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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저항의 역사, 제주도

 제주도와 중앙, 그리고 외세

 탐라, 탐모라, 영주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독자적 공동체를 유지하던 제주도가 중앙 정부의 지배체제에 편입된 것은 고려 태조 20년(938), 고려에 투항하고, 마침내 고려 의종 7년(1153) 중앙정부에서 지방관이 파견되면서부터였다.

 이로부터 제주 도민은 중앙 정부와 지방 지배세력으로부터 이중의 수탈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몽골의 제주 침입 후 거기에 끝까지 맞서 싸웠던 김통정의 삼별초 군이 고려 원종 11년(1271) 제주를 내침해 왔을 때 제주 도민의 반응은 그렇게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제주 도민에게 있어  그들 또한 항파두리 성의 축조 등을 강요한 수탈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후 제주를 내침한 여, 몽 연합군은 수탈자를 넘어선 학살자였다. 병선 160여 척에 수륙 1만여 명의 군을 동원한 김방경의 학살자들은 삼별초 군뿐만 아니라 제주 도민까지 공격하였다. 더구나 그들은 삼별초 군을 진압한 후 일본 원정을 떠나면서 제주의 청, 장년을 대규모로 끌고 감으로써 항쟁의 최후 근거지였던 제주도의 도민에게 철저한 보복을 가하였다. 일본 원정이 태풍 등의 이유로 실패하였을 때 제주의 청, 장년 역시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일본은 그 이후로 200여 년 이상 끊임없이 제주를 침략하여 제주 도민을 납치, 학살하면서 제주 도민과 악연을 맺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 명종 10년(1555) 6월에는 60여 척의 병선으로 제주를 침입하는 등 그 창궐이 극에 이른다. 이에 제주 도민은 도내 각처에 환해장성을 축조하고 봉수대와 연대(烟臺)를 설치하여 왜구의 침략 동향을 감시하면서 대비하였고, 침략 시에는 생존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럼에도 중앙 정부와 지방 지배세력의 가혹한 수탈은 한시도 멈추지 않았고, 이에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제주 도민이 스스로의 삶을 지키기 위한 민란이 빈발하게 되었다.

   이재수의 난

이러한 때 제주도에 상륙한 프랑스 천주교가 선교를 빙자하여 제주 도민의 수탈자로 등장하자 도민들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
 
조선의 개항 후 조선을 둘러싸고 타 제국주의 세력과 경합하던 프랑스의 조선 침략 방식의 특징은 천주교를 앞세우고 감행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즉 이 당시 프랑스는 '(아시아 제국의) 식민지화 또는 해외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이며 정치적 무기'로써 천주교의 선교를 적극 활용하였다. 이러한 성격의 천주교가 제주도에 전래된 것은 1899년으로, 1901년에 이르면 영세자가 242명, 예비신자가 약 700명에 이를 정도의 교세 확장을 달성하게 되었다. 천주교의 이와 같은 급격한 교세 확장의 배경에는 신부의 권위를 앞세운 정치적 특권과 봉세관과의 결탁에 의한 경제적 특권이 작용하고 있었다.

즉 신부의 치외법권에 따른 정치적 특권에 빌붙은 무리들과, 당시 새로이 시행된 수취제도에 따라 지방 지배 세력을 대신하여 수취권을 대행하여 경제적 특권을 누리려는 무리들이 대거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이 결과로 천주교도와 제주 도민간의 충돌이 빈발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제 제주도에서 천주교는 농민에게는 봉건적 수탈자로서, 상인에게는 상권을 빼앗으려는 침략자로서, 지방 지배 세력에게는 수취권을 빼앗은 새로운 지방 지배 세력으로서, 또 토속적 신앙이 강한 부녀자에게는 종교적 침략자로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제주 도민은 1901년 이재수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감행하여 제주성을 점령한 다음 도민의 원성의 대상이었던 천주교도를 타도하며 약 5, 6백여 명을 숙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프랑스 제국주의는 '알루에뜨' 와 '쉬프리즈' 라는 두 척의 군함을 보내 함포 사격을 가하면서 제주 도민을 협박하였고, 중앙 정부 또한 강화 수병을 파견하여 협박하기 시작하니, 제주성 점령 이후 투쟁의 지도 원리, 투쟁 대상, 노선 등을 둘러싼 갈등으로 내부 분열을 일으키고 있던 봉기군은 결국 그 해산을 조건으로 일체의 세폐 및 교폐를 혁파할 것, 봉기 가담자의 죄를 문책하지 않을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화해에 응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와 프랑스 제국주의는 그 약속을 어기고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등의 13인의 지도자를 서울로 압송하여 처형하였고 6,315원의 배상금을 제주 도민에게 부과하는 등 정치, 경제적인 보복을 단행하였다.

