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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영토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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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영토(간도와 연해주 지역)를 찾아서
 
-독도본부 2003. 7.17. 영토위기강좌 -   

1. 우리 민족이 역사상 상실된 영토를 열거한다면 고조선   고구려가 차지한 북방의 대륙과 세종 때 정벌한 대마도를 들 수 있다.  오늘 제기하고자 하는 논점은 천 여년 전 멸망한 고구려  발해의 고토(故土)를 되찾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백년도 안 된 1909년 청일간의 간도협약으로 잃어버린 간도지역과 청이 러시아에 불법 할양한 연해주를 다시 찾아야 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당시 및 현재의 정치 지도자들의 소극적이고 미온적인 영토의식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2. 간도분쟁의 발단은 1627년 인조 5년에 금과 맺은 강도회맹(江都會盟)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한중간에 문제가 된 토문(土門)강에 대해선 중국은 두만강으로 간주한 반면, 조선은 송화강 - 흑룡강에 이르는 선으로 주장하였다.
 
또한 압록강 대안(對岸)지역은 1897년 서상무가 서변계 관리사로 임명받아 이 지역의 한인을 보호하였으며, 1900년 경 평북 관찰사 이도재는 이 지역을 각군에 배속시키고 충의사를 조직하여 이주민을 보호하였다.  두만강 이북지역은 이범윤이 1902년 간도시찰사로 임명받아 사포대를 조직하여 러 일 전쟁 발발 시까지 간도 한인들은 보호하였다. 

하지만 정부내의 혼란은 변계에까지 파장되어 변계(邊界)관리들이 임의로 1904년  한청변계선후장정(韓淸邊界善後章程)을 약정토록 하여 간도한인을 더욱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또한 일본에 편중된 유학생의 파견은 내정개혁안 20개조 안에 포함된 사항이었다.  즉 19조의 유학생 파견은 한국의 광범한 민중에 대한 근대교육보다도 소수 특권자의 자제를 일본에 유학시켜 일본의 영향 하에 두고 이 엘리트를 통해 한국지배를 강화하는 포석으로 삼으려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 일본유학을 갔다온 개화파들은 국제환경(일본의 한국침략)에 대하여 낙관적으로 판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에 이용만 당하였다. 그러므로 개화파나 집권사대파는 국가의 안위보다도 그들의 집권을 위해 외세에 의존하는 대외관을 갖고 있었다

3. 일본의 간도분쟁 개입배경은 대륙진출을 하기 위한 교두보의 확보였다.  또한 일본은 독점자본주의의 상품시장확대와 원료기지확대를 위해서는 대륙진출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따라서 일본은 간도의 정치 군사상의 중요성과 경제적인 측면 및 정치지리학적인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간도분쟁에 개입하였던 것이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을사감약(乙巳勘約)을 강제로 체결하여 간도문제개입의 법적 근거를 만든 다음, 박재순으로 하여금 1906년 11월 8일 통감부에 외교교섭을 내도록 조작하였다. 또한 노일전쟁 중에는 한 청간의 간도문제 조기 타결을 우려하여 청에 감계문제(勘界問題)의 논의를 지연하도록 요청하였으며 러·일 강화조약으로 한국에서의 우월권과 만주의 특수이익을 인정받았다. 

1909년 2월일본은 동삼성육안(東三省6案)을 제시하자 양국 간에 교섭이 진척되어 일본은 간도를 청에 양보하고 청은 동삼성육안(東三省6案)을 일본에 수락하여 9월 4일 간도협약이 체결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대청교섭과정도 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만주진출을 위한 동삼성오안건의 교섭과정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즉 간도영유권에 대한 대청교섭 정책전환에서 일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결국 간도는 동삼성오안건과 교환되는 간도협약으로 청의 영유가 되었다.
 
