되었으며 한·러 간의 합의여하에 불구하고 이제 2002년 이후 한국은 남쿠릴 열도 인근 해역에서 꽁치를 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영유권문제와 어업문제는 별개"라는 한국 정부가 애용해온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는 결과적으로 여기에서 전혀 위
력(威力)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남쿠릴 수역 꽁치 조업 문제에서 뼈아픈 경험을 하고서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한국 정부는 궁색한 이론으로 "영유권문제와 어업문제는 별개"이며, 한일어업협정으로 독도 영유권 문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정부측의 입장을 변호하는 견해 중에서 그래도 가장 발전된 이론은,

"중간수역은 해양법 협약 제74조 3항에서 규정하는 잠정적 합의수역이며 잠정조치수역의 성격적 분류상 소위 회색(灰色) 잠정조치수역(grey zone)으로 보아야 하지만, 이를 가급적 백색(白色) 잠정조치수역(white zone)으로 운영해야 한다."라는 의견이다.

우선 이 견해는 중간수역을 공해적(公海的: ?) 수역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점에서 문제의 핵심(核心)에 보다 접근하고 있다.
중간수역은 해양법 협약 제74조 3항에서 규정하는 잠정적 합의수역이다. 그러므로 이는 그 귀속(歸屬)과 경계(境界)가 모호한 채로 배타적 경제수역(EEZ)인 것이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점은 한일어업협정을 합의함으로서 이 중간수역에서 배타적 경제수역 제도에서 규정하는 방식의 자원의 보존과 관리조치를 시행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이 협정의 목적이다. 따라서 어느 모로 보나 이 중간수역은, 성격적 분류상 소위 회색(灰色) 잠정조치수역(grey zone)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가급적 백색(白色) 잠정조치수역(white zone)으로 운영해야 한다." 는 견해이다.

이런 정도로 궁색한 "운영방안"을 제시하는 간절한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법적으로 이러한 접근 방식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한반도 인근 수역에서 한중(韓中), 일중(日中) 간의 잠정적 합의 속에서도 "현행조업질서유지수역", 또는 "허가불요수역" 등의 명칭으로 이른 바, 백색(白色) 잠정조치수역(white zone)으로 분류될 수 있는 수역이 이미 합의되어 있다. 그런데 일단 회색(灰色) 잠정조치수역(grey zone)으로 합의한 중간수역을 한국이 일방적으로, "가급적 백색(白色) 잠정조치수역(white zone)으로 운영한다"는 것은 한일(韓日)간의 합의내용에 일치하지 않으므로 처음부터 불가능하거나 한국이 일방적으로 이를 강행할 경우에는 협약의무 위반에 의한 분쟁을 야기하게 된다.



2. 독도에 관한 국가 기본입장의 정리



(1) 영유권 확보와 주장에 관한 국제법상 기본적 원리


국내법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재산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체제가 존재한다. 그러한 국내법적인 권리는, 법이론적으로 엄격히 볼 때에 언제나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드라도 많은 국가의 국내법에서 적어도 실제로는 그러한 절대적인 재산권의 행사가 가능하다. 전부라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많은 국가들이 그 국내적인 관행으로 절대적 재산권을 인정한다. 즉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주장될 수 있는 확정적인 재산권을 토지등기소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 전체를 망라하는 하나의 중앙집권적 권력기구가 존재하지 않는 국제사회에서 타당(妥當)하는 법 체계인 국제법에서는 언제나,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확정적으로 성립되는 영토적 권원(領土的 權原:territorial title)을 보장하는 그러한 제도는 없다.

국제법에 있어서 영토에 대한 국가의 권원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국가의 영유권은 시간이 감에 따라 확정적으로 응고(凝固)되는 경우도 있고 상실(喪失)되는 경우도 있다. 주권적 권리는 포기(抛棄)될 수도, 재취득(再取得)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응고의 과정은, 주권적 권한 행사의 의사(意思)로서 점유(占有)할 때에만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상대방의 명시적 또는 묵시적인 승인(承認: acquiescence)이 있는 계속적인 주권의 행사가 있을 때만 응고(凝固)는 진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권의 행사를 제3자가 인정하는 경우에 이 것은 유용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장기적 점유에 의한 사실상 권리의 응고는
공개적이고, 계속적이며, 평화적으로 행사되는 주권의 존재를 번복시킬 수는 없다. 요컨대 국가영역은 육지 영토(領土)이든 바다의 영해(領海)이든 국가 행정적 권력으로 계속적으로 관리되고 있어야 한다.

