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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3월 05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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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속의 독도 인식 1

우리 역사속의 독도 인식 1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에 이루어진 이 신라의 우산국 정벌로 울릉도와 독도는 한국의 영토가 되어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권에 본격적으로 편입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은 신라가 정벌했다고 하는 우산국은 울릉도만을 의미하지 독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고대 우산국의 영역은 어디까지였을까? 그리고, 우산국이 신라에 복속 된 후 한국의 역사 속에서 독도는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는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우선, 울릉도와 독도의 지리적 관계를 살펴보자. 독도문제에 관한 일본의 대표적 연구자였고, 외교문서 작성에 관여했던 가와카미 겐조(川上健三)는 1966년 그의 저서 「竹島の歷史地理學的 硏究」에서 “울릉도에서 독도를 섬으로 식별할 수 있으려면 200미터 이상 올라가야 가능한데, 울릉도는 옛날에는 밀림으로 뒤덮여 있었으므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자체가 곤란했을 것이며, 올라간다 하더라도 독도를 바라볼 수 있는 시계를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고, 또 울릉도-독도 해역에는 한난류의 교차로 안개가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독도를 바라볼 수 있는 쾌청한 날씨는 극히 한정되어 있었을 것”이라 하였다.

또한, “울릉도가 공도화(空島化) 되기 전인 신라나 고려시대에도 각종 산물이 풍부한 울릉도에서 조건이 훨씬 좋지 못하고, 사람이 상주할 수도 없는 독도에 사람이 갈 필요성은 없었던 것이기 때문에, 한국인이 옛부터 독도를 인지해왔음을 시사하는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인이 독도의 존재를 알았다고 확실히 추정할 수 있는 시기는 일본인에게 고용되어 독도로 출어하게 되었고, 또 일본인의 지도에 의해 울릉도의 앞바다 쪽에서 어업을 영위하게 된 후의 일로서 그 시기는 1904년 이후”라고 주장했다(川上健三, 「竹島の歷史地理學的硏究」(1966, 동경 古今書院), 274-283쪽).

하지만, 이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빠져 버린 박제화된 논리로 극히 비상식적인 주장이다. 사람의 역사는 사고하고, 경제행위를 하는, 살아 숨쉬는 사람의 역사이다. 이미 지적되었듯이 1694년의 장한상(張漢相) 등 며칠동안 울릉도를 탐사한 사람들도 울릉도에서 독도를 명확히 인지할 수 있었는데, 천년이란 오랜 세월을 울릉도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 성인봉의 120미터 지점, 또 바다로 20리만 나가면 보이는 독도를 몰랐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김병렬, 「독도냐 다께시마냐」(1997, 다다미디어), 160-162, 353-354쪽. 한편, 임영정은 울릉도의 해발 120미터지점에서 독도를 촬영했다). 울릉도에서는 누구나 경험할 수 있듯이 맑은 날 육안으로 독도를 볼 수 있으며, 바다로 조금만 나가면 울릉도와 독도를 동시에 볼 수 있다. 독도에 도착해서 뒤를 돌아보면 울릉도는 뒷산만큼 크게 보인다.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망망한 바다 어디에서 고기를 잡아야 하는지 표식이 필요하다. 이를 가늠이라 한다. 울릉도에서 먼 바다에 눈으로 볼 수 있는 섬은 독도밖에 없다. 독도는 중요한 가늠이 된다. 가와카미도 언급했듯이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로 올라 갈수록 항해에 있어 목표물이 육안으로 보이는지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川上健三, 위 책, 279쪽). 울릉도와 독도는 서로 잘 보인다. 울릉도는 바다로 나간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본거지이며, 독도는 바다로 나간 사람들에게 중요한 가늠이 되었다. 과거 일본인들에게 있어 독도는 울릉도를 가기 위한 이정표 정도였지만, 울릉도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독도가 하나의 생활권이었다. 해양왕국 우산국의 영역에 독도가 포함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더구나 고대의 항해술은 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발달되어 있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울릉도와 분리해서 독도가 따로 언급되지 않는 것은, 독도를 우산국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는 부속도로 파악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史書에 독도가 별도로 언급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다. 해양왕국 우산국을 이야기하며, 사람이 거주하고, 물산이 풍부한 본 섬 울릉도를 언급하면 족한 것으로, 우산국의 영역에서 벗어나지도 않는 독도를 별도로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는 울릉도 주위의 댓섬 등을 별도로 언급하지 않은 것과 같다. 더구나 독도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작은 돌섬에 불과하다.