일본이 체결한 간도협약의 내용은 본래 동 서간도 지역을 축소하여 동간도의 동부만을 한정하였다. 이제 간도라면 토문강에서 송화강을 거쳐 흑룡강으로 유입하는 이동(印)지역이 아닌 노야령산맥(老爺嶺山脈)과 노령 및 알아하로 둘러싸인 곳으로 알고 있다. 이미 압록강 대안지역(對岸地域)이 서간도라는 개념은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간도협약은 압록강 대안(對岸)의 서간도에 대한 국경분쟁의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 중 국경선이 압록강 두만강 선으로 굳혀진 것은 간도협약 이후이다. 한국병합 이후 일본이 이것을 확정하여 지도로 표시하기 시작하였다.

4. 간도협약의 문제점은 「동위토문 서위압록(東爲土門 西爲鴨綠)」 이라는 정계비의 내용에 따라 국경이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간도협약을 무효라고 주장하여도 서간도 지역은 압록강이 국경선이 된다.  그러므로 목극등(穆克發)이 세운 백두산 정계비의 내용이 문제가 된다.

간도협약의 문제점은 백두산 정계비를 국경조약으로 인정할 때와 인정하지 않을 때에 따 라 달라진다. 이제 독단적이며 일방적인 백두산 정계비와 간도협약의 무효절차를  밟아 중국에 통보하여야 한다. 그리고 역사상 문헌에 나타난 한 중국경선의 재조정작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백두산 정계비는 청의 일방적인 과실책임이 있으며, 간도협약은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국제법상 무효이므로, 이 늑약(勒約)에 근거한 간도협약은 분명히 무효인 것이다. 그 외에 카이로선언, 미 일 강화조약, 중 일 강화조약, 한 일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1965) 등에 의거하여도 간도협약은 무효인 것이다.
 
5. 1909년 간도협약 이후 우리 정부가 이 지역에 대한 영유권 주장이나 항의를 하지 않는 것은 어떠한 까닭인가? 중국과의 수교시 우리 정부는 동서간도지역에 대한 영유권 문제의 제기조차 하지 못하였다. 구 소련과의 수교시에도 30억 달러를 원조하기로 하면서 재(在蘇)한인 문제도 간과해버렸다.  영토 내에 거주하는 사람만이 우리의 국민이 아니듯이, 영토 외에 거주하는 동포들도 우리의 국민이다. 이러한 해외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임무가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에게 당연히 있는 것이다.
 
우리가 특히 유의할 점은, 중국에 간도지역을 불법으로 점령하고 있음을 우리가 항의하지 않음으로써, 국제법상 중국의 취득시효를 우리가 인정하여 간도지역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남북한이 통일이 될 경우 그 형태나 내용에 따라서 국가상속문제가 발생할 것을 가정할  때, 북한이 중국과 체결한 일련의 백두산 지역의 국경 획정은 북한 중국간은 물론 이들과 외교관계를 설정한 국가들에 대하여는 유효하다 할 것이며, 국내법(헌법 제 3조)을 근거로 당사자임을 자처하는 한국에서도 유효하다.
 
그러므로 남 북한은 통일후의 국가상속 문제를 고려하여, 남북한이 각자 체결한 합의문서 의 규정내용이나 공문서 등을 분석하여 대비하여야 한다. 먼저 한국은 헌법 제3조의 영토 범위 규정을 개정하여야 한다.

6.  잃어버린 북방영토에 대한 대안은 없는가. 그렇지 않다. 간도 지역인 연변 지역에는 300만 가까운 조선족 동포들이 살고 있으며 연해주 지역도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해간 동포들이 약 5만 이상 돌아와서 정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이 우리 문화, 우리말과 글을 잊지 않고 생활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들이야말로 우리의 고토를 지켜주는 자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세계는 국가 간의 문제에 있어서 국경선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고 그 곳에 어느 민족이 살고 있는냐가 문제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 정부의 재외 국민(해외 동포)에 대한 정책을 전면 수정하여야 한다. 우리 민족에 있어서 북방영토(간도, 연해주)의 중요성을 열거하면, 1)간도지역이 민족 건국의 발상지며 재세이화,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을 실현시킨 곳이다. 2)이 지역이 지정학적으로 국토 방위상 매우 중요한 요충지이다. 3)중국 조선족과 연해주 고려인의 위상확립과 민족 정체성 회복을 위하여, 장래 이 지역이 생존 공간으로서 필요한 지역이다.
 
