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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9월 22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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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일본(日本)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부당성(不當性)과 남북간의 협력방안

일본(日本)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부당성(不當性)과 남북간의 협력방안 
     ( Illegality of Japanese Dominium  on The Dokdo Island and
                     Cooperative plans between Two Koreas, by Jang-Hie Lee)

이  장  희
(한국외대 법과대학 학장/평화통일시민연대 상임공동대표)

Ⅰ. 문제제기


독도문제는 남북분단이전인 1905년 이후 일본의 적극적인 식민화과정에서 발생하였다.  따라서 독도문제에 대한 민족 공동대응은 민족정체성의 확립이자, 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며, 나아가 민족의 동질감 회복 및 민족대단결을 유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분단 50년이 넘도록 독도문제에 대한 남북공동 대응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번 8·15 민족통일대회에서 역사학자와 국제법학자로 이루어진 학술토론회가 민족분단 이후 서울에서 처음으로 개최되었다는 것은 민족정체성확립의 차원에서 상징적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하겠다. 독도문제에 공동대응은 1992년 2월 발효된 남북(북남)기본합의서 제6조 "남과 북은 국제무대에서 대결과 경쟁을 중지하고 서로 협력하며 민족의 존엄과 이익을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한다"의 규정에도 적극적으로 부합된다. 이번 독도문제 공동 대응은 이미 1990년에 시작된 남북한 여성들의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한 공동대응에 이어 민족공동이익을 위한 일본에 대한  민족협력연대의 또 하나의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현재 한국 일본 양측은 모두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당연히 우리의 영토이다"라는 결연한 입장을 계속 취하고 있다. 한일 양국에서는 상당히 감정적인 분위기에서 이 독도문제가 진행되고 있는바, 우리는 좀더 냉정하게 독도의 국제법적 역사적 쟁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일본은 독도문제를 일. 대만과의 조어도(釣魚島){첨각제도(尖閣諸島)} 및 일본. 러시아와의 남쿠릴열도(북방영토)문제 해결을 위한 다목적 카드로 이용할 이중적(二重的) 속셈이 있어 보인다. 그러면 본고는 과연 독도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국제법적으로 어느 나라의 영토적 권원(權原, Title)에 속하는지 한일 양국의 논점을 비교, 검토해 일본 주장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향후 민족공동 대응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독도의 역사적 연혁 및 양측의 주장


독도는 신라시대 울릉도와 더불어 "우산국(于山國)"이라는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고, 우산국은 신라 지증왕 13년(서기 512년)에 신라에 귀순해 와서, 한국이 신라 때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독도를 영유해 왔다는 사실을 다수의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독도는 울릉도로부터 가시거리에 있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조선사 문헌에 의하면, 우산도, 삼봉도, 가지도 등의 명칭을 거쳐서 독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은 이러한 명칭들이 울릉도의 다른 이름이거나, 혹은 울릉도의 다른 부속도서라고 반박한다. 

조선은 15세기 이래 울릉도에 대해 400여년간 공도(空島)정책을 펴왔다. 이 틈을 타서 17세기 초부터 일본인이 약 70년간 벌목과 어로작업을 하였다. 조선조 숙종 19년(1693년) 이후에 있은 안용복(安龍福)의 활동과 조선측의 항의로, 일본은 마침내 숙종 22년(1696년)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도항(渡航)을 금지시켰다. 이에 대해 일본은 울릉도로의 도항은 금지되었지만, 독도로의 도항은 금지하지 않았으며, 일본의 쇄국정책기간 중에도 계속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불모고도인 독도의 여건을 보아 독도만을 향한 일본인의 도항이 설득력을 갖질 못함은 물론, 이후 한국은 울릉도·독도에 대한 관원(搜討官-수토관)의 정기파견 순찰, 현지탐사 등을 통해 영유의 권원(權原, title)을 계속 이어 나갔다.

