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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27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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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귀속 문제의 발단

정묘·병자호란을 치룬 이후 조·청 양국 정부는 두만강 건너편의 흑산산맥으로부터 압록강 수례를 포함한 지역과 봉황성 주변의 책문에 이르는 지대를 무인·완충지대로 설정하여 조청 양측은 이 지대의 출입을 금지시켜 왔다.

그러나 중국 산동지방민들이 점차로 만주지역으로 흘러 들어와 개간하는가 하면 제한된 지역이기는 하나 간도일대에는 주로 우리 동포들이 이주하여 개척을 해 나갔다.

따라서 만주 길림성 동남부 일대에 대한 봉금정책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1860년대 이후 우리나라 북방의 함경도, 평안도 지역에 극심한 흉년이 잇다른데다 질병이 만연되어 백성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1865년(고종2년)10월 조정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 평안·함경감사와 남북병영에 대해 월경하는 자를 엄격히 단속하고 수상한 자가 있으면 선참후계 하라고 까지 지시하였다. 그러나 변경의 주민들은 지방관리나 병사들을 오히려 적대시하고 무기를 탈취하는가 하면, 폭력으로 집단월경을 기도하였다.

이 당시 변경민의 어려운 처지를 《吉林地理紀安》같은 책에는 한인들이 그들의 처자를 쌀 한두되를 받고 청인들에 팔아 먹었다고 기록할 정도이었다.

고종 6년(1869년)경 두만강 건너 연해주 일대에는 한민의 이주 가구수가 1천여호가 되었다고 하니 지리적으로 가일층 가까운 간도지방에는 더 많은 이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듯 늘어나는 불법 이주민에 관히 관계 지방관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고 엄금주의를 견지했으나 실효는 커녕 오히려 역효과만 낳아 고종 6년 11월 23일에는 교서를 내려 서정을 일신하고 제반 폐단을 일소하는 차원에서 이들을 위안시켜 나가도록 하였다.

반면 청국정부는 간도, 길림지방에 유입한 한민들에 대해 1870년(고종 7년)길림장군의 명에 의해 영고탑 부도통이 영고탑 및 훈춘관내의 관원에 명해 이주민수와 생활상태를 조사 보고케 하였는데 청구관리들까지도 목불인견에 정수가린이라고 기록할 정도이었다.

이에 영고탑부도통은 길림장군의 명에 따라 이해 12월 경원,회령 부사에게 한·청 양국의 관원을 파견하여 합동으로 현지 조사를 하고 본향으로 돌려보내 안주시켜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한편 청국은 1881년 7월 성경지방의 애양, 봉황 등 변경의 황무지를 개방한 예에 따라 길림성 동남부 즉 두만강 동북안 일대를 개방하고 9월에는 이 지역에 사람들을 불러들여 개간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청나라 예부에서는 조선국왕에게 토문강 동북안 일대의 황무지에 대해 개간하고자 하니 조선의 변방관리들에게 이 사실을 주지시키고 앞으로 조선백성의 월경사례가 없도록 하고 만약 위반자는 엄벌하라고 통보하였다.

이같은 조치는 청의 변경정책의 커다란 변화로서 기종의 조선인 이민들의 지위와 이 일대의 영유권 문제에 중대한 문제를 안겨 주게 되었다.

계속해서 청은 훈춘에 초간국을 설치 개간업무를 관장케 하고 조사원을 파견 개간 가능지를 조사하는  가운데 수 많은 조선인이 이미 이 지역을 개간하여 조선의 함경도 관찰사로부터 지권의 발급을 받고 지적을 작성중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청의 명안·오대징등은 이들 한인들에게 조세를 부과하고 호적을 작성,훈춘과 돈화현 관할로 나누어 청국인으로 취적시켜 길림에 상주하는 청인들과 같이 취급토록 하였다. 이해 겨울 청국정부는 조선인이 토문강을 넘어서 개간 파종하는 자는 중국인으로 간주, 지세를 납입, 중국의 정교를 따라야 하며 연한을 두고 중국 관복으로 바꿔 입어야 하되, 우선은 운남,귀주의 묘족의 예에 의해 취급한다고 하였다.