이후 고려시대에도 이러한 인식은 계속 이어졌던 것 같다. 「고려사」를 살펴보면 우릉도(芋陵島, 羽陵島), 우산국(于山國), 우릉성(羽陵城), 울릉도(蔚陵島, 鬱陵島), 무릉도(武陵島) 등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여기서도 독도를 굳이 분리해서 표현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복속된 우산국의 명칭이 그대로 쓰이기도 하고, 또 울릉도 한 섬의 명칭으로 우산국을 칭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사」에서 우산국이라는 표현은 고려 현종 10년(1019) 여진족의 침입으로 우산국이 와해되었을 때와, 현종 13년(1022) 본토로 도망 온 사람들을 정착시켰을 당시 기록에 나타나며,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다. 우릉성이라는 표현도 고려 덕종 원년(1032)이 지나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에는 國이나 城이 아닌 島라는 표현만 나타난다. 여진족의 침입으로 우산국이 와해되었고, 우산국민들이 흩어졌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옛 우산국을 더 이상 정치 혹은 군사집단(김윤곤은 신라와 고려전기에 걸쳐 우산국은 동쪽 해상의 외곽방어를 담당했던 군사집단으로 존재했다고 파악하였다.(김윤곤,「于山國과 신라·고려의 관계」, 『울릉도·독도의 종합적 연구』,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8))이 아닌 단순한 섬으로 파악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우산국이 와해된 11세기 중반 이후 울릉도-독도 지역은 우산국이라는 매개체가 사라져, 고려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파악이 필요한 곳이 되었다. 고려의 관원이 파견되고, 원간섭기 울릉도의 벌목작업 등을 거치면서, 고려 중앙정부의 독도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져 갔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고려 중앙정부의 입장에서는 독도는 아직 고유한 명칭을 갖지 않은 채 옛 우산국의 영토로서 本島 울릉도에 딸린 하나의 屬島로서만 파악되었던 듯 하며, 그 지리적 정보도 모호했던 듯 하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왕조로 이어지는데, 태종 12년(1412) 강원도 관찰사가 보고하기를 “유산국도(流山國島) 사람 백가물(百加勿) 등 12명이 고성(高城) 어라진(於羅津)에 와서 정박하여 말하기를,‘우리들은 무릉도(武陵島)에서 생장하였는데, 그 섬 안의 인호(人戶)가 11호이고, 남녀가 모두 60여 명인데, 지금은 본도(本島)로 옮겨 와 살고 있습니다. 이 섬이 동에서 서까지 남에서 북까지가 모두 2식(息) 거리이고, 둘레가 8식(息) 거리입니다. 우마(牛馬)와 논이 없으나, 오직 콩 한 말만 심으면 20석 혹은 30석이 나고, 보리 1석을 심으면 50여 석이 납니다. 대(竹)가 큰 서까래 같고, 해착(海錯)과 과목(果木)이 모두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도망하여 갈까 염려하여, 아직 통주(通州)․고성(高城)․간성(杆城)에 나누어 두었습니다.󰡓하므로, 태종은 의정부에 유산국도민의 처리 방안을 의논하게 하였다.(『태종실록』권23, 태종 12년 4월 己巳條)

위 기록에서 백가물 등이 말한 本島 즉, 유산국도는 바로 울릉도를 말한 것으로 봐야 한다. 조선초에 중앙정부에서 울릉도는 무릉도로 불려 지고 있었다. 그러나, 위 기록에서의 무릉도는 오늘날의 댓섬(죽도) 정도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울릉도 현지민들에게 主島 울릉도는 아직 우산국도 즉 ‘우산국의 섬’ 혹은 ‘우산국섬’이라고 인식되고 있었으며, 본토에서 울릉도를 호칭했던 무릉도가 于山國島 혹은 于山島라는 호칭과 혼용되거나, 주위의 작은 섬의 명칭으로 사용될 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이는 고려중기 이래로 계속된 인식의 변화, 즉 우산국의 무릉도 혹은 우산도로의 변화과정 속에 나타난 과도기적 상황을 말해 주는 것이다.

