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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9월 26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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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大 독도문제 권위자의 기고

시네마大 독도문제 권위자의 기고
 幕府가 1696년「다케시마 도항 금지」를 결정한 이후 日本은 독도 영유권을 여러 차례 포기했다
 

나이토 세이츄(內藤正中) 시마네大 명예교수
나이토 세이츄 교수는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통과시킨 시마네현 의회가 있는 시마네(島根) 대학의 명예교수다. 독도 문제 연구의 권위자인 그는 시마네 대학과 돗토리 단기대학의 北東아시아 문제 종합연구소장을 지냈다.

松島(마쓰시마·독도)에 관한 日本의 認知


  다케시마(독도) 문제는 韓日 양국이 대립한 채 지금까지 50여 년에 걸쳐 지속되어 온 영토분쟁이다. 두 나라는 제각기 自國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물러서지 않고 있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서는 『다케시마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도, 또한 국제법상으로도 분명히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아니냐에 대한 의문을 해명하는 것이 이 글의 과제다.
 
  외무성 홈페이지는 「다케시마 영유권에 관한 우리나라의 주장」으로서, 『우리나라는 늦어도 17세기 중엽에는 실효적인 지배에 의거한 다케시마의 영유권을 확립하고 있었다』고 밝히고, 구체적으로 『에도시대의 초기(1618년), 호우키번(伯耆藩)에 사는 오타니(大谷), 무라카와(村川) 두 집안이 에도 막부로부터 울릉도 渡海免許(도해면허)를 받고, 해마다 同島(동도)에 갔으며…. 또한 늦어도 1661년에 두 집안은 다케시마(竹島)를 배령받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다케시마는 지금의 울릉도다. 독도(지금의 다케시마)는 당시 「마쓰시마(松島)」로 불렸다.
 
  문제는 米子(요나고) 성밑 거리 사람인 두 집안이 다케시마(울릉도)와 마쓰시마(독도)를 배령받고 渡海면허를 받았다고 하는 기술이 사실인지이다. 「호우키번(伯耆藩)」이라는 번의 이름은 없으며 「돗토리번(鳥取藩)」이거나 「인슈우번(因州藩)」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일본 측의 다케시마(독도) 認知(인지)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살펴보자.
 
  현재의 다케시마(독도)에 관해서, 일본의 史料(사료)에 처음 나오는 것은 「마쓰시마(松島)」라는 명칭이다. 그것은 1667년(寬文 7년)에 松江 藩士(마쓰에 번사)였던 사이토 호우센(齋藤豊仙)이 정리한 「인슈우시청합기(隱州視聽合紀)」 속에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는 오키노쿠니섬(隱岐國)의 서북쪽, 日本 海上의 섬으로서 울릉도인 다케시마와 더불어, 마쓰시마(松島)에 대해 다음처럼 쓰고 있다.
 
  「隱州在北海中故云隱岐島… 戌亥間行二日一夜有松島, 又一日程有竹島, 此二島無人之地, 見高麗如自雲州望隱岐, 然則日本之乾地以此州爲限矣」
 
  「오키섬으로부터 서북쪽으로 1박2일에 걸쳐 항해하면 마쓰시마(독도)가 있고, 다시 하루를 더 가면 다케시마(울릉도)가 있다. 두 섬 모두 무인도이다. 그리고 다케시마에서 朝鮮國을 바라보는 것은, 바로 이즈모노쿠니(出雲國: 현재의 시마네현 동쪽 지방 - 편집자 注)로부터 오키섬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일본의 서북의 경계는 다케시마(울릉도)이다」는 내용이다.
 
 
  오키섬 사람들, 울릉도에 고기 잡으러 가
 
  1667년 8월에 마쓰에번의 명을 받고 幕府로부터 맡겨진 땅인 오키섬(隱岐國) 지역을 돌아본 「사이토 호우센」이, 스스로 정리한 보고서의 冒頭(모두)에 쓴 글이다.
 
  오키섬 사람들은 『호우키의 요나고 거리 사람이 막부의 특별허가를 받고, 해마다 다케시마로 渡海(도해)한다』고 말하며 울릉도에 고기잡이 갔던 것을 알고 있었다. 오키섬 사람들 중에는 배를 타고 渡海사업에 참가했던 자도 있었으며, 섬 뒤쪽인 후쿠우라항(福浦港)은 다케시마 도해의 카자마치항(風待港: 순풍을 기다리는 항구 - 역자 注)이었다.
 
  그런데, 이 「인슈우시청합기」의 기사에서 보이는 「日本之乾地以此州爲限矣(일본지건지이차주위한의)」라는 글은 韓日 쌍방 학자들 사이에서, 그 해석을 둘러싸고 대립한 채 지금에 이르고 있는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일본 측에서는 此州(차주)를 울릉도인 다케시마로 보고 있는 이들이 많은 반면, 한국 측에서는 오키섬으로 삼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점은 다케시마·마쓰시마의 영유권에 연관되기 때문에, 양보할 수 없는 논쟁의 핵이다.
 