그 후 한국은 일본인(日本人) 잠입에 대한 항의교섭(1881년), 검찰사와 개척사 임명과 파견(1881년, 1882년, 1883년), 도편제 강화(1884년, 1888년, 1889년), 칙령에 의한 울릉 전도와 독도의 확인(1900년) 등 적극적인 조치로 근대적 권원의 새모습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개국의 깃발을 드높인 제국주의 열강의 여세를 몰아 러·일전쟁 와중인 1905년 일본은 독도를 일령으로 편입했다. 이 1905년 편입이 현재 일본이 독도를 자국영토라고 주장하는 직접적인 근거가 되고 있다.
나까이(中井養三郞)라는 한 어부가 1994년에 한국의 독도에서의 어업을 위해 중앙정부에 교섭을 요청하자, 일본정부는  한반도 침략이라는 국제사회의 의심을 우려하는 동시에 러·일전쟁 해전에서의 전술적 필요를 저울질하다가 1905년 1월 28일에 내각에서 '무인도이며 어느 나라의 영토에도 속하지 않은 리양고(독도의 프랑스 명칭)'를 영토로 편입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는 격에 맞지 않는 지방고시로 은밀하게 지방행정관할에 편입한 것이다. 초기에 일본은 이러한 방식을 국제법상 "무주지(terra nullius)에 대한 선점(occupation)"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이 고유영토설(固有領土說)과 모순된 면이 발견되자, 1905년의 편입을 이전의 불완전한 권원을 근대 국제법상 확정적 권원으로 강화시키는 조치라는 등 다소 변화된 논리를 펴고 있다. ]

그러나 한국은 역사적으로 계속 독도를 울릉도의 관할하에 두고 지배하고 있었으며, 도명을 바꾼 1900년 칙령 41호에서도 '울릉도 군청이 울릉 전도(全島)와 죽도(竹島, 대섬), 석도(石島, 돌섬·독섬·독도)를 관할한다'라고 명문화하고 있다. 일본의 영토편입 다음해인 1906년 일본 지방관리들의 울릉도 방문을 통해 독도편입소식을 전해들은 울릉군수 심흥택은 '본군 소속의 독도를 이제부터 일본령'이라고 주장하니 대책을 세워달라는 보고서를 중앙정부에 올린다. 이와 같이 이미 한국의 고유한 영토로서 실효적인 지배상태에 있었고, 따라서 무주지가 아닌 독도를 일본이 영토편입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법적으로 무효일 뿐 아니라 불법한 침략인 것이다.

그리고 2차 대전 패전 후인 1946년 1월 29일 『연합군 최고사령부 훈령 제677호』(SCAPIN 677) 제3항에서도 동사령부는 명시적으로 독도를 일본영토로부터 배제하였다. 또 카이로선언(1943년 11월 27일) 및 포츠담선언(1945년 7월 26일)에서도 일본의 독도에 대한 권리는 상실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은 SCAPIN 677호의 제6항과 1951년 대일강화조약 제2조 a항을 근거로 상기 동사령부의 훈령은 잠정조치에 불과하며, 영토귀속의 최종결정에 대한 연합국측의 입장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1952년 1월 18일 한국 정부가 "인접해양주권선언(소위 평화선 선언)"을 선포하자, 일본은 국제법상 공해자유원칙의 위반이라고 주장하고, 특히 일본 외무성은 1월 28일 "…대한민국의 선언은 죽도(竹島)로 알려진 도서에 대해 영역권을 갖는 것처럼 보이나, 일본정부는 대한민국에 의한 이러한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항의해 온 데서부터 한·일간의 본격적인 독도문제가 시작되었다. 그후 독도의 영유권 주장을 둘러싼 한·일간의 외교전은 교환각서의 형식으로 수십차례 반복되어 왔다. 

