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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칙령 41호와 시마네현 고시 40호

대한제국 칙령 41호와 시마네현 고시 40호

메이지정부가 수립된 후 대외팽창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당시까지 도항이 금지되어 있었던, 울릉도 독도지역에도 일본인들의 잠입이 시작되었다. 초기 일본인의 잠입은 주로 울릉도 규목(槻木)의 도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의 침입이 조선정부에 의해 확인된 것은 1881년(고종 18) 수토관에 의해 도벌 중이던 일본인 7명이 적발된 사건 때문이었다.

조선정부는 일본 외무성에 항의하는 한편, 부호군 이규원(副護軍 李奎遠)을 검찰사로 임명하여, 울릉도에 파견, 현지 조사를 하게 된다. 울릉도에 고을을 설치할 수 있고, 또 상당수의 일본인들이 도벌을 행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한 조선정부는 당시까지 시행되던 수토정책을 폐기하고, 주민의 이주와 개발정책을 적극 추진하게 된다.

1882년에 울릉도에 거주하고 있던 함양사람 전석규(全錫奎)가 島長에 임명되었고, 1883년에는 개화파의 영수 김옥균이 동남제도개척사 겸 포경등사사(東南諸島開拓使兼捕鯨等事使)에 임명되었고, 이해에 정부에서 모집한 새로운 이주민들이 입도하기 시작하였다.

1883년 4월에 울릉도에 첫 이주민이 들어왔다. 7월 현재 이주민 16가구 54명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江原道鬱陵島新入民戶人口姓名年歲及田土起墾數爻成冊」)

大黃土浦 <태하> : 4가구 16명, 5石지
경상도(1, 安義), 강원도(3, 江陵)

張德來, 연세 72, 본 人同
처 金氏, 연세 59, 본 安東
아들 琦現, 연세 33
둘째아들 琦英, 연세 25
셋째아들 琦良, 연세 6
경상도 安義에서 들어옴. 개간 2石지

金溳泰, 연세 65, 본 江陵
아들 鐸鄕, 연세 37
며느리 李氏, 연세 35
손자 辰燮, 연세 14
둘째손자 在福, 연세 2
강원도 江陵에서 들어옴. 개간 1石지

李回永, 연세 36, 본 平昌
처 朴氏, 연세 36, 본 密陽
아들 仁甲, 연세 14
둘째아들 義甲, 연세 11
강원도 江陵에서 들어옴. 개간 1石지

黃守萬, 연세 24, 본 檜山
처 李氏, 연세 17, 본 平昌
강원도 江陵에서 들어옴. 개간 1石지

谷浦 <남양> : 5가구, 5명, 1.5석 15두락지.
경기도(1), 경상도(4, 善山, 延日, 慶州(2))

裵敬敏, 연세 33, 본 金海
경기도에서 들어옴.

尹果烈, 연세 40, 본 坡平
경상도 善山에서 들어옴. 개간 1石지

卞吉良, 연세 36
경상도 延日에서 들어옴. 개간 半石지

宋景柱, 연세 67, 본 礪山
경상도 慶州에서 들어옴. 개간 5두락지

金成彦, 연세 56, 본 慶州
경상도 慶州에서 들어옴. 개간 10두락지

錐峯 <추산> : 2가구, 8명, 4石지
강원도(1, 蔚珍), 경상도(1, 安東)

田在桓, 연세 33, 본 潭陽
처 朱氏, 연세 34, 본 熊川
아들 時龍, 연세 5
둘째아들 越龍, 연세 3
친족아저씨 旒, 연세 58
친족아우 有桓, 연세 31
率人 裵尙三, 연세 32, 거주지 大邱
강원도 蔚珍에서 들어옴. 개간 3石지

朱晋鉉, 32세, 본 綾城
경상도 安東에서 들어옴. 개간 1石지

玄浦洞 <현포> : 5가구, 24명, 4석 5두락지.
강원도(3, 蔚珍), 충청도(2, 忠州)

鄭直源, 연세 70, 본 延日
아들 雲杓, 연세 31
며느리 및 딸 합 5명
강원도 蔚珍에서 들어옴. 개간 2石지

趙鍾桓, 연세 39, 본 漢陽
충청도 충주에서 들어옴. 개간 5두락지

과부 李氏 母女
충청도 忠州에서 들어옴.

