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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의 확립과 우산국의 來朝, 그리고 여진족의 침입

고려왕조의 확립과 우산국의 來朝, 그리고 여진족의 침입

울릉도와 독도는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우리의 영토였다. 고려 태조 13년(930), 후삼국의 주도권이 고려로 넘어가자 우산국은 왕건을 찾아와 충성을 맹세하고 방물(方物)을 바쳤다. 고려가 새로운 통일왕조로 등장한 후 우산국은 고려 중앙정부로부터 우산국(于山國) 혹은 우릉성(羽陵城)으로 불리면서, 고려의 외곽 방어선 역할을 수행하며 계속 발전해 갔다.

의종 11년(1157)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 김유립(金柔立)이 우릉도(羽陵島)를 조사했을 당시에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지만 ‘석불(石佛), 철종(鐵鍾), 석탑(石塔)’ 등이 있었다. 이것은 적어도 11세기초 여진족의 침입으로 인해 이 지역이 황폐화하기 이전까지는 본토와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수준 높은 문화를 영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산국은 대체로 고려전기 현종대 이후 급격히 쇠퇴하였다. 결정적인 요인은 위에서 말한 동북 여진족의 침입이었다. 우산국이 여진족의 대대적인 침입을 받은 것은 현종 9년경으로 추측된다. 고려는 즉시 우산국에 농기구를 보냈으며, 다음 해(현종 10년, 1019)에는 여진족 침입 때 본토로 도망쳐 나왔던 우산국 사람들을 돌아가게 하여 섬의 피해복구를 돕게 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산국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던 듯 하며, 이에 현종 13년(1022)에는 본토에 피난했던 우산국 사람들을 예주(禮州-지금의 영해지역, 혹은 당시 평해 영덕 영양 등지를 관할하는 지방행정 조직체 防禦使 禮州의 管內)에 정착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고려사에는 그로부터 10년 후인 덕종 원년(1032) “우릉성주가 아들 부어잉다랑을 보내어 토물을 바쳤다(羽陵城主 遣子夫於仍多郞 來獻土物)”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우산국의 피폐가 어느 정도 복구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진족의 대규모 침입 후 본토로의 이주는 계속되었던 듯 하며, 이후 우산국의 번성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여진족의 침입이후 약 100여년이 지난 인종 19년(1141)에는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 이양실(李陽實)이, 의종 11년(1157)에는 명주도 감창사 김유립(金柔立)이 울릉도에 주민 이주와 관부설치가 가능한 지를 조사하였다. 결과는 이상하고 진귀한 나무와 과일, 그리고 불교문화의 흔적 등을 발견하였지만, 주민이 살기에는 부적당하다는 것이었다. 그 후 1170년(의종 24)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이후 계속된 국내외 정세의 불안과 1231년(고종 18)부터 시작된 몽고의 침공으로 인해 옛 우산국 혹은 우릉성지역에 대한 재개발은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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