 그리고 6.25라는 민족상잔의 혼란기에 독도는 미국과 일본의 은밀한 계획하에  두번(1948년 6월 8일, 1952년 9월 15일) 미군폭격연습장으로 이용되었다.  이 혼란기에 독도폭격사건을  일본은 집요하고 은밀하게 독도영유권획득을 위한 기회로 이용하였다. 특히  일본은 1952년 7월 26일 독도가 미일행정협정상 미일합동위원회에 의해 일본의 구역으로서 주일미공군의 폭격연습지로 지정되었고, 그로부터 8개월 후인 1953년 3월 19일 미일합동위원회에서 해제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은 이를 바탕으로 해제된 날로부터 4개월후인 1953년 7월 13일자 외교문서를 통해 미국의 인정을 거론하며 '폭격연습구역의 지정조치는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후 1954년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를 주장했고, 한국은 이를 거부해 왔다. 또 일본은 1965년 『분쟁해결에 관한 한일교환공문』에 의해 독도에 대한 분쟁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데 비해, 우리는 이 독도문제가 이 교환공문에서 말하는 분쟁이 아니기 때문에 조정에 회부할 필요조차 없다고 일축해 왔다.
그리고 1965년 국교정상 후 일본은 독도문제는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켜왔다.
이러한 일본측 주장의 핵심은 1952년 1월 18일자 항의서와 1962년 7월 13일자 외교각서에서 일본의 "고유영토(Japan's inherent territory)"라고 주장한 것과 1905년 독도를 국제법상 '선점'에 근거하여 편입한 것, 그리고 대일강화조약 제2조에 명시적 규정이 없다는 점 등이 주요논거이다.


Ⅲ. 일본의 영유권 주장의 부당성

1. 일본의 고유(固有)영토설의 부당성

일본외무성은 1952년 1월 18일자 항의와 1962년 7월 13일자 외교각서에서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해 왔다. 그후 이러한 주장은 최근까지 계속되었다. 지난 2002년 4월 9일 일본정부는 "일본 고유의 영토가 타국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며 "한국이 시마네현의 다케시마(竹島: 독도의 일본식 표기)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고 기술한 한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대해 합격판정을 내렸다. 이는 1905년 편입 이전부터 독도는 무주의 영토가 아니라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것이다. 즉 일본은 "역사적 권원(historic title)" 또는 "본원적 권원(original title)"으로서의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고유의 영토란 선점, 시효, 할양, 첨부, 정복 등으로 국가성립 후에 취득된 것이 아니라, 국가성립 당시부터 그 국가의 성립에 기초되어 있는 영토를 말한다. 이와 같이 영역권의 역사적 출발점인 전법적 주권(前法的 主權, pre-legal sovereignty)이 미치는 영토를 고유의 영토 또는 본원적 권원에 의한 영토라 한다.

독도가 일본의 고유(固有)영토라는 주장은 다음과 같이 부당하다. 첫째,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 ① 이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독도는 울릉도와 같이 신라 지증왕 13년(서기 512년) 이래 우리의 영토이며, 조선은 15세기 초 이래 일정기간 공도(空島)정책을 시행한 바 있으나, 이 역시 주권의 행사이며, 영역권 포기의 의사를 표명한 바 없다. ② 조선시대에는 독도를 우산도라고 울릉도와 같이 강원도 울진현에 부속시켰으며, ③ 1693년과 1696년 안용복의 활동을 통해 일본이 울릉도·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출어(出漁)를 금하겠다는 공한(公翰)을 보내온 사실, ④ 일본의 무사들이 덕천막부(德川幕府)를 타도하고 명치유신정권(明治維新政權)을 수립한 직후 1869년과 1877년 일본정부 스스로가 '독도가 일본과는 관계가 없는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한 사실, ⑤ 1900년 10월 25일 고종이 칙령을 발하여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대치하고 군수(郡守)는 울릉 전도(全島),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하게 하였다는 사실, ⑥ 울릉도가 공도(空島)인 틈을 타서 일본인이 잠입한 사실 등을 두고 볼 때, 일본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점유했다고 볼 수 없다. 또 일본 어부의 기항 및 어로활동이 국가기관의 공적 행위로 인정될 수 없다.
둘째, 1905년 "도근현고시(島根縣告示) 제40호"를 통해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한다는 조치를 취한 사실은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固有領土)가 아님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이다.