洪景燮, 연세 55, 본 南陽
처 金氏, 연세 55, 본 江陵
아들 在翼, 연세 34
며느리 金氏, 연세 36, 본 黃州
손자 守曾, 연세 5
손녀, 연세 11
둘째손녀, 연세 1
둘째아들 在敬, 연세 20
강원도 江陵에서 들어옴. 개간 1石지

崔在洽, 연세 82, 본 江陵
아들 亨坤, 연세 50
며느리 金氏, 연세 40
손자 河龍, 연세 13
둘째손자 又龍, 연세 7
손녀, 연세 22
둘째아들 桂秀, 연세 44
강원도 江陵에서 들어옴. 개간 1石지

1884년 1월에 도장 전석규가 정부의 허락 없이 미곡을 받고 일본 천수환(天壽丸) 선장에게 삼림 벌채를 허가해주는 증표를 써준 죄목으로 처벌되므로써, 현지인 울릉도장제가 폐지되고, 삼척영장으로 하여금 울릉도첨사를 겸하게 되었고(鬱陵島僉使兼三陟營將), 얼마 후에는 평해군수가 울릉도 첨사를 겸하게 되었다.

이후 1888년에는 울릉도에 도장제를 다시 시행하게 되었는데, 현지인 대신 평해군 월송포에 만호진(萬戶鎭)을 설치하고, 월송진만호로 하여금 울릉도장을 겸임하게 하여 왕래하게 하였다. 월송만호는 대체로 3월에 입도하여 7-8월에 월송만호진으로 돌아갔다. 도장이 나가 있을 때는 현지민 중 도수(島守)를 임명하여 이듬해 3월까지 도장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열강에 의한 이권침탈이 계속 되고 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 하에서, 일본인들의 침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본인들의 목재 밀반출은 계속 되었을 뿐 아니라, 1888년부터는 전복을 채취하는 일본어민들이 울릉도 연안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남벌에 의해 재목이 고갈되어 가는 대신, 울릉도 주변의 어장을 노린 일본어민들의 도항은 차츰 증가되어 갔다. 일본정부의 조사에 의하면, 1900년 전후 울릉도 재류 일본인이 약 200명 정도였는데, 계절적으로 1천명이 넘는 때도 있었다. 이들 일본인들 중에서는 서서히 정주하는 경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堀和生, 一九O五年日本の竹島領土編入,『朝鮮史硏究會論文集』24, 1985)

조선정부는 1895년 다시 전임도장제를 시행했고, 도장의 명칭은 곧 도감(島監)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1900년 5월에는 일본인들의 도벌과 조선인 침어 여부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울릉도시찰위원 우용정(禹用鼎)이 부산주재 일본영사관보(赤塚正補)와 함께 한·일 양국 합동조사단을 구성해서 울릉도로 들어갔다. 그 결과 울릉도의 관제개편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대한제국 內部는 1900년 10월 22일「울릉도를 鬱島로 개칭하고 島監을 郡守로 改正하는 것에 관한 청의서」를 내각회의에 제출하였다. 청의서는 10월 24일 의정부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12월 25일자 칙령 41호 ‘鬱陵島를 鬱島로 改稱하고 島監을 郡守로 改正한 件’을 27일자『관보』에 게시하여 널리 반포하였다. 칙령 41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勅令第四一號
鬱陵島를 鬱島로 改稱고 島監을 郡守로 改正件
第一條 鬱陵島 鬱島라 改稱야 江原道에 附屬고 島監을 郡守로 改正야 官制中에 編入고 郡等은 五等으로 事
第二條 郡廳位置 台霞洞으로 定고 區域은 鬱陵全島와 竹島石島 管轄事
第三條 開國五百四年八月十六日官報中 官廳事項欄內 鬱陵島以下十九字 刪去고 開國 五百五年 勅令第三十六號 第五條 江原道二十六郡의 六字 七字로 改正고 安峽郡下에 鬱島郡三字를 添入事
第四條 經費 五等郡으로 磨鍊호되 現今間인즉 吏額이 未備고 庶事草創기로 該島收 稅中으로 姑先磨鍊事
第五條 未盡諸條 本島開拓을 隨야 次第磨鍊事
附則
第六條 本令은 頒布日로부터 施行事
光武四年十月二十五日
御押 御璽 奉
勅 議政府議政臨時署理贊政內部大臣 李乾夏