식민지 시대 제주도민의 고통과 투쟁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 침략의 초기 단계부터 자본의 원시적 축적 단계 특유의 노골적인 폭력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 36년 동안 자국 자본을 살찌우기 위해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산계획', '병참기지화 정책' 등으로 조선 민중의 농업과 산업 및 자원을 철저히 수탈하고, 무단정치와 기만적인 문화정치로 조선 도민을 철저히 억압했으며, 나아가 노예화교육, 황민화운동, 징병 ,징용, 정신대 ,종군위안부 강요 등을 통해 조선 민족 자체를 없애버리려 했다. 미증유의 가혹한 식민지 지배정책으로 제주 도민들 또한 파탄 일보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맞서 제주도민들은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족해방투쟁을 끊임없이 계속해 나간다.

1908년    의병투쟁
1918년    보천교 투쟁
1919년    3.1독립투쟁
1921년    사회주의적 민족해방투쟁 단체인 '반역자 구락부' 조직
1927년    '신인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민족해방투쟁의 지도 이념으로 하다.
          조선공산당 제주군 지부로 발전
1930년    적색혁우동맹 결성
1931년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 결성
1932년    제주 도민들 마침내 조직적으로 일어서다.

   잠녀(잠수) 항쟁과 좌절

일본 제국주의는 수산업에서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1920년 '제주도 해녀어업조합' 을 설립하여 잠수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일본 상인에게 강제로 판매케 하고 동시에 부당한 수수료, 교제비 등의 각종 경비를 징수함으로써 잠수들을 수탈해 왔다. 일제의 이러한 가혹한 수탈에 항의하여 잠수들은 수차에 걸쳐 그 시정을 건의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묵살하고 오히려 수탈을 강화함으로써 잠수들의 불만은 누적되어 갔고, 마침내 1931년 여름, 해산물의 판매를 둘러싼 부정사건을 도화선으로 하여 1932년 1월, 식민지 시대 제주도에서 발생한 민족해방투쟁 중 가장 광범위하고 적극적인 투쟁이 폭발하였다.

1932년 1월 7일의 위력 시위를 시발로 하여, 마침내 1월 12일 약 1천 명의 잠수들은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그 위에 물안경을 끼고 호미와 빗창으로 무장한 다음, 세화리 시장에 이르러, 도를 신년 순시하던 도사(島司)를 포위하여 '출가 증명서 발부 제한의 철폐', '어획물의 현품 판매 및 입찰 경매', '도사의 조합장 겸직 금지' 등을 요구함으로써 한때 도사를 굴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일제 경찰 기구를 완전히 제압하면서 민족해방투쟁을 도 전체로 확장시켜 나갔다.

그러나 일제는 얼마 후 전라도 경찰부 소속의 무장경찰 80여 명을 동원하여 전력을 보강하고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로 제주도내의 민족해방투쟁 세력을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하여 이 사건 시의 피검자 78명 중 11명을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기소하였으며, '조선공산당 재건 제주도위원회' 와 그 외곽 단체를 파괴함으로써 제주도내의 민족해방투쟁 세력은 다시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지하로 잠입해야만 했다.

   대미 결사 항전의 최후 보루

1940년대에 이르러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색이 짙어가자, 제주도를 대미 결사 항전의 최후 보루로 병참화하고 온갖 종류의 공출과 강제 노역, 징용을 강화했다.

일본은 강제 노역과 징용을 통해 제주도 내 모슬포의 대촌 항공대, 진뜨르 비행장, 정뜨르 비행장, 섯알오름 탄약고 등을 건설했고, 북해도, 사할린의 탄광과 남양군도의 전쟁터로 도민을 내몰았다. 또한 공출은 "차라리 징용을 보내 달라"고 간청할 정도로 숨막히는 것이다.

대미 결사 항전의 최후 보루로 진지화된 제주도는 미군의 공습에 직면했고, 이에 따라 도민들의 삶도 벼랑에 서게 되었다.

1945년 2월 14일 마라도 근해, 일본 해방함 제9호 미군기에 피침.
1945년 4월 14일 한림항, 일본 해방함 제31호와 능미호, 미 잠수함에 피침.
1945년 5월 7일  여객선 미군기에 피폭, 도민 280여 명 피살.
1945년 5월 13일 비양도 근처, 일 군함 4척과 수송선 1척, 미 잠수함과 공군기에 피침.
1945년 7월      제주시 사라봉상공, 미, 일 공군기 공중전
1945년 7월      한림항 매립지 무기고 미 공군기에 피폭, 민가 파손 400호, 민간 사망 30여 명, 민간 부상 200여 명

기타, 산지항에 정박 중이던 일본 구축함과 주정공장, 군수창고, 송악산에 구축된 고사포 진지와 더하여 중산간 지대 연일 피폭되는 상황으로 도민들은 연일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해 방

1945년의 '8.15' 해방 직후 한반도에는 해방의 기쁨과 변혁의 열기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민중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라는 중앙과 지방 수준에서의 정부를 조직해 나갔는데 이 정부는 극소수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 양심적 민족주의자들까지도 광범위하게 포괄하고 있는 정부였다.

