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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옆에 웬 美대사관?

덕수궁 옆에 웬 美대사관?  

덕수궁 옆 주한 미국대사관 및 아파트 신축 공사가 논란의 초점이 되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문화 주권’을 앞세워 저지운동을 벌이고 있고, 미대사관은 강행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민감한 사안을 처리해야 할 서울시장은 당선 직후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가 한 달여 지난 지금 관련 법규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태도를 바꿔 비난을 받고 있다.

▼문화주권-자존심의 상징▼


덕수궁은 원래 경운궁(慶運宮), 또는 명례궁(明禮宮)으로 불렸는데 조선왕조의 궁궐 중에서도 유난히 파란만장한 역사를 갖고 있다. 경운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창덕궁이 소실되자 의주로 피란갔다가 돌아온 선조는 바로 이곳을 궁궐로 삼아 정사(政事)를 보았다. 시설이 부족해 주변에 있던 관료들의 집을 수용해 사용했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중수하고 경덕궁(뒤에 경희궁으로 이름을 고침)을 창건해 주로 창덕궁과 경덕궁을 사용했다. 후궁 소생이었던 광해군은 자기보다 훨씬 젊은 계모 인목대비를 당시 서궁(西宮)으로 불리던 이곳에 유폐했고 그녀의 소생인 어린 동생 영창대군을 살해했다. 이른바 폐모살제(廢母殺弟)로 불리는 이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광해군은 반정의 대상이 되고 폐위되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로부터 옥새를 받기 위해 창덕궁에서 이곳으로 옮겨 왕위에 올랐다. 이후 조선 후기 왕들은 창덕궁과 경희궁을 왕궁으로 사용했고 고종 때에야 폐허로 남아 있던 경복궁을 중건했다. 임진왜란 이후 민생문제에 밀렸던 숙원사업을 이루고 비로소 정궁의 위엄을 되찾았던 것이다.


오래도록 잊혀졌던 경운궁이 역사의 중심 무대로 떠오른 것은 이 땅에 다시 외세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들어왔던 때였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고종이 1896년 러시아대사관으로 피난가는 이른바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1년 후 고종은 러시아 미국 영국 등 외국 공사관들이 밀집해 있던 경운궁으로 환궁해 계속 머무르니 이곳이 정궁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어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이 탄생하면서 경운궁은 명실공히 대한제국의 정궁이 되었다. 황제가 제천의식을 갖는 곳으로 상징성을 갖고 있는 원구단(씝丘壇·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쪽으로 나 있던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삼아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했다. 대한의 ‘한(漢)’자는 은한(銀漢·은하수)의 의미로 하늘을 말한다. 따라서 대한문은 ‘큰 하늘’이라는 뜻이다. 대한제국을 국호로 하고 그 정궁의 정문을 대한문이라 해 격식을 갖추었던 것이다.


경운궁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덕수궁으로 개칭되고 양관(洋館)이 들어서는 등 변화가 계속되면서 그 경역이 줄어들고 오늘날과 같이 고층 빌딩군에 병풍처럼 둘러싸이게 되었다. 1959년 서울시가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정문인 대한문 쪽 담장을 뒤로 밀어낸 후 담장 모퉁이에 세운 태평파출소는 아직 그대로 있다. 우리 손으로 왕궁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덕수궁 주변 기존의 고층 빌딩들은 미 대사관의 현실론을 강화시켜 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 “너희들은 멋대로 고층 빌딩을 지으면서 왜 우리는 안 되는가. 반미감정 아닌가”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빌딩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하겠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런 태도를 잘 말해주고 있다.


옛말에 자중자애(自重自愛)란 말이 있다. 스스로를 무겁게 하고 사랑하는 자만이 남의 존경을 받는다는 말이다. 망국과 전쟁으로 얼룩진 근현대사에서 우리는 자중자애하지를 못했다. 자중자애는커녕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스스로 비하하고 냉소했다. 전통 문화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잣대를 갖고 있었고, 그것은 현재에도 일부에선 진행형이다.


왕궁복원 청사진 만들 때▼


덕수궁 문제는 반미감정도 아니고 문화재법 등 법률의 잣대로만 잴 일도 아니다. 1세기 가까이 일방적으로 주입된 변방 의식에서 탈피해 상처받은 자부심을 회복하고자 하는 국민적 원망의 표출로 보아야 한다.


서울시는 국민의 간절한 희망을 외면하고 현실론에 끌려가는 일이 없도록 심사숙고하기 바란다.


미대사관도 강자의 일방주의보다는 다른 부지를 물색하는 등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덕수궁 복원 청사진을 그리고 그 실천을 위해 국민적 힘을 결집해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정옥자 서울대 교수·국사학·규장각관장

2002.8.5.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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