2. 일본의 선점 주장(先占 主張)의 부당성

국제법상 선점(occupation)이란 무주의 토지(terra nullius)를 새로 발견하거나 전(前)에 통치하던 국가에 의해 포기된 지역을 다른 국가보다 먼저 실력적으로 지배(실효적 선점)함으로써 성립되는 영토취득의 권원(權原)이다. 단, 극지(예: 남극)는 제외된다. 선점의 요건에는 주관적 요소로서 국가의 영유의사(領有意思)를, 객관적 요소로는 국가권력에 의한 실효적(實效的) 및 계속적 지배(繼續的 支配)를 요구한다. 이 객관적 의사는 영역취득의 의사라는 주관적 요소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하여 특히 중시된다. 국내사회와는 달리 국제사회는 중앙집권성이 없다. 따라서 배타적 영역주권은 항상 실효적 점유(국가활동의 평온하고 계속적인 표시)에 의하여 유지될 필요가 있다. 선점의 주체는 국가이다. 선점의 주관적 요소로서 영유의사는 영유선언, 입법·행정상의 조치, 타국에 대한 통고 등에 의하여 표시된다. 다만, 통고에 관하여는 그것이 선점의 요건이 아니라는 다수설과 선점의 필수요건이라는 소수설이 있다.

이러한 국제법적 선점이론에 비추어 볼 때, 위의 일본측의 1905년 선점 주장은 다음과 같이 모순이 있다.
첫째, 이해관계국인 한국에 통고가 없었다는 점이다. 1905년 독도편입을 일본은 한국에 전혀 통고하지 않았다. 국제법상 the Clipperton Island Case(1931년)와 the Palmas Island Case(1928년)를 살펴볼 때, 무인도(無人島)인 독도는 이해관계국인 한국에 대한 통고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둘째, 선점의 의사는 대외적으로 표시됨을 요한다. 1905년 일본의 선점의사표시는 단순히 국내 지방자치단체의 고시(告示)에 불과하다. 더구나 이 고시(告示)조차도 실제로 하였는지 불확실하다. 또 선점의 주체는 국가이지, 시마네현과 같은 지방자치단체는 될 수 없다.

셋째, 일본은 1905년 2월 22일에 『도근현고시(島根縣告示)』로써 이것을 그 현에 편입 선점을 완료하였고, 그 후 한국의 항의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1905년 당시 일본은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독도의 일본열도 편입에 대해 한국은 정식 항의할 입장에 있지 않았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넷째, 선점의 대상은 무주지(無主地)인데, 1905년 독도는 역사적으로 무주지가 아니고, 한국의 실효적 지배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선점의 대상이 아닌 점 등을 들 수 있다. 무주지라는 것은 어느 국가의 영역에도 귀속되지 않은 지역, 국가영역으로서의 통치를 떠나 유기(遺棄)된 지역이다. 영역유기 또는 포기에는 포기의 의사(抛棄의 意思)라는 주관적 요소와 포기의 사실(抛棄의 事實)이라는 객관적 요소가 필요하다. 국가정책상 어느 영역을 일시적으로 사실상 포기하였을지라도 포기의 의사가 명시적·대외적으로 없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경우에는 이것을 포기로 보지 않는다. 조선은 15세기초 이래 빈번한 왜구의 침범으로부터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독도와 울릉도에 대해 공도정책(空島政策)을 편 것은 영역포기가 아니다. 조선은 공도정책(空島政策) 실시 동안에도 정기적인 수토관(搜討官, 조사관) 파견 등을 통해 울릉도·독도를 관리하였다.

3. 대일강화조약 제2조 (a) 해석의 오해

일본정부는 1962년 7월 13일 일본정부 견해에서 1946년 1월 29일의 '연합군 최고사령부 훈령 제677호'(SCAPIN No. 677)에 독도가 한국점령군사령관의 관할구역으로 포함되어 있으나, 1951년 '대일강화조약 제2조 (a)'에는 제외되어 있으므로 독도는 일본으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일본은 대일강화조약 제2조 a항에 의해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하였으나, 이 때 독도는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독도는 일본이 포기한 섬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일본측은 상기의 세 섬은 한국 근해에 있어 대표적인 섬들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최외단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주장은 논거가 박약하다.

