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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3월 05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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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정부 수립 후 일본의 독도인식

메이지정부 수립 후 일본의 독도인식

메이지정부 수립 후 일본의 대외정책은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데, 에도시대의 쇄국정책 대신 해외팽창으로 가닥을 잡아가는 것이 변화의 큰 줄기였다. 메이지정부는 조선의 식민지화를 위해 조선에 대한 정보 수집, 축적에 열을 올리게 된다. 일본 국내에 흩어져 있는 조선에 관한 자료들이 모아졌고, 서양세력들이 축적해 놓은 정보들이 입수되었으며, 또한 밀정이 파견되어 조선 현지를 염탐하게 된다. 조선에 대한 조사 항목에는 울릉도 독도 해역에 대한 정보도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1690년대 안용복의 활동으로 인해 도해가 엄격히 금지된 후, 이 지역에 대한 정보가 차츰 어두워져, 메이지정부 초기에는 섬의 명칭, 위치, 형태에 대해 혼란에 빠지기도 했지만, 침탈을 위한 정보의 축적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은 점차 명확해져 갔다. 제국주의 일본의 단초를 마련한 메이지정부에서도 독도는 조선의 영토가 확실한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이 섬들을 바라보는 메이지정부의 시각은 침탈해야 할 조선의 영토였다.

1868년 메이지정부가 수립된 이후 일본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된다. 신정부에서는 조선과의 외교관계 재설정과 조선정벌의 가능성을 탐지하기 위해서 1869년 11월(음) 외무성관리들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한다. 이후 메이지정부의 일련의 움직임 속에서 신정부 수립 후 일본정부의 독도 인식을 엿볼 수 있다.

1870년 초 조선에 파견된 일본외무성 관리들은 귀국하여 4월(음) 지시받은 조사사항에 따라 내탐(內探)한 복명서를 제출한다. 이것이「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이다. 그런데 여기에 기재된 조사사항 중에는 ‘죽도와 송도가 조선의 영토로 부속하게 된 시말(竹島松島朝鮮附屬ニ相成候始末)’을 조사한 항목이 있다. 여기서 에도시대 이후로 그들의 전통적인 호칭으로서 죽도는 울릉도, 송도는 독도를 가리킨다.

이 복명서에는 송도 즉 독도에 대해서 “죽도의 이웃 섬으로 지금까지 게재된 서류도 없다(松島ハ竹島ノ隣島ニチ松島ノ儀ニ付是迄揭載セシ書留モ無之).”고 되어 있다. 그리고, 울릉도에 대해서는 “(안용복 사건이 있었던) 원록 연간에 잠시 조선으로부터 거류를 위해 사람을 보낸 적이 있는데, 지금은 당시(원록 연간) 이전과 같이 사람이 없었다.”고 하고, 울릉도의 산물로 대나무, 갈대, 인삼, 해산물 등을 들었다.

메이지초기 일본정부는 송도(독도)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지만, ‘송도가 죽도의 이웃 섬’ 즉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라는 사실은 알아냈다. 그들이 송도 즉, 죽도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은, 독도를 울릉도로 가는 이정표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지, 조그만 돌섬인 독도를 그 자체의 가치를 가지고 파악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독도는 오끼섬의 이웃 섬이 아니라, 조선의 영토 죽도(울릉도)의 근처에 있는 무인의 작은 돌섬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 조사는 죽도와 송도가 조선의 부속령이 된 시말을 조사하라는 지령에 따라 행한 것으로, 결국, 메이지정부는 독도가 울릉도에 딸려 있는 조선의 영토라는 점을 재확인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관계의 파악을 넘어서서, 적극적인 조선정벌을 건의한다. 조선침략을 위해서는 조선에 대한 정확한 지리적 정보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 과제임은 당연하다. 조선에 대한 침략은 당장 실행되지 않았지만, 침략을 위한 준비는 꾸준히 진행된다.