영유권의 주장과 국권의 행사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영유권 분쟁에 관한 각종 판례에서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다. 주권적 영역권이 획득되는 또는 확정되는 정형적(定型的)인 공식(公式)이란 없다. 다만 각종의 거증(擧證) 사실들에 적절한 법리를 적용하고 결합하여 얼마만치 분쟁 상대국의
논리 보다 더 강력한 주권적 권원(sovereign title)을 입증하는 가에 관건(關鍵)이 있다.

따라서 영유권에 관한 분쟁에 있어서 당사국들이 직면하는 문제는 자국의 권리가 상대방 분쟁국의 권리보다 얼마나 더 잘 성립되어 있는가를 입증하는 일이다. 어느 쪽 권리가 더 잘 성립되어 있는가? 또는 어느 쪽 당사국이 이를 더 잘 입증하고 있는가? 의 여부는 제3자적 국제재판, 또는 중재재판(仲裁裁判)이
나 중개자(仲介者)들에 의해서 결국 상대적으로 교량(較量)될 것이다. 이러한 제3자적 판단에 회부되기 전이라도 자국의 영역 권원(權原)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국가는 영역권 분쟁을 준비하는 기본적 자료 즉 영유권 주장의 근거가 되는 사실과 그에 대한 법률적 판단에 관하여 국제법상 객관적으로 평가된 이론에 입각해서 정리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것은 분쟁 상대국과의 실질적인 협상이 시작되기 이전에 철저히 준비해 두는 것이 이상적(理想的)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준비는 상대국과의 영유권에 관한 협상을 실제로 시작할 것인가? 협상을 개시할 경우에 합의에 이르기 위한 합리적이고 유리한 접근 방법은 무엇인가? 또는 나아가 이를 중재(仲裁) 등 평
화적 분쟁해결 절차에 회부할 것인가? 하는 것들을 포함하는 중요한 정치적 결단(政治的 決斷)을 내리기 위해서 자국과 상대방 국가의 영유권 주장에 대한 강점(强點)과 약점(弱點)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국과 상대방 국가의 영유권 주장의 각 논점들에 대한 법적인 강점과 약점에 대한 평가는 당사국 자신들의 협상 방침과, 합리적인 해결을 위한 실제적인 방도를 발견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전제가 되는 것이다.




(2) 독도 영유권 문제에 있어서의 기본적 고려 사항



가. 독도 영유권 문제에 관한 국가기본 입장의 재정립


독도 영유권 문제란 새로운 해양법 규범에서 배타적 경제수역이라는 광대한 관할수역제도의 등장과 더불어 새롭게 제기되는 일반적인 도서영유권 분쟁과는 그 본질적 성격을 달리한다. 이것은 또 일본이 러시아나 중국과의 관계에서 갖고 있는 북방 4도 문제나 조어도/센가꾸 문제와도 동류(同類)로 보아서는 않되는 특별한 문제이다. 독도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 차이에서 오는 뼈아픈 역사적인 과제(課題)이다.

일본 정부는 2차대전이 종결된 1945년이래 지속적으로 "죽도(竹島)의 영토화(領土化) 작업"을 신중(愼重)하고 치밀하게 추진해 왔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한국 정부는 독도(獨島)에 대한 신중하게 수립되고, 일관성(一貫性) 있는 영유권 유지 정책이 결여되어 있다. 한국 정부의 태도는 일본이 취하는 돌발적 조치들에 대해서 한국국민이 첨예한 반일(反日) 감정을 들어낼 때마다 아무런 대안(對案)이나 정견(定見)도 없이 강경자세(强硬姿勢)를 과시(誇示)하다가, 흐지부지 중요한 점을 양보(讓步)하여 왔다.

이러한 한국 정부의 무정견(無定見)한 태도는 일본을 고무(鼓舞)하여, 일본 정부의 태도는 "다케시마(독도)는 역사적으로는 물론이고, 국제법적 관점에서도 명백히 일본의 영토이다. 이것은 일본정부의 명확하고도 일관된 입장이다."라는 식으로 점점 더 확고하게 정착되어 가고 있다.