또한 호적을 사명하여 훈춘과 돈화현 관할에 속하게 하고 소송 사건은 길림에서와 같이 하여 이후로는 사사로히 월간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엄명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고종 19년 청의 일방적인 처사에 항의는 못하고 관련 유민들을 본국으로 되돌려 보내 당해 지방관들에게 적의조치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이해 11월 청의 명안은 황제의 지시에 따라 토문강 이서, 이북에 월간하는 조선인을 돌려보낸다고 통보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유민의 수효가 엄청나게 많고 정착하고 있는 이들을 당장 내쫓는다면 조선의 지방관들이 이들을 안착시키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여 1년간의 유예기간을 두어 돌려보내자고 하고 우선 유민의 수효가 얼마나 되는지를 확실하게 조사하여 조선의 지방관에게 알려주어 적절히 설득, 되돌아가도록 하게 하려 하였다.

고종 20년 4월 돈화현측은 함경도의 회령, 경성, 양읍에 도강해온 조선인은 모두 되돌아가야 한다는 〈秘示〉라는 공고문을 게시하였다. 돈화현의 고시를 본 조선인들은 조선관헌들이 두만을 토문으로 잘못 알고 있음을 깨닫고 크게 놀라 백두산에 세워진 비문을 직접 찾아 나섰다.

그리고 온성, 경성, 회령, 종성 ,무산 등지의 주민들은 경성부사 이정래에게 청국관헌의 두만과 토문을 동일시 함은 돈화현이 생긴지 얼마되지 않아 이 지역의 지리적 지식이 부족한데다 청나라 유민들의 무고에 의한 것이니 청국 관헌이 모를 수 밖에 없을 것이며 도문은 우리나라 경원이하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강임을 돈화현에 알려 경계를 밝혀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때에 유민을 되돌아오게 하는 문제 때문에 조정에서는 서북경략사로 어윤중을 현지에 파견하였다. 고종 20년 5월 어윤중은 종성에 거주하는 김우식을 보내 정계비를 답사하고 분계 강원을 탐사해 오도록 하였다. 김우식이 탐사를 마치고 보고함에 재차 정계비가 서 있는 곳을 탐사하게 하고 서북경략사 어윤중은 재답사 보고를 받고 난후 종싱부사로 하여금 돈화현에 통보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두만강 밖에 토문강의 지류가 있음을 알고 있다. 지도가 있어 참고할 수 있기는 하나 이직 강물을 따라 올라가 보지는 못하였다. 이제 각 고을의 백성들이 개별적으로 강의 수원을 탐사하고나서 보고해 옴에 이들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어 부사가 사람을 파견하여 백두산 정상의 분수령을 답사케 하고 그곳에 세워진 비석의 비문을 탁본해 오게 하였다.

토문의 원류를 답사해 본즉 위의 백성들이 고한바와 일치하여 단지 강안이 모두 벼랑으로 되어 있어 황구령까지만 갔다가 돌아왔다. 우리나라 종성에서 강을 건너 90리를 가면 분계강이 있다. 강 이름이 분계인즉 그곳이 분계된 것이 명백하다. 또 회에 다달으면 이곳이 곧 너의 나라와의 경계라고 하였다. 생각건대 귀현측은 황지를 개간하고 관서를 설치한지 얼마되지 않아 현지 사정을 잘 모르고 있는 듯 하니 실지를 조사하여 강희제가 확정한 경계에 따르도록 해아 할 것이다. 청컨대 귀현은 사람을 파송하여 동행을 약속하고 백두산에 있는 정계비를 실사하고 토문의 발원처를 확인하고 이어서 경계를 밝혀 강토를 판별케 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어윤중이 경략사로 그곳에 간 것은 청의 요구대로 처음에는 간도에 있는 한인들을 청국인으로 국적에 편입시키고저 한다는데 대한 조처에 놀라 이들 이주민들을 되돌아오게 하는 임무를 띠고 갔던 것이다.

그런데 현지 한인들이 살고 있는 곳은 길림계가 아니고 조선의 땅으로 하등 쇄한에 응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반면 청측은 쇄환을 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초간국에서 소와 양식을 주면서 한인들을 불러 모아 개간을 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제반 사정을 파악한 어윤중은 조정에 토문강 경계설을 주장하고 한청 양국이 감계사를 파견하여 경계를 살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이러한 어윤중의 보고에 따라 우리정부에서는 청측에 감계담판을 제의하게 되었다.

양태진(우리나라 영토 이야기. 대륙연구소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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