정한론을 계기로 조선지도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며, 침략주의는 에도시대 교양도서로서 요구되던 조선지도가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정보로서 조선지도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메이지초기에는 조선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했다. 정한론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료로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반출된 자료들과 막부 시대에 이를 다시 출판한 것들, 그리고 계속해서 조선과 관계를 유지하던 대마도 宗氏네의 자료, 그리고 부산 倭館의 일본인들이 수집한 자료들이 있었다. 이런 자료들이 활용되어 지도가 만들어 지고, 소책자가 만들어 졌다.
그리고, 자체의 정보가 부족한 일본으로서는 서양의 정보를 적극 활용했는데, 이것은 당시 만연한 아시아에서 벗어나 유럽을 지향한다는 脫亞入歐의 분위기에서도 기인한 바 크다. 유럽자료에 대한 무비판적 의존은 잘못된 정보를 믿는 시행착오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메이지 초기에는 다양한 형태의 조선지도가 만들어 진다. (박현수,「日本의 朝鮮地圖와 植民主義」(『영남대박물관 소장 한국의 옛 지도(자료편)』, 영남대학교 박물관, 1998) 참조)

1873년 일본 해군수로료(海軍水路寮)는「조선전도(朝鮮全圖)」를 만든다. 이 지도는 조선에서 제작된 지도를 모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이 사용하던 호칭인 죽도(竹島)와 송도(松島)가 아니라, 조선식의 우산도(亏山島)와 울도(蔚島)로 적혀 있다. 우산도는 강원도에 가깝게 또 크게 그려져 있어, 이 섬이 울릉도를 그린 것이며, 그 오른쪽에 작게 그려진 울도가 독도를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지도는 평안도와 함경도가 축소되어 있는 등 전체적으로 왜곡되어 있다. 하지만,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파악한 것은 명확히 드러난다고 하겠다.

일본 군부는 조선에서 제작된 지도와 서양인들이 작성한 조선 안내서의 한계를 간파하고 스스로의 근대적 기술을 동원하여 독자적인 자료들을 축적하게 되었다. 일본 육군참모국에 의해서 1875년 연말에 작성되어 이듬해 초에 간행된「조선전도(朝鮮全圖)」는 일본이 조선해안 측량과 밀정들의 조사결과를 가지고 스스로 제작한 최초의 지도로서, 당시까지의 지도와는 비교되지 않는 정확한 것이었다.(박현수, 위의 논문(1998) 참조)

이 지도에서 강원도 동쪽에 울릉도, 독도가 다케시마(竹島)와 마츠시마(松島)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위치와 모양으로 볼 때 송도는 울릉도에 해당하며, 그 왼쪽에 선으로만 그려져 있는 죽도는 가공의 섬 아르고노트에 해당한다. 지도가 이렇게 된 데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1787년과 1797년 프랑스와 영국은 각기 울릉도를 발견하고 다줄레와 아르고노트로 명명하게 된다. 그런데, 프랑스에 비해서 영국은 현저히 서쪽에 좌표를 찍게 되어 아르고노트는 실재 섬이 없는 바다 위에 그려지게 된다. 서양의 문물을 무비판적으로 급히 수입하고 있던 당시 일본은 조선에 가까운 아르고노트를 죽도(울릉도), 보다 일본에 가까운 다줄레를 송도(독도)에 비정하게 된다. 이후 1854년 러시아의 조선동해안 실측 등을 통해 아르고노트가 실재하지 않는 섬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면서, 아르고노트는 해도상에서 점선으로 표시되거나 아예 삭제되는 등 점차 사라지게 된다. 한편, 1849년 프랑스 포경선 리앙꼬르가 독도를 발견하게 되자, 서양의 해도에는 한때 아르고노트, 다줄레, 리앙꼬르 3개의 섬이 그려지게 된다. 이런 지도의 영향을 받은 일본 지도에는 역시 죽도, 송도, 리앙코루도 3개의 섬이 그려진다(「大日本國沿海略圖」(勝海舟, 1867),「大日本四神全圖」(橋本玉蘭, 1870)).

위 참모국의「조선전도」는 울릉도, 독도를 그리는데 서양의 정보를 이용하는 과정에 죽도와 송도의 위치와 형태를 잘못 그리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르고노트와 다줄레를 받아 들여 죽도와 송도로 비정할 때, 기준이 된 것이, 정확한 경위도상의 위치나, 섬의 형태가 아니라 ‘조선의 섬 죽도(竹島-울릉도), 송도(松島-독도)가 강원도 바깥 큰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데, 두 섬 중 조선쪽에 가까운 것은 죽도이고, 일본쪽에 가까운 것은 송도’라는 전통적 인식이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지도상의 송도가 실재로는 그들이 알고 있던 독도가 아니고, 울릉도 곧 그들이 전통적으로 죽도라고 호칭하던 섬이었음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은 1880년 일본 군함 아마기(天城)가 울릉도를 실측했을 때였다. 따라서 위 참모국의「조선전도」에 그려진 죽도와 송도는 비록 위치와 형태가 틀렸다 하더라도 울릉도와 독도를 그려 넣은 것은 확실하다.