이로써, 울릉도-독도 지역은 강원도의 27번째 군으로 대한제국의 정식지방관제에 들어갔다.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으로 하고, 울도군수의 관할구역은 鬱陵全島와 竹島, 石島로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죽도는 댓섬, 석도는 독도를 이름이다. 현임도감 배계주가 초대군수가 되었으며, 울릉군은 남면과 북면으로 나누어져 독도는 울릉군 남면에 속하게 된다.

울릉도에는 인구가 꾸준히 증가했다. 초기 이주민들이 정착한 곳은 태하, 남양, 평리, 본천부, 현포, 나리, 추산 등지였다. 이곳은 비교적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고, 하천이 흐르고 있어 식수를 구하고 농사를 짓기 유리한 곳이었다. 이주민들은 막을 짓고 울창한 나무를 베어낸 후 화전을 일구는 등 농토를 개간하였다. 정착할 여건이 마련되면 투막집을 지었다.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고, 결혼으로 가족이 불어나 사람들은 차츰 저동과 사동쪽으로 퍼져 나갔고 새로운 마을들이 계속 생겨났다. 1896년에는 11洞(저포동, 도동, 사동, 장흥동, 남양동, 현포동, 태하동, 신촌동, 광암동, 천부동, 나리동) 277가구, 1134명(남 662, 여 472)으로 불어나 있었고, 1900년 우용정의 조사 당시에는 400여가구 1700명으로 되어 있다.

일본정부가 독도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 되면서부터였다. 블라디보스톡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극동함대가 남하 하여 일본군의 수송로를 위협하자,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고 해전전선을 부설한다.

1904년 9월 29일 오키섬 사이고마치(西鄕町)의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는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하고, 자신에게 빌려달라”는「리앙꼬島領土編入並貸下願」을 일본 외무성, 내무성, 농상무성에 제출한다.

일본정부는 같은 해 9월 24일 독도에 망루설치가 가능한지 조사하기 위해 일본군함 新高를 파견하였다. 新高號는 독도에 대해 “리앙꼬루도岩은 韓人은 이를 獨島라고 書하고 本邦 漁夫들은 양고島라고 호칭”하며, 망루설치가 가능하다고 보고하였다. 또, 11월 20일에는 독도가 한일간을 연결하는 해저전선의 중계지로 電信所 설치에 적합한지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군함 對馬가 독도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28일 일본 내각은 ‘독도는 주인 없는 무인도(無主島)로서, 일본인 나카이 요사부로에 의해 실효적 경영이 있었으니, 지금부터 다케시마(竹島)로 칭하고, 일본 島根縣 隱岐島司의 관할 하에 둔다”고 결정하였다.

위 일본 정부의 결정은 국제법상 선점론(先占論)에 근거를 둔 것인데, 독도는 당시 울릉도의 부속도로 대한제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선점에 의한 영토편입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 일본정부도 그 점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다. 나카이의 청원서가 제출되었을 때 일본 내무성이 이에 반대했던 것도 ‘대한제국의 영토라고 의심되는 섬’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섬을 대한제국에 조회도 해보지 않고, 짧은 시간에 일방적으로 결정했다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며, 소위 근대법의 탈을 쓴 침탈이었다.

일본정부는 시마네현에 훈령을 내려 2월 22일 독도영토편입에 관한 대외공표로 소위 「시마네현(島根縣)고시 40호」를 고시하게 한다. 그런데, 이 고시는 실제 어떻게 고시되었는지 고시로서의 실체가 없는 고시이다. 당시 일본관보에도 게재되지 않았고, 신문에도 고시되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는 러일전쟁의 목적이었다. 일본의 독도영토편입은 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비밀리에 진행된 것이며, 침탈 대상지 중 일부를 우선 점령한 것이다.