첫째, '연합군 최고사령부 훈령 제677호(1946년 1월 29일)가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규정한 것을 '대일강화조약'이 달리 규정하기 위해서는 명시적이고 적극적인 규정이 있음을 요한다. 그 근거는 연합국의 일본점령관리 중의 영토처리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① 무조건 항복 후 미국의 초기 대일방침(1945년 9월 22일)은 일본의 주권이 4개 본도(本島)와 카이로선언 및 미국이 이미 참가하였고, 또 장래에 참가하는 기타협정에 의하여 결정될 주변의 제소도(minor outlying islands)에 국한한다고 했다. ② 일본의 점령관리를 위한 연합국최고사령관의 항복 후의 초기의 기본지령(1945년 11월 1일)에서 일본의 지리적 범위를 4개 본도(本島) 및 대마도(對馬島)를 포함한 약 1천개의 인접소도(smaller adjacent islands)로 보고 있다. ③ 맥아더 원수의 관하부대에 보내는 훈령(1945년 12월 19일)에서도 일본의 주권을 인접소도(smaller adjacent islands)에 국한시키고 있다. 이처럼 연합국의 일본영토처리가 단계적으로 보다 구체화되어서 마침내 1946년 '연합군 최고사령부 훈령 제677호'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일본의 주권에서 제외되는 영역으로 '독도'를 명문화하고 있다. 또한 SCAPIN 677호 제5항에는 만일 이 조치를 수정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다른 SCAPIN을 문서로 발표할 때만 가능함을 명백히 하였다.  더구나 1952년 발효된 대일강화조약이 이러한 내용을 번복하려면 좀더 구체적이고 명시적인 규정을 요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둘째, SCAPIN 제677호의 4조에는 '한국'(Korea)이 역시 일본의 영토와 주권행사로부터 제외할 지역으로 규정되어있다. 

 셋째, 연합군최고사령부는 뒤이어 1946년 6월 22일 SCAPIN 제1033호 제3항에서 "일본인의 어업 및 포경업의 허가구역(통칭 MacAthur Line)을 설정하고 그 b항에서 일본인의 독도 접근을 금지하였다. 이것은 1946년 1월 SCAPIN 제677호가 독도에 대한 단순한 주권행사포기규정을 넘어 보다 구체적으로 독도에 대한 일본인의 어업금지를 규정한 것이다.

 넷째, 독도가 울릉도의 외측에 있다는 이유로 이 섬이 일본의 영토라 한다면, 제주도의 외측에 있는 마라도도 일본의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모순을 나타내고 있다.

다섯째, 대일강화조약 제2조에 열거한 도서는 일본에서 분리되는 주요도서만을 열거한 것이고, 모든 도서를 열거한 것은 아니다. 이는 한국의 영토인 도서가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에 한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보아 명백하다.

여섯째, 대일강화조약의 초안작성과정(1차에서 9차과정)을 면밀하게 분석해볼 때, SCAPIN 제677호에 독도의 한국영토소속의 명문규정이  대일강화조약에서 빠진 사실으로만 독도가 일본 영토인정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미국의 시볼드(W.J. Sebald)라는 일본정부고문이 일본측의 로비를 받고 대일강화조약 제1차-5차 초안까지 독도를 한국영토라고 명문으로 기록했던 것을 삭제하고 일본영토라는 기록으로 바꾸려고 시도했다가, 영국·뉴질란드·오스트랄리아 등 다른 연합국들의 동의를 받지 못하자, 미국자신도 일본 로비를 따르지 않고 결국은 1946년 1월 29일의 SCAPIN 제677호(독도의 한국영토인정)의 효력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즉 미국의 7,8.9차 초안과 영국과 미국의 합동초안에서는 독도를 한국영토와 일본영토의 어느 조항에도 넣지 않고, 결국 독도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조약문을 성안하여 서명한 것이다.