태종 16년에는 삼척사람으로 만호(萬戶)를 지낸 김인우(金麟雨)가 무릉 등지의 안무사(武陵等處安撫使)로 임명되는데, 김인우는 이듬 해 2월 토산물(土産物)과 함께, 섬의 거주민 3명을 데리고 왔으며, 섬에는 15호, 남녀 86명이 있다고 보고했는데, 실록에는 김인우가 ‘于山島’에서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태종실록』권32, 태종 16년 9월 庚寅條, 권33, 태종17년 2월 壬戌條)
여기서 ‘무릉등처’라는 것은 옛 우산국 지역인 무릉도 등 모든 섬을 말하는 것이고, ‘우산도’라는 것은 옛 우산국을 하나의 섬으로 표현한 것이다.

태종 17년 2월에는 우산 무릉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육지로 옮기고, 섬을 비우는 쇄출정책(울릉도-독도에 대한 海禁政策)을 확정짓게 된다.(『태종실록』권33, 태종 17년 2월 乙丑條) 그리고, 세종 7년 10월에는 김인우가 우산무릉등지의 안무사(于山武陵等處安撫使)로 파견되어, 주민 20명을 데리고 나왔다.(『세종실록』권30, 세종 7년 10월 乙酉條) 이 ‘우산무릉등처’를 ‘우산 지방의 무릉도 등 모든 섬(김병렬, 위 책(1997). 165쪽)’으로 볼 수도 있고, ‘우산도, 무릉도 등지’ 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임영정은 이 우산무릉등처라는 직함은 동해상에 울릉도와 더불어 우산도가 존재하며, 이 우산도가 울릉도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공도화 정책 시행대상이 될 만큼의 규모로 중앙에서 알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 하였다.(「朝鮮初期 鬱陵島와 獨島의 經營」,『현암 신국주박사화갑기념 한국학논총』, 1985, 152쪽)

아무튼 우산국을 하나의 정치체가 아닌 단순한 섬들로 파악해가는 과정 속에서, 울릉도의 부속도서 중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독도는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파악되어 가게 된다. 그런데, 조선전기까지는 우산국의 옛 땅이었다는 인식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어, 가장 큰 섬인 主島 울릉도를 우산이라고 파악하기도 하고, 무릉 혹은 울릉이라고 파악하기도 해, 울릉도와 독도의 위치와 크기 및 명칭에 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산국이 울릉도와 독도로 분리되어 두 개의 섬으로 파악되고, 이 두 섬이 우리의 영토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과정을 조선전기에 편찬된 대표적인 관찬 지리지들을 대상으로 확인해보자. 1432년(세종 14)에 편찬된『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의 울릉도·독도에 관한 기록이다.(이 내용은 1454년(단종 2)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그대로 실리게 된다) “우산 무릉 두 섬이 (울진)현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는 우산국이라 칭했으며, 울릉도라 하기도 했다.(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新羅時 稱于山國 一云鬱陵島 ... (「세종실록」 권153, 地理志 江原道 三陟都護府 蔚珍縣條))”라는 이 기록에서 ‘날씨가 맑으면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 두 개의 섬’은 울릉도와 독도밖에 없으니, 이것은 곧 독도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울릉도와 독도의 지리적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섬들을 신라 때에는 우산국이라 했고, 울릉도로 통칭하기도 했다는 것을 명료하게 말해 주고 있다.

1451년(문종 원년)에 편찬된 『고려사지리지』에는 “울릉도가 (울진)현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신라 때에는 우산국이라 칭했고, 무릉, 우릉이라고도 한다. ... 일설에는 우산 무릉은 원래 두개의 섬으로 거리가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有鬱陵島 在縣正東海中 新羅時稱于山國 一云武陵 一云羽陵 ... 一云于山武陵本二島 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高麗史」 권58 地理3, 東界 蔚珍縣條))”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우산국을 울릉도로 통칭하고, 무릉, 우릉이라고도 불렀다는 것은 독도를 굳이 별도의 섬으로 명기할 필요가 없었던 고려시대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일설에는 우산 무릉이 원래 두 개의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는 내용은 고려후기이래의 독도에 대한 인식과 이 지리지가 만들어졌던 당시의 지리적 정보를 반영한 것이다.『고려사지리지』의 관련기록은 자연스럽고 정확하다고 하겠다.