7. 이에 대한 중국 대응은 매우 심각하다. 특히 중국은 조선족자치주를 의식하여 다방면의 대응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대륙에 존재했던 고조선, 숙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족원(族源)과 성격을 왜곡시키고 있으며, 이들 국가들이 중국 중원 왕조에 예속된 소수 민족의 변방 지방 정권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중국학자들은 왜곡시킨 사료에 근거하여 한  중 국경선을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고구려, 발해시기의 한  중 국경선은 고구려, 발해의 남계(南界)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애초 대륙 지역이 중국에 예속된 땅이라는 중화적인 역사인식을 문헌으로 후세에 남기려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의 간도 영유권에 대한 장기적인 대응책인 것이다. 러시아 역시 발해의 문화의 근원을 달리 보고 우리 민족과의 관련성을 회피하고 있다.
 
8.  탈냉전 후 일어난 외교교섭의 과정을 분석하면  강대국의 눈치나 살피는 사대주의적인 자세를 보였으며, 재외동포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1990년 소련과의 수교시는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 당한 17만 명의 연해주 한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아 당시 재소한인 45만 명의 명예회복을 시키지 못하였다.  수교시 경협 30억불을 제공하면서도 연해주 고려인 자치주 설립을 요구하지 못하였다.

1992년 중국과의 수교 시에도 미해결된 간도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하나의 중국 논리에 따라 대만과 단교까지 하였다.

1909년 청  일이 맺은 간도협약으로 간도지역은 중국 영토로 되어 있다. 이 간도문제는 한  중간에 청산해야하는 중대한 현안임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를 등한시하였다. 그리고 한 중수교회담 전에 간도영유권의 문제를 제기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며, 이 길이 우리민족의 역사를 바로잡고 우리의 고토를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써 북방정책 추진에 반드시 간도영유권의 문제를 병행 추진하여야 한다고 학자들이 주장하였다. 또한 한  중 국교정상화 시대를 맞이하여 정부는 대한제국과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이어받은 유일한 합법정부로서 간도문제가 통일한국의 국경선을 뒤바꾸어 놓을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임을 인식, 대책을 세워야 할 때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지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중국과의 수교과정에서 간도영유권을 방기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 국민들도 간도분쟁의 역사에 대하여 아는 이가 드물다. 특히 간도지역이 과거 우리의 영토로서 치열한 영토분쟁이 일어났던 곳이며, 일본이 대륙진출을 위해 간도를 불법적으로 청에 넘겨주게 되는 간도협약의 실상을 청소년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설혹 알고 있었던 노년층들도 간도라는 지명이 생소할 만큼 잊혀지고 있는 실태인 것이다. 우리민족의 고토이며 북방영토에 대한 간도영유권이 현재 철저하게 망각되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9. 간도영유권이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 망각되어지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누구의 책임인가. 전적으로 우리 정부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간도영유권 분쟁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역사교과서에서도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라나는 2세들에겐 지금의 연변지역이 옛 간도지역의 일부분으로 우리 땅이었다는 사실과 그곳에 사는 조선족 동포가 피를 나눈 같은 민족임을 가르치지 않았다.

또한 간도지역에 대한 영유권이 우리 민족에게 있음을 교육시키지 않았다. 그 결과 간도지
역이 우리의 영토권이 없는 타국으로 인식하였으며, 그곳에 사는 조선족 역시 우리 동족이
아닌 다른 민족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왜 역대 정부는 광복 반세기가 넘도록 간도협약의 무효를 공포하여 간도영유권을 주장하지 못했을까. 왜 국민들에게 간도지역이 우리의 영유권이 있음을 밝히고 교육시키지 못하였을까. 그리고 이제는 간도영유권의 주장이 우리 민족에겐 왜 중요한 것인가를 모두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

북방영토인 간도 지역과 연해주 지역은 이제 잃어버린 영토가 아니라 다시 찾아야 할 영토로서 민족의 절대 과제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철저히 준비하고 계획하여 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2003.7.17 . 독도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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