일곱째, 국제법으로도 일본이 대일강화조약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표기하는데 실패하고, SCAPIN 제677호 효력이 여전히 유지됨으로써 독도는 여전히 한국영토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게 된 것이다.  한국은 SCAPIN 제677호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건국하여 미군정으로부터 독도를 포함한 모든 영토를 인계받았다. 반면에 일본은 1952년 4월 28일 대일강화조약 발효로 한국보다 4년 늦게 재독립하게 되었으므로 설사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명문을 대일강화조약에 명기하는데 성공하는 경우에도 한국정부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그 이유는 대일강화조약이  제3자인 한국에게 효력(권리, 의무)을 미치려면 제3자인 대한민국의 동의를 반드시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952년 대일강화조약에서는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기록을 명문으로 조약문에 기록조차 하지 않았으니, 일본이 독도를 승인받았다고 주장 할 근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Ⅳ. 남북공동 협력방안


상기에서 독도의 역사적 연혁과 독도영유권에 대한 국제법적 근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다음과 같은 남북공동  협력방안을 지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남북 쌍방은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한국의 고유영토에 대한 내정간섭이자 한국주권에 대한 침해이며, 일본은 정식으로 사죄하고 재거론 방지를 약속하도록 향후 긴밀하게 공동보조를 취해야 할 것이다.

둘째, 남북 쌍방은 독도문제를 비롯한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분명한 사죄와 UN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의 연계 등 국제적 연대전략을 신중히 검토해 주길 바란다. 일본을 움직이는 것은 강한 국제여론이므로 일본의 부당한 주장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은 매우 효과적일 것이다. 그 한 예로 남북의 양측 정부는 한일관계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하여 해외학술지에 영어로 기고하는 것을 적극 지원할 필요가 있다. 

셋째, 일본의 이중적(二重的) 영토전략에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 일본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남의 영토는 실효적 지배를 단단히 하고, 남이 갖고있는 자기네와 연관된 영토에는 계속 권원(權原)을 주장하여 흠집을 내자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의 이러한 영토전략과 일본측 문헌도 충분히 연구하고, 일본측 주장에 대한 반박논리 개발을 위해 국제법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일관된 공동연구를 지속해야 할 것이다. 

넷째, 독도와 관련된 사진 및 자료 전시 등을 통해 독도문제의 진실을 알림으로써, 독도문제에 대한 남북한 주민 계몽 및 여론을 올바른 방향으로 유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다섯째, 남북의 역사학자, 국제법학자 등으로 이루어진 학술토론회를 통해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학문적으로 검증하고 독도연구를 심화시키고 학문적 교류를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여섯째, 독도와 관련된 역사적, 국제법적 자료교환 및 공동 자료수집을 통해 독도연구를 입체적으로 심화시키고 학문적 교류를 확대해 나간다.

일곱째, 일본의 독도 및 한반도 침탈과 관련된 자료관 건립을 통해 독도의 진실을 알리고 올바른 방향으로 국내외 여론을 조성하고 민간교류를 확대해 나간다(국민계몽, 해외선전, 관람교류 등).

여덟째, 독도수호에 공이 큰 안용복, 독도의용수비대(대장 홍순칠) 등의 활동을 비롯하여 독도와 관련된 방송물 제작을 통해 독도문제의 진실을 알리고 방송교류를 한 차원 발전시킨다.

아홉째, 위의 사업추진방향은 단계적으로 해야한다. ① 학술토론회, 사진·자료전시회 등 당장 추진할 수 있는 쉬운 사업부터 추진한다. ② 남북의 공동사업에서 일본 사회내에 있는 조총련과 민단의 협력사업, 나아가 전 민족적 사업으로 그 사업의 폭을 넓혀 가서 일본사회 및 국제사회에서 독도문제의 진실에 대한 올바른 여론을 형성하고, 독도영유권 및 독도의 국제해양법적 지위를 확고히 지켜나간다.

열째, 독도를 현실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남측 주민들의 영토감정을 잘 고려하여 추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통일국가의 영토가 될 독도라는 의식을 적절하게 부각시킴으로써 독도가 한민족의 영토라는 것을 통해 민족동질성을 회복케 함에 기여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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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 요 | 이 책은 2008년도에 일본 중의원에서 독도문제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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