일본은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했다는 사실을 1906년 3월 28일 울도군수 심흥택(沈興澤)에게 알려 온다. 심흥택은 다음날 강원도 관찰사 서리 춘천군수 이명래(李明來)에게 “본군소속 독도 …”로 시작되는 긴급 보고서를 올린다. 이명래를 통해 이 보고서를 접한 중앙정부 역시 그 사실에 아연실색하고, 정확한 정황을 살펴보라는 지령을 하달한다. 그러나, 당시는 통감부의 이사청이 업무를 개시(1906년 2월 1일)했을 뿐 아니라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정식으로 취임(3월 2일)한 이후로, 대한제국은 이미 식민지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일본은 현재 “독도가 만약 대한제국의 영토였다면, 독도가 일본영토로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알린 1906년 당시 대한제국이 이에 대해 일본정부에 항의를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라고 묻고 있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도 뻔뻔스러운 트집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당시 대한제국은 외교권은 물론이고 내정까지 일본에게 내어준 실질적인 식민지 상태에 있었다. 일본인 통감 스스로 본국 정부에 항의를 하지 않는 이상, 대한제국이 일본정부에 직접적인 조치를 취할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 대한제국의 입장은 분명하고, 단호한 것이었다. 울도군수가 자신의 관할임을 분명히 밝힌 보고서를 올렸고, 중앙정부(참정대신)가 “일본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일”이라며 보다 상세한 조사를 명령한 것은 위에서 말했다. 그런데, 정부뿐 아니라 언론은 언론대로, 지식인들은 지식인들대로 격분해 이 사실을 널리 알리려 노력했다. 「황성신문(皇城新聞)」은 심흥택 군수의 보고서 전문을 기사로 실어면서 ‘울도군수가 내부에 보고했다’는 제목을 4배 정도 크게 했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無變不有’ 즉, ‘변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제목 하에 심흥택 군수가 보고한 사실과, 중앙정부(내부)가 “전혀 이치에 맞지 않으니 심히 아연한 일”이라 지령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지식인들은 지식인들대로 일본의 독도침탈 기도에 대해 분노했다. 구한말의 대표적 지식인 중 한 사람인 황현은 그의 저서 『오하기문(梧下記聞)』과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각각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울릉도 100리 밖에 속도가 하나 있어 독도라고 부르는데, 일본인들이 지금 일본영지가 되었다 하며, 심사하여 갔다(鬱陵島百里外 有一屬島 曰獨島 倭人稱今爲日本領地 審査以去)”

“울릉도에서 동쪽 바다로 100리 떨어진 곳에 섬이 하나 있는데, 독도라 한다. 오래 전부터 울릉도에 속해 있었는데, 일본이 그들의 영지라 억지 칭하고, 심사하여 돌아갔다(距鬱陵島洋東百里 有一島 曰獨島 舊屬鬱陵島 倭人勒稱其領地 審査以去)”.

이처럼, 1905-6년 일본이 독도침탈을 시도할 당시 대한제국은 독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또 정부 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로 울릉도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섬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독도침탈시도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1900년 울도군을 설치할 때 그 영역 속에 명시되었던 石島가 독도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며, 조선후기 이래 구한말까지 작성된 많은 지도에 표기된 우산도가 바로 독도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의 독도침탈 시도에 대한 위와 같은 반응, 중앙과 지방, 관과 민을 막론한 전 국가적 반응은 오랜 역사적 경험의 축적 없이 평지돌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천수백년 동안의 독도영유에 대한 일관된 의식은 멸망하기 직전 대한제국의 마지막 대규모 편찬사업이었던 증보문헌비고(1908년)에서 ‘울릉도와 독도는 옛 우산국의 땅으로, 우리의 영토’라는 기록으로 남게되는 것이다.

1910년 한국강점으로 독도에 대한 지배권을 비로소 확보한 일제 역시 독도영토편입이 대한제국의 땅을 강탈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일제가 한창 영역을 확장해 나가던 1936년, 일본 합동참모본부 산하 육지측량부는 지도구역일람도(陸地測量部發行地圖區域一覽圖)를 만든다. 당시 가장 정확한 공신력을 자랑하던 이 지도에서 독도는 竹島로 표기되어 있는데, 원래 대한제국의 영토로 일본이 메이지정부 수립 후 획득한 지역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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