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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간도! 되찾아야 할 우리땅

아, 간도! 되찾아야 할 우리땅

강희제의 '백두산 특명'
1712년 정초 청 강희제는 조선과 청의 국경선 획정을 위해 사신 목극등(穆克登)에게 '백두산특명'을 하달한다. 목극등은 조선측 안내인과 도끼잡이, 짐꾼, 말 등을 합세하여 백두산 정상을 향해 떠난다.

5월 중순 드디어 백두산 천지에 도달한 일행은 웅대한 백두산 산세에 탄성을 내지른다. 잠시 주변을 정탐한 그들은 조선과 청의 국경이라고 인정되는 압록강과 토문강의 분수령에 높이 70㎝, 폭 55㎝의 돌비석을 세운다. 거기엔 '서위압록(西爲鴨綠) 동위토문(東爲土門)'이라는 글자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이른바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라는 조-청 국경의 말뚝이 박힌 것이다. 이로써 서간도 1만9천여㎢의 영토 전체는 청나라 땅인 양 되어버리고 토문강 이동 북간도 지역은 조선의 땅으로 획정된 것이다.

그 이후 1882년 고종 19년. 청은 조선 조정에 뜬금없이 간도 지역에 사는 조선 사람들의 철거를 요구해온다. 이 무렵 조선인은 함경도 관찰사로부터 땅 소유권 문서를 발급받고 지적부에 등기한 후 세금까지 내고 있었다. 청나라에서도 역시 같은 방식으로 간도 거주민에게 주권을 행사했다. 이에 군사적 충돌이 10여 차례나 일어나면서 간도영유권 분쟁이 싹튼다.

분쟁은 러-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일본이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면서 간도 문제는 급기야 일본의 손으로 넘어간다. 일본은 만주를 통째로 삼키기 위한 수단으로 1909년 간도협약을 맺고 우리땅 간도를 중국에 넘겨버리고 만다.

간도, 비운의 국토



비운의 첫걸음이었다. 외교권을 잃은 상태이지만 엄연히 주권이 살아 있는 나라인데도 당사국 조선이 빠진 상태에서 간도는 그렇게 빼앗겨버린  땅이 된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그로부터 94년이 지난 2003년. 요즈음 한국사회를 둘러싸고 돌아가는 모양새가 그때와 똑같지는 않지만 위기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주변국의 정세는 어지럽고 국내 위정자들의 갈등과 소모적인 국론분열은 그 시절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높다.

그러는 사이 중국과 일본은 영토 문제를 놓고 다시 전쟁을 걸어오고 있다. 동해 지명과 독도 문제에 대한 일본의 끊임없는 이의제기와 더불어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가동, 고구려사를 자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음모의 발톱을 드러내고 있다. 그 이면에는 한반도 통일 후 제기될지 모를 간도영유권 문제의 소지를 뿌리째 뽑으려는 포석이 깔려 있다.   

영토 문제는 대개 100년이 지나면 시효가 만료되는 게 국제법의 통례다. 현재 독도가 우리땅이지만, 이에 대해 일본이 시효를 중단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계속 항의성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간도영유권 문제는 향후 6년 후인 2009년에 100년을 맞아 효력이 정지된다는 게 국제법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이다. 천안대 김명기 석좌교수(국제법)는 "청-일간 맺은 조약의 시효라는 것은 우리나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중국 정부에 간도가 우리 영토라는 외교적 문서를 간간이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식적인 외교채널을 통해 간도 문제를 제기하면 통일 후 간도가 다시 우리 민족의 터전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부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또한 "이 간도 문제는 역사학자와 국제법학자가 공동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우리 국민의 관심은 끊기고...
 일본은 독도에 대해 집요하게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 독도 우표 사건에서 보듯이 독도와 관련한 사안이라면 아주 사소한 문제에도 간섭하고 항의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은 그 어느 누구도 독도가 우리 땅임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백두산정계비 등 각종 자료에서 드러나듯이 한치의 의심없는 우리땅인 간도 지역은 언제부터인가 "그게 우리땅이었어?" 라고 할 정도로 우리 민족에게 멀게만 인식되고 있다.

19세기 말 야수가 우글거리던 아무 쓸모없는 황무지 간도를 개간한 사람들. 우리에게 익숙히 알려져 있는 용정(龍井)마을을 일궈낸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는 한갓 신화 속에 갇혀 있는 것일까. 이주와 개척, 독립운동과 광복, 문화대혁명 등 만주땅에서 펼친 조선족의 삶은 우리의 근-현대사 그 자체였다. 