그러므로 가장 시급한 당면의 과제는 한국 스스로가 독도 영유권 문제에 관한 국가 기본 입장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독도는 명백하게 한국의 영토이다.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역사적으로 또 국제법적으로 성립된 하나의 객관적 사실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 국민이나 정부가 영유권을 제대로 확보하지 않으면 이것은 언제나 바뀔 수 있다. 국제법상 법적인 체제가 그렇게 되어있다.

한국 정부는 역사적 증거를 다시 정리 보완하고, 국제법적 이론을 정비(整備)하여 일본이 사술(邪術)을 동원하여 영유권 주장의 근거를 하나 하나 마련해 가고 있는 것에 집중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한다.

특히 1951년 San Francisco 강화조약 제2조 a항의 초안 과정에 대한 국제법적인 분석과 1905년 일본 정부의 독도 영토 편입조치에 관련된 역사적 음모(陰謀)의 전말을 한국 국민과 일본 국민들에게 법적 정의(法的正義)의 내용과 있는 사실(事實)을 그대로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앞서 말한 일본 청년과의 서신 교환을 통해서 느낀 점은 일본의 근거 없는 영유권 주장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한국 측의 무성의(無誠意), 무정견(無定見)에 그 원인이 있다는 점이다. 한국 국민과 정부가 열성을 갖고 정당한 증거와 올바른 이론으로 일본 국민과 정부를 설득하면, 독도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
을 갖게 되었다.

또한,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표시하는 지도와 문헌을 보급하여 국제적인 인식을 바로 잡아나가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나. 실효적이고 평화적인 영역주권의 일관된 행사


거듭 강조해 온 것처럼, 영유권의 주장과 국권의 행사가 일관성(一貫性)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독도 영유권 문제에 있어서도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요건이다.

독도는 한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한국은 여기에 부두시설(埠頭施設)을 보완하였으며, 유인등대(有人燈臺)를 유지하고 있다. 고유의 영토인 독도를 개발하기 위해서 국가가 종합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환경 친화적 개발을 시도(試圖)하는 것은 필요하고도 적절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년 (2000년) 6월 윤한도 의원 등 110인의 국회의원이 발의한 [독도개발 특별법]은 의의 깊은 입법적(立法的)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알다시피 국권행사의 형식으로 입법적 조치 또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권 행사의 입법적 실적으로는 이미 1997년 제정된 독도 환경보호에 관련한 특별법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법은 일본에 대해서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한국정부가 한국국민의 정상적인 독도 입도(入島)를 사실상 방해하는 핑계로 사용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특별히 한일어업협정으로 인해서 독도에 관해 지금까지 잘 유지되어온 이러한 국권 행사의 일관성이 훼손되게 된 점이 문제의 초점이다.

정책은, 특히 영토(領土)에 관한 정책은 신중하고 정확하여야 한다. 즉 잘못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일단 잘못된 정책은, 잘못된 것을 알게된 즉시 고치면 아직 만회(挽回)할 여지가 남는다. 문제는 잘못된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갈 때까지 가는 경우이다. 이런 어리석은 국민에게 돌아오는 것은 패배와 돌이킬 수 없는 파국(破局), 그 것 뿐이다.

독도 문제에 관한 영토 주권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이 한일어업협정을 폐기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한국은 법적으로 이제 일방적으로 이 협정을 폐기(廢棄)시킬 수 있는 조약상의 권리가 보장되어 있다. 어업의 실리면(實利面)을 보드라도, 2002년부터 한일 양측의 상대방 수역에
의 입어량은 등량(等量) 기준으로 되어 있는 만큼 이 대단히 잘못된 어업협정에 더 이상 연연할 명분도 없어진 것이다.


21세기에 한국과 일본이 진정한 동반자로서 국제사회에서 주동적 역할을 완수하는 길은 한일 양국이 보다 전진적으로 서로의 기본 자세를 스스로 고쳐나가는 방법밖에는 없다.

우선 한국은 일본에 대한 정책에 있어서 먼저 원칙(原則)과 기본(基本)을 설정하지 않으면 않된다. 국민의 대일 감정을 무마하려는 과장된 강경태도(强硬態度)와 무원칙적(無原則的)인 양보(讓步), 영합(迎合)의 교차가 반복되는 한 양국간의 관계는 갈수록 불행하게 발전되어 나갈 것이다.

일본의 경우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날조(捏造)하고 맹목적으로 미화(美化)하므로서 강력하고 위대한 일본의 모습을 강조하려는 국가중심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일본의 자세는 갈수록 일본을 국제적으로 고립화시키며 당연히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 선진국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200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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