육군 참모국이「조선전도」를 간행한 1876년 일본 해군수로료(海軍水路寮)는「조선동해안도(朝鮮東海岸圖)」를 만든다. 조선동해안이 상세히 그려진 이 지도는 러시아가 1857년 간행한 「조선동해안도」를 번안하고, 1860년 시르계프 대령이 그린 각기 다른 세 방향과 거리에서 본 독도모습과 블라디보스톡만을 추가하여 만든 것이다. 러시아는 1854년 서양세력으로는 처음으로 한반도 동쪽 연안과 부속도서를 실측했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1857년 아르고노트를 삭제시키고, 독도를 올리부차(서도), 메넬라이(동도)로 표기한 조선동해안도를 만들어 냈다. 일본 육군 참모국과 마찬가지로 당시 최고의 공신력을 가지고 있던 해군 수로료에서 만든 이 조선동해안도에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동해안에 있는 부속도서로 그려진 것이다.

한편, 1876년 10월 일본 내무성 지리료(地理寮)에서는 지적(地籍) 편찬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시마네현에 同縣의 앞 바다에 있는 ‘죽도(竹島)’라는 섬의 정보를 조회하였다. 시마네현 당국은 17세기의 오오타니(大谷)·무라카와(村川) 양가에 의한 죽도(竹島, 울릉도) 도해와 어로의 경위를 조사하고 죽도와 송도(松島, 독도)의 약도를 첨부,「日本海內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를 내무성에 제출하였다. 시마네현 당국은 송도를 죽도의 屬島로 이해한 까닭에 일괄하여 취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첨부한 문서에 一島가 송도임을 밝혀 놓았다. 내무성은 독자적으로 元祿期의「竹島一件」의 기록(안용복사건)을 조사하고, 시마네현의「伺」의 정보와 아울러 검토한 결과 이 두 섬은 조선령이며, 일본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판도의 취사는 중대한 사건’인 까닭에 내무성은 이듬해인 1877년 3월 17일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太政官)에게「日本海內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를 제출하여 그 판단을 보류하였다. 부속서류 중에서 ‘外一島’라는 것이 松島(독도)임이 명기되고 그 위치와 형상도 바르게 기술되어 있었다.(堀 和生, 一九O五年日本の竹島領土編入,『朝鮮史硏究會論文集』24, 1985)

太政官 調査局의 심사에서는 내무성의 견해가 인정되어 ‘죽도와 송도 즉,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는 상관없는 땅임을 心得하라’는 태정관의 지령안이 기초되었고, 右大臣 岩倉具視, 參議 大隈重信 寺島宗則 大木喬任 등에 의하여 승인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3월 29일 정식으로 내무성에 지령되었다. 즉, 당시 일본의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은 시마네현과 내무성이 상신하여 온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셋트로 하는 인식에 기초하여 두 섬이 일본령이 아니라고 공적으로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 지령은 4월 9일 부로 내무성에서 시마네현에 전하여져 현지에서도 이 문제가 마무리 되었던 것이다. (堀和生, 一九O五年日本の竹島領土編入,『朝鮮史硏究會論文集』24, 1985)

1876년에는 일본 외무성에 일본인 武藤平學(武藤一學)의 ‘松島開拓之議’라는 건의서가 제출된다. 이 사람은 무쯔(陸奧) 출신으로 “1873년에서 1874년 사이 업무상 나가사키와 블라디보스톡 사이를 수차례 왕복하였고, 그 도중 송도라는 섬을 멀리서 바라보았으며, 섬 안에는 주민이 없고, 자연산물이 풍부하다는 것을 듣고는, 블라디보스톡 주재 일본인 瀨脇 무역사무관을 통해 이 섬의 개척원을 출원했다”고 되어 있다. 이 건의서에는 “송도와 죽도는 다같이 일본과 조선과의 사이에 있으나 죽도는 조선에 가깝고, 송도는 일본에 가깝습니다.”, “본도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여 항상 짙푸름을 나타내고 있으며 광산도 있다고 합니다” 고 하고는, 나무를 벌채하고 광산을 개발하며 등대를 설치하자고 하고 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여기서 송도는 그들이 전통적으로 가리키던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였다.