일제 저항시인 윤동주의 시 〈별헤는 밤〉에는 북간도가 나온다. 문익환 목사 일가가 북간도로 이주해 50년 동안 약 2만 평의 땅을 개간한 이야기는 문 목사를 잘 아는 지인들 사이에 오랫동안 회자되어오던 얘기다. 게다가 용정-훈춘-길림 등 간도 지역의 지명은 우리의 고향처럼 친숙한 이름이다.

일제 치하의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본거지였고 지금은 조선족이 살고 있는 2만1천여㎢의 광활한 우리의 북방영토 간도. 이젠 북한과 인접해 있어 영토수복운동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관심마저 끊긴 상태이다. 경인교육대학 강석화 교수(한국사)는 이에 대해 "영토 귀속을 판단하는 데는 그 나라 국민의 영토의식도 기준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온 국민이 믿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간도 과연 되찾을 수 있나
간도는 1712년 백두산정계비에 의해서 우리 영토였는데 1909년 청-일 간도협약으로 빼앗긴 땅이기 때문에 간도협약은 무효이니 1712년 백두산정계비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영토전문가들은 주장한다. 즉 을사조약이 무효이니 간도협약도 무효라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북방영토 관련 분야에서 거의 유일한 학술단체인 백산학회 육낙현 총무의 말이다.

"지금은 정부의 간도협약 제소가 시급하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 땅이 러시아 혹은 중국땅이 된 변천사를 논문 등을 통해 입증하고 근거자료를 계속 확보해나가야 한다. 이제 국민이 나서서 정부가 움직일 수 있는 뒷심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백산학회가 창립되던 1970년대에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 아래 국회 차원의 간도자료집이 발간되고 정부와 기업의 후원으로 학회 운영이 탄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박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간도 프로젝트는 위축되고 열의가 식어갔으며 1992년 한-중수교 이후엔 그 '꿈'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고한다.

또다른 전문가들은 대체로 간도를 되찾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이렇게 꼽는다. 첫째, 그 당시 유물-유적 보존의 중요성이 크므로 '중국문물국'에 돈을 주어서라도 결정적인 유물-유적을 보존해야 한다. 유물이 훼손되면 그만큼 간도영유권 주장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둘째, 국제법에서 영토분쟁이 있을 때에는 현지 주민의 투표 결과가 중요한 작용을 한다. 따라서 고구려와 발해는 순수한 우리의 조상이란 걸 알리고 간도에 사는 2, 3세들의 투철한 역사와 민족의식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영토 문제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 자신이 어느 민족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심리적 동질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셋째, 세계 만방에 우리의 주장이 보편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간도는 가까운 장래에 동북아 중심기지로 부각될 기회의 땅이자 희망의 땅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를 목청껏 높이고 '간도의 꿈'을 다시 키워야 한다.

국제 사회의 냉전적 결과물로 간도를 정당한 권리 없이 점유하고 있는 중국에 대하여 그동안 간도영유권을 주장할 기회가 없었더라도 이제는 우리의 주의-주장을 펼쳐야 할 시점이다.

어디가 간도인가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지역 해당

간도라고 하면 넓게는 만주 지역 전체를 일컫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백두산 북쪽의 만주 지역 일대, 우리가 흔히 '연변'이라고 부르는 중국 길림성 동쪽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는 지역인 북간도(동간도)를 가리킨다.
지형적으로 볼 때 간도는 남서쪽의 백두산을 주봉으로 장백산맥이 자리하고 남쪽으로는 두만강이 흐르고 있다. 10월 중순부터 5월 초순까지 강설과 결빙이 계속되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간도(間島)라는 지명은 중국 청왕조를 건립한 만주족이 이 지역을 그들의 발상지로 여겨 봉금(封禁)의 땅으로 삼고 출입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있는 섬과 같은 곳이라 해서 붙은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우리 민족이 정착해 개간한 땅이라는 뜻에서 간도(墾島)로 불리기도 한다.

일찍이 간도는 고조선을 잉태한 우리 민족의 발상지였고 고구려의 북방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했으며,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주활동영역으로 역사 속에서 검증된 우리 민족의 영토이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전기에 이르는 기간에는 여진족과 거란족이 각지에 흩어져 살았으나 이후 우리 민족이 이주해 개척을 시작하면서 실질적인 땅의 주인으로 확고한 위치를 점하기 시작하였다. 일제 시대에는 청산리대첩과 봉오동전투 등 항일무장투쟁의 근거지로 민족정신을 일깨운 현장이었다.

오늘날 간도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따라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설치되어 있으며 11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이 가운데 조선족이 전체의 약 40%인 80여만 명에 달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한족-만주족-회족 순으로 분포하고 있다.

유병탁 기자 lum35@kyunghyang.com /윤석원 기자 ysw@kyunghyang.com 
 뉴스메이커 558호 2004.1.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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