  1994년 12월에 韓日 양국의 논점을 정리한 국립 국회도서관의 쓰카모토 타카시에 의한 「다케시마 영유권 문제의 경위」(「調査와 정보」 244호) 중에는 왜 그런지 이 문제를 빼놓고 있다.
 
  결정적인 것은, 1696년(元祿 9년)의 막부에 의한 「竹島渡海禁止令(다케시마 도해금지령)」 이전인 1667년에 나온 史料(사료)라고 하는 것이다. 당시는 해마다 요나고 거리 사람이 渡海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케시마는 당연히 호우키번 소속의 일본 영토로 보이고 있었고, 일본의 서북쪽 경계는 다케시마(울릉도)가 된다.
 
  다케시마를 일본령으로 보지 않는다면 「竹島一件(다케시마 한 건)」을 다툴 의미는 없다.
 
  이와 관련하여, 1823년(文政 6년)에 오키섬의 오니시 오시야스(大西敎保)가 저술한 「오키고기집(隱岐古記集)」에서도 똑같은 취지의 글을 쓰고 있다. 이 책은 「인슈우시청합기(隱州視聽合紀)」를 底本(바탕삼은 책)으로 삼아 보태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此島(차도)로부터 조선을 바라보면 인슈우(隱州: 오키섬)로부터 운슈우(雲州: 지금의 시마네현의 이즈모 땅)를 보는 것보다 아득히 멀고, 지금은 조선인이 와서 살고 있다 한다』
 
  1667년의 「此州(차주)」가 여기서는 「此島(차도)」로 되어 있으며, 조선인이 在住(재주)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이상, 此島는 분명히 울릉도(다케시마)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의 空島정책
 
  그런데 조선 왕조는 15세기 이래로 울릉도를 無人化(무인화)하는 空島(공도)정책을 취해 왔다. 이 때문에 오타니와 무라카와 兩家는 70년 이상에 걸쳐 다케시마 渡海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空島정책은 조선 왕조가 영유권을 放棄(방기)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뒤에서 밝히듯이, 1696년(元祿 9년)에는 막부도 울릉도와 독도가 朝鮮領(조선령)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일본인의 渡海를 금지했다. 따라서 요나고 거리 사람에 의한 다케시마 渡海사업이라는 것은, 空家(공가)인 섬에 들어가서, 그 안에 있는 보물을 가지고 돌아온 도둑행위(泥棒行爲)와 똑같은 것이며, 그것을 외무성처럼 『實效的(실효적) 지배에 근거한 다케시마의 영유권을 확립하고 있었다』라고 말하는 따위의 것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다케시마·마쓰시마 둘 다 주민이 살고 있지 않은 무인도라고 하는 점에서, 막부는 새로이 발견한 요나고 거리 사람에게 渡海를 특별히 허가한 것이다.
 
  두 섬이 일본 영내의 외딴 섬이라고 한다면, 그런 특별 허가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1681년(延寶 9년) 오타니家의 古문서 속에는, 다케시마(울릉도)뿐만 아니라 마쓰시마(현 竹島)에 대해서도, 「拜領(배령)했다」든가, 「支配御預ケ(지배를 맡겨 주시다)」 같은 말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해마다 渡海사업이 恒例(항례)되어, 「竹島御用(다케시마 어용)」이라고 부르는 다케시마 특산물을 막부요인에게 갖다 바침, 그리고 「將軍御目見え(쇼군 어접견)」을 되풀이하는 것 등을 통해서, 3代째 후손의 시대가 되면, 先祖(선조)의 진력으로 무인도를 막부로부터 「배령」하여 배타적으로 「지배를 맡겨 주시다」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봉건사회에서 성밑 거리 사람(町人: 일반서민 - 역자 注)에게 무인도 토지를 나눠 주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다케시마로 건너가는 渡海기지였던 오키섬에서 「다케시마 그리고 마쓰시마가 돗토리번(鳥取藩)의 호우키국(伯耆國)에 속하는 離島(이도)」로 여겨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3년간에 걸친 朝鮮과 幕府의 외교교섭
 
  무인도로 여겨 왔던 다케시마에서, 처음으로 조선인을 만난 것은 1692년(元祿 5년)이다. 이 해에는 53명이 와 있었으나, 일본 쪽은 21명이라는 소수였기 때문에 다투거나 하지 않고, 조선인들이 만들고 있던 말린 전복 이외에 갓과 망건, 메주를 가지고 돌아와 번청에다 제출했다.
 