무등평학은 죽도와 송도가 각각 어떤 섬인지 몰랐다. 그는 울릉도를 몇 차례 지나면서 멀리서 숲이 우거져 있는 것을 보았고, 블라디보스톡에서 미국인 코페르를 만나 “일본의 속도에 송도라고 하는 섬이 있는데 일본이 아직 개발에 착수하지 않았다”, “송도에 광산이 있다” 등의 말을 들은 것이다. 그리고, 죽도는 조선쪽에 송도는 일본쪽에 있다는 고래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잘못 그려진 지도상에 표기된 다줄레-송도가 바로 자신이 본 섬으로 (죽도와는 달리)일본인의 개척이 가능한 곳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것은 미국인 코페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해역에 대한 무지는 일본 외무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송도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한 일본 외무성은 무등평학의 건의서가 접수된 후 송도가 죽도와 같은 섬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두 개의 섬인지 여러 설이 분분한 가운데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1880년 일본 군함 아마기(天城)호가 현지를 측량하였고, 무등평학이 말한 송도는 곧 조선의 울릉도임을 알게 되었다. 개척의 건의가 허락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무등평학의 건의서가 제출된 다음 해인 1877년에는 시마네현 士族 戶田敬義의 ‘竹島渡海之願’이 동경부 지사 앞으로 제출되었다. 죽도 즉, 울릉도를 일본의 부속섬으로 개발하고 싶으니 도해면허를 내달라는 것이다. 위의 무등평학과는 달리 호전경의는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과거 죽도도해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고(청원서에는 그가 동경으로 이사하기 전 그 집에는 ‘竹島渡海記’라는 소책자도 전해져 왔다고 되어 있다), 그 때문에 일본 고래의 지식에 의거해 울릉도를 전통적인 호칭 죽도로 불렀던 것이다. 아무튼 그 역시 울릉도에 대해 정확한 지식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이 죽도라는 호칭은 고래로 조선땅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그곳은 도해가 엄격히 금지되었던 곳이기 때문에 이 청원은 중앙정부에 조회되지도 않은 채 기각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당시 사찬 지도에도 반영되어 있다. 1878년 야마무라(山村淸助)가 그린 「대일본분견신도(大日本分見新圖)」는 일본과 조선을 색깔을 달리해 국경을 표시했다. 동해상에 죽도가 하나, 송도가 두 개 그려져 있는데 모두 조선의 색깔로 칠해져 있다. 1882년 기무라(木村文造)가 그린 「동판조선국전도(銅版朝鮮國全圖)」 역시 일본은 붉은 색, 조선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동해상에 그려진 죽도와 송도 즉, 울릉도와 독도는 모두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19세기 서세동점 시대 일본이 서양세력의 잘못된 정보에 의해 섬의 위치와 명칭에 혼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일본이 이 해역에 대한 지식이 어두웠던 것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던 것이지, 그 책임이 오직 서양의 잘못된 정보에 기인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럼, 일본이 이 해역에 대해 무지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가? 이 해역이 일본인이 자유롭게 갈 수 없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조선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1868년 메이지정부 수립은 곧 제국주의로 가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의 개항과 근대화 자체가 서양세력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후 일본은 서양세력과의 불평등한 관계를 개선해 가는 한편, 이웃나라를 열심히 침탈해, 타국의 식민지가 되는가, 타국을 식민지배 하는 국가가 되는가의 백척간두의 위기를 넘겨갔다. 이러한 측면에서 메이지정부수립 직후부터 征韓論으로 대두된 조선정벌은 너무나 절실한 과제였다. 침탈을 준비해 가는 과정에서 일본 국내에 흩어져 있는 조선에 관한 자료들을 모으고, 서양세력들이 축적해 놓은 정보들을 입수, 정리하는 한편, 밀정을 파견하여 현지를 염탐하는 등 조선에 대한 정보를 꾸준히 축적해 나갔다. 울릉도·독도 해역에 대한 정보도 조사 대상이었음은 물론이었다.

일본은 이 지역에 대한 정보에 어두웠지만, 침탈을 위한 정보의 축적과정에서 울릉도-독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은 점차 명확해져 갔다. 제국주의 일본의 단초를 마련한 메이지정부에서도 독도는 조선의 영토가 확실한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 섬들을 바라보는 메이지정부의 시각은 침탈해야 할 조선 영토의 일부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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