이후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우산도 울릉도, 무릉이라고 하기도 하고, 우릉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두 섬은 (울진)현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 세 봉우리가 높이 솟아 하늘에 닿았는데 남쪽으로 갈수록 점점 낮아진다. 날씨가 맑으면 봉우리 위 나무와 산 아래 모래톱이 역력히 보인다. 바람이 좋으면 이틀이면 도착할 수 있다. 일설에 우산도와 울릉도는 원래 하나의 섬이라고 한다. ...(于山島 鬱陵島 一云武陵 一云羽陵 二島在縣正東海中 三峯岌嶪撑空 南峯稍卑 風日淸明則 峯頭樹木 及山根沙渚 歷歷可見 風便則二日可到 一說于山鬱陵 本一島 ...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5, 江原道 蔚珍縣 山川條))”라고 되어 있다. 또, 附圖인 「팔도총도」와 「강원도별도」에는 강원도 동쪽에 于山島와 鬱陵島가 그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530년에 편찬되었지만, 위 내용은 신증(新增)되지 않은 것으로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던 내용이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동람도(東覽圖) 역시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리지에 실려 있는 관련 기록과 지도들은 1480년경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여기서 울릉도와 독도는『신찬팔도지리지』에서처럼 두 개의 섬으로 파악되고, 于山島와 鬱陵島로 분명히 나누어지게 된다. 두 개의 섬을 명기하면서, 이에 덧붙여 ‘일설에 우산도와 울릉도는 원래 하나의 섬이라고 한다’라고 부언한 것은 우산국의 영역이 울릉도와 우산도로 명확히 구분되어 파악되고 있던 당시의 인식을 분명히 보여준 것인 동시에, 그때까지 남아 있던 ‘울릉도와 독도는 원래 우산국의 영토로서 울릉도 혹은 우산도로 통칭되고 있었다’는 기억을 기록해 둔 것이다.

그러나, 우산국이 두 개의 섬으로 정리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섬의 명칭과 위치 그리고 크기에 있어서의 혼란은 남게 된다. 우산도와 울릉도가 두 섬이라는 것은 확실한데, 섬의 정확한 지리적 정보가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산도, 즉 우산국섬이 라는 잔영이 남아 있었고, 또, 우산국이 울릉도, 무릉도, 우릉도 등으로 통칭되었다는 기억이 남아 있는 상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그것은 附圖의 우산도, 울릉도의 표기형태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于山島와 鬱陵島가 일직선상에 그려져 있는데, 우산도가 울릉도보다 조금 작게, 또 강원도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이러한 혼란은 당시에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세조 3년(1457) 전 중추원부사 유수강(柳守剛)이 영동의 방어 계책을 상서했는데, 우산도(牛山島)와 무릉도(茂陵島) 두 섬은 물산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하니 이곳에 고을을 설치하자는 내용이 들어 있다.(「世祖實錄」 권7, 世祖 3년 4월 己酉條)

조선초 우산도와 울릉도가 울릉도와 독도로 구분되고, 지리적 위치가 비정되어 가는 과정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정확하고 매끄럽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먼 바다에서의 어로를 금지하고, 원격한 섬의 거주민들을 내지로 옮기는 해금정책(海禁政策)이 실시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농본국가 조선이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울릉도와 우산도, 즉 울릉도와 독도의 지리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음은 당연한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조선초기 울릉도-독도 해역에 대한 해금정책에 관해서는 임영정,「朝鮮初期 海禁政策과 獨島」(독도학회 제3회 학술심포지움『독도영유의 역사와 국제관계』, 1997)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가 두 섬을 자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판도를 명시한 관찬지리서와 지도에 기록한 것은 분명한 사실로서, 조선왕조의 독도 영유의식과 통치방식을 당시의 시대적 배경 하에서 이해해야 함을 말해 준다.

한편, 위와 같은 중앙정부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연해 어민들에게는 울릉도-독도 해역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중앙정부의 해금정책에도 불구하고, 연해의 어민들은 오랜 역사적 경험하에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어로작업을 계속 했고 울릉도에 잠입, 거주하기도 했다. 조선전기 주민 쇄출과정과, 조선후기 안용복 사건 및 지속된 수토정책 등이 이를 증거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앙정부나 민간의 지리적 인식도 점차 정확해져, 정상기의 「東國地圖」를 시작으로 18세기 이후 제작된 지도에는 우산도가 울릉도의 동남쪽에 정확히 위치하게 된다. ‘울릉도와 독도는 옛 우산국의 땅으로, 우리의 영토’라는 천수백년간의 독도에 대한 일관된 영유의식은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나타난다.

“「輿地志」에 이르기를 ‘울릉과 우산은 다 우산국의 땅인데, 우산은 왜가 이르는 바 송도이다’ 라고 하였다(輿地志云 鬱陵于山 皆于山國地 于山則 倭所謂松島也)”(『增補文獻備考』,「輿地考」19, 關防 7, 海防 1, 東海 蔚珍).

*자료: 독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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