  에도의 번청에서 막부에다 대처방법을 물었더니, 『이미 조선인들이 퇴거했다면, 아무것도 대처할 건 없다』는 회답이었다.
 
  이듬해 1693년, 40명의 조선인이 와 있었다. 그중의 2명을 잡아서 요나고로 연행했다. 安龍福(안용복)과 朴於屯(박어둔) 두 사람으로서 요나고에서 2개월 동안 취조한 뒤, 막부의 지시로 長崎奉行所(나가사키 관청)에 보내서 쓰시마번(對馬藩)으로 하여 귀국시켰다.
 
  이어서 막부는 쓰시마번에다 명하기를 「다케시마는 일본령이므로 조선인은 출어하지 않도록 금지조치를 취할 것」을 조선국에 요청시켰다.
 
  이때 쓰시마번이 조선 왕조 앞으로 보낸 문서에는 「本國 다케시마」로 쓰고, 일본 영토의 섬이라는 인식을 제시했다. 또한 쓰시마번의 「朝鮮通交大紀(조선통교대기)」에도 1683년에 조선인이 「우리 인반주 다케시마에 왔음」이라고, 다케시마가 돗토리번에 소속한다는 것을 표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선 측에서는, 「倭人所謂竹島, 卽我國鬱陵島(왜인의 소위 다케시마는, 즉 우리나라 울릉도)」라며 조선 영토임을 주장했다. 韓日 간의 외교 교섭은, 부산의 왜관을 무대로 3년간 계속되었다. 그리고 1696년(元祿 9년) 1월28일에, 막부가 老中(노중: 막부에서 쇼군을 보좌하는 최고 관직) 4명의 連署(연서)를 가지고, 「향후 다케시마 도항 금지령」을 돗토리 번주에게 하달시켰다.
 
  이에 대해서 「막부가 다케시마의 영유권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는 說도 있으나, 3년간에 걸친 日韓 외교교섭이 다케시마의 영유권을 둘러싼 것인 이상, 그러한 說은 무의미하다. 다케시마가 조선령인 울릉도라는 것을 막부도 인정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마쓰시마는 인반호우키(因幡伯耆)의 부속이 아니옵나이다』
 
  그 경우, 마쓰시마(現 다케시마·독도)는 어떠했는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본래 마쓰시마에 관해서는, 「다케시마에 부속하는 섬」이라고 하는 이해로서 특단의 조치는 취해 오지 않았다. 그런 이상, 마쓰시마에 대해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다케시마 渡海가 금지되자 마자, 마쓰시마로 渡海하는 자는 없었다.
 
  막부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되는 돗토리번의 1695년(元祿 8년) 12월25일자 문서가 있다. 이것은 전날 막부의 老中 아베 노토요아토모리(阿部豊後守)로부터의 질문에 대한 돗토리번의 회답서이다.
 
  막부가 돗토리번에 내린 질문은 7개조이다. 그 제1항에서는 『언제부터 다케시마가 인반호우키의 영지가 되었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한 돗토리번의 회답은 『다케시마는 인반호우키의 부속은 아니옵나이다』였다.
 
  또한 제7항의 질문에 대해, 돗토리번에서는 『다케시마와 함께 마쓰시마도 인반호우키 兩國에 부속하는 것은 아니옵나이다』라고 明言(명언)했다.
 
  이를 토대로 막부는 다케시마가 조선령의 울릉도인 것을 인정하고 일본인의 다케시마 渡海를 금지하게 됐다. 이 결정에 대해 30년 뒤인 1724년(享保 9년)에 돗토리현이 정리한 「竹島渡海禁止竝渡海沿革(다케시마 도해금지 및 도해 연혁)」에 다음처럼 기술되어 있다.
 
  <돌아보건대, 막부 당국도 처음에 다케시마의 사정을 매우 상세하게 모르고, 우리 어민들 때문에 宗氏(소우시)로 하여금 조선에 교섭하니, 뒷날의 다케시마는 울릉도이며, 옛날부터 조선의 屬島(속도)이고 어민이며, 거주자도 없고, 또한 우리 번의 지배의 땅이 아님을 알게 됨으로써, 오히려 사태를 발생시키지 않고, 무사히 문제를 낙착시키기에 이르렀음이라>(「鳥取藩史」 第6卷, p.146).
 
 
  『竹島外一島之義本邦關係無之(독도와 그 밖의 섬은 일본과 관계없노라)』
 
  1696년(元祿 9년), 막부의 渡海 금지령에 의해, 그 이후에는 일본인의 다케시마 渡航者(도항자)는 없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한 노릇이지만 마쓰시마(현 竹島)에 대한 관심도 사라지게 되었다. 본래 그 자체로서는 가치가 없는 바위섬이기 때문에, 마쓰시마만을 목표로 渡航하는 자는 없었다.
 
