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美따라하기가 국제화 아니다
“영어의 전세계 독점을 막기 위한 최종방어선이 무너졌다. 유럽연합(EU)은 프랑스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식회의를 영어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2월 미국 뉴욕에서 발행하는 불어신문(France-Amerique)에 이 같은 기사가 실렸다.
나는 전세계 경제와 문화를 독점하는 미국에 저항하던 프랑스라는 ‘문화 독립군’의 장렬한 최후를 보는 것 같았다. 이는 단순히 프랑스 정치력의 패배가 아니었다. 깊이와 여유가 있는 삶을 중요시하는 유럽 문화의 패배였다. 경제적 성공을 추구하며 오로지 ‘업무형 인간’만을 선호하는 미국 문화를 강력히 저지해온 유럽 문화가 미국 문화와의 한판 결투에서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미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미국 문화과 영어를 주저없이 받아들여왔기 때문이다. ‘패러다임’ ‘프로스펙트’ ‘시너지’ 같은 영어 단어가 일상생활 속에서 남용되어 왔다. 미국의 피터 드러커나 조지 데이 같은 경영·마케팅계 권위자들의 저서가 서점 진열대를 점령하고 있고, 기업들은 미국식 연봉제와 기업구조를 앞다퉈 도입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에서 영어 발음을 잘할 수 있도록 어린 아이들의 혀 아래 힘줄을 잘라내는 수술이 성행하고 있다는 뉴스를 미국에서 접한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또 미국의 대중잡지인 ‘맥심’이 “시청자들의 열기가 사라진 후 가장 오래 버티고 있는 쇼”라고 혹평했던 텔레비전 시트콤 ‘프렌즈’ 가 한국에서 DVD로 불티나게 팔릴 뿐 아니라 3만여명의 회원을 확보한 온라인동호회 모임이 활발하다는 소식에 의아할 뿐이었다.
반미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현실이 더 안타깝다. 나는 미국 미시간주의 공립 중·고교를 졸업했고 뉴욕대 비즈니스 스쿨과 줄리아드 음대 야간과정을 동시에 다니고 있다. 따져보면 누구보다 미국 시스템의 혜택을 보았고, 보고 있다. 또한 미국의 심장부라는 뉴욕의 맨해튼에서 5년 넘게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등 출신 교수들과 학생들에 둘러싸여 살았다. 자연스럽게 세계화의 물결에 빠져들어 미국 문화를 ‘있는 그대로’ 즐기는 데 아무런 저항이 없다.
하지만 미국에서 살고 있는 나보다 더 미국적인 것을 우리 것처럼 받아들이고 동경하는 사람들이 국내에 많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한국인의 사고 습관과 감정처리 방법이 바뀌었다는 신호로 볼 수도 있다. 사고와 감정은 민족이 존립하는 근거이며 민족 주체성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국제화가 미국화는 아닌 것이다. 국제화란 우리보다 앞선 문화 가운데 우리 정서에 가장 적합한 것을 우리 것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무조건적인 ‘강대국 따라하기’가 아닌 것이다. 미국의 현실은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 우리나라의 발전모델로 미국은 절대 적합하지 않다. 자녀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달리 미국인들은 돈을 벌고 인생을 투자하는 목적이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미국인들은 철저히 개인주의자다.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최고로 여긴다. 국가 구성원의 인생 목표가 전혀 다른 것이다. 나는 다만 경제적으로 우리보다 앞섰다고 해서 미국 문화를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에 반대한다. 땅이 크고 자원이 풍부하다고 하지만 미국 문화의 지향점이 우리의 발전방향과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승연/〉2004.4.8.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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