  단 이시미국 하마다번(石見國浜田藩)에 관계되는 아이쓰 야하치에몬(會津屋八右衛門)의 다케시마 밀무역 사건처럼 「가장 가까운 마쓰시마로 渡海한다는 명목을 가지고」 다케시마에 갔던 사례도 있다. 이 일 때문에 다케시마는 금지되어 있었으나, 마쓰시마에 대한 渡航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고, 가와카미 켄죠우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핑계에 지나지 못하는 말을 끄집어내서, 「마쓰시마 渡航은 계속되었다」고 내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메이지 유신 후, 新정부는 조선국에 외무성 관원을 파견하고 內情(내정)을 조사하게 해, 1870년(明治 3년) 4월에, 「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라는 제하의 보고를 받는다.
 
  그 속에, 「다케시마와 마쓰시마는 조선에 부속된 섬으로 시종되고 있다」고 되어 있고, 「마쓰시마는 다케시마의 이웃 섬으로서, 마쓰시마의 건에 대해 지금까지 게재한 서류는 없음, 다케시마의 건에 대해서는 겐로쿠(元祿) 연간 후에 잠시 동안 조선으로부터 居留(거류) 때문에 사람을 보냈음…」이라 기록하며, 다케시마·마쓰시마가 함께 朝鮮國領(조선국령)이라 보고하고 있다.
 
  메이지 정부는 잇따라 다케시마(마쓰시마) 개발 신청에 대처할 필요에 몰리게 된다. 1876년(明治 9년) 아오모리현 사람 무토 헤이하쿠(武藤平學)의 「마쓰시마 개척 건」, 지바현 사람 사이토 시치로우헤에(齋藤七郞兵衛)의 「마쓰시마 개척건」, 그 다음 해의 시마네현 사람 도다 타카요시(戶田敬義)의 「다케시마 도해원」이다. 여기서 말하는 마쓰시마·다케시마는 똑같은 울릉도에 대한 것이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치는 시기에 서양 여러 나라가 일본해에 들어와 旣刊(기간)의 海圖(해도)에 실려 있지 않은 다케시마·마쓰시마를 찾아내고는, 제각기 섬에다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아로우 스미드의 「日本圖」에서 다케시마를 「아르고노트」, 마쓰시마를 「다쥬레」라고 불렀다.
 
 
  일본 정부, 독도 영유권 放棄
 
  1876년(明治 9년), 「다케시마 외 한 섬」 조사의 건이 시마네현에 조회되었다. 시마네현에서는 「요나고의 오타니ㆍ무라카와 兩家의 사료에서 개요를 추찰하니, 그 위치는 오키섬의 西北에 있고, 산잉(山陰)의 西部(서부)에 포함시켜도 좋다고 생각되나, 地籍編入(지적편입)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좋은지」를 10월16일자로 내무성에다 문의하는 형식으로 회답했다.
 
  내무성에서도 독자적인 조사를 실시해서, 「다케시마 외 한 섬은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하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版圖(판도)의 取捨(취사)는 중대한 사건」이라고 하여, 1877년(明治 10년) 3월에 太政官(태정관: 일본 정부의 최고기관으로서, 입법ㆍ사법ㆍ행정 3부를 밑에다 두고 거느렸다 - 역자 注)의 결재를 요청했다.
 
  이에 右大臣(우대신)인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 參議(참의) 오쿠마 시게노부(大?重信), 데라시마 무네노리(寺島宗則), 오키 타카토우(大木喬任)의 동의를 받고, 「竹島外一島本邦關係無之義(다케시마 외 한 섬은 우리나라와 관계없음)」이라는 原案(원안)을 그대로 고스란히 가결하여 승인시켰다.
 
  시마네현에는 4월9일, 「일본해 속의 다케시마 외 한 섬은 우리나라와 관계없다」는 指令(지령)을 보내왔다(稿本 「島根縣歷史·政治部」).
 
  해군성 수로국에 의한 실측조사는 1880년(明治 13년) 9월에 군함 덴이키(天域)를 파견하여 시행했으며, 「기타(마쓰시마), 즉 옛날부터의 울릉도에 있어서, 그 섬 북방의 작은 섬을 다케시마로 호칭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一個(일개)의 巖石(암석)에 지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多年에 걸친 의문사항이 하루 아침에 해빙했노라」고 결론지었다고 기타자마 세이죠우(北島正誠)는 「竹島考證(다케시마 고증)」에 기록하고 있다.
 
  이래서 일본 정부는, 울릉도의 독도는 말할 것도 없고, 마쓰시마(현 竹島)에 대해서도 영유권을 放棄(방기)한 것이다.●
 
  <번역·洪潤基 韓日국제王仁학회 회장> 월간조선 2005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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