한편 노동자들은 일제 자본가가 도망함으로써 그 가동이 중단된 공장 및 생산설비를 접수하여 자주적으로 관리해 나갔으며, 농민들 또한 자신들의 피와 땀이 어린 소출을 무위도식하는 지주에게 강제로 빼앗겨야 하는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등 민족이 해방되고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건설해 나가고 있었다.

제주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제주도의 도민은 1945년 9월 10일, 각 마을, 직장 단위에서 자주적으로 조직되고 있던 청년대, 보안대 및 관공서, 기업체, 학교 등의 000관리위원회', 000복구위원회' 등을 모태로 제주도 건준을 건설하였고 이와 함께 각 읍, 면, 리 단위의 인민위원회를 조직해 나갔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이후 제주도 전역을 지배한 '사실상의 정부'로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책의 실시, 도민 생존권과 치안의 확보를 위한 일제 잔류군과의 투쟁 등으로 도민의 적극적 지지를 얻을 수가 있었다.

   미군 진주와 친일파 복귀

그러나 한반도의 남쪽을 점령한 미국은 즉각 민중이 그때까지 이룩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성취물을 빼앗아 가는 일에 돌입하였다

미국은 점령 초기에 일본인의 사유재산권까지 인정하는 조치를 취하려다 민중의 반발에 직면하자, 미군정 법령 제2호 「패전국 소속의 재산의 동결 및 이전 제한의 건」을 공포하여 모든 일본인 재산에 대한 일체의 권리행사를 금지시키고, 이어 동 법령 제4호 「일본 육. 해군 재산에 관한 건」 및 동 제33호 「재한국 일본인 재산의 권리 귀속에 관한 건」을 통해 일본인 재산에 대한 일체의 소유, 지배권이 미군정청에 귀속된다고 일방적으로 공포하였다. 이후 귀속 재산의 접수, 관리, 처리 과정은 민중의 저항을 총·칼로써 분쇄하고, 식민지 시대에 기득권을 행사했던 민족반역자와 친미적 인사에게 반민주적인 특혜를 통하여 집중되었고 이는 결국 미국 자본의 이익과 직결되었다.

한편 미국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등의 민중 정부를 약화, 제거하기 위하여 일제의 식민통치기구를 시급히 복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미국은 맥아더 포고 제1호 제2조를 통하여 식민통치 기구의 존속과 식민통치 관리의 계속적인 직무수행을 명령하였고, 이 결과 식민지 시대 때의 친일관료들이 통치기구로 재기용되기 시작하였다.

정통성 없는 이러한 권력을 물리력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미군은 민중의 자발적인 치안조직에게 해산을 명령하고 기존 친일 경찰조직의 이용을 공식적으로 표명함과 동시에 일본군 출신을 주축으로 한 국방경비대의 창설, 그리고 서북청년단, 민족청년단 등의 극우반공청년단체의 결성을 지원, 원조하였다.

이 조치 이후 해방 후 숨어 지내야 했던 식민지 경찰 8천 여명 중 5천 여명이 다시 미군정의 경찰조직에 참여하게 되고 이 중 80%이상은 경찰 간부직을 맡게되는데 이들이 자신의 처벌을 주장하는 민중에게 강한 적개심을 보이는 것은 뻔한 것이었다.

   악화되는 경제 사정

제주도의 경제 사정은 1946년이 들어서 심각해지고 있었다. 제주도의 경제 상황은 대일교역의 불법화 및 도 승격, 그리고 여기에 따른 통상형태의 붕괴와 북으로부터의 원료 공급의 두절에 의한 공업 및 농업 생산고의 감소 등의 문제에 의해 오히려 더욱 악화되었다. 당시 공업 분야는 패구 공장 이외는 거의 조업이 중지되어 있었으며, 농업생산고 역시 주식인 보리 농사가 대흉작으로 그 수확량은 8, 15전과 비교할 때 1/3에도 못 미치는 것이었다. 이 결과 도민들은 칡뿌리와 해산물, 톳과 보릿겨를 섞어 만든 이른바 '톳밥', 돼지사료인 전분찌꺼기 등으로 연명해 나가야 했다. 이러한 때 미군정의 곡물 수집 강행은 도민의 분노에 기름을 끼얻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46년 중반에 이르러 호열자가 창궐하면서 제주의 경우 1946년 8월 30일 현재 집계된 바에 따르더라도 369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게 된다.
 
미국은 도민들의 생활고가 이렇게 절박함에도 매판 자본가, 지주의 육성, 귀환자가 반입해 온 일본 상품 유통의 불법화, 자국 상품의 광범한 살포 등을 통해 남한경제를 자국 자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작업을 착착 진행했다.
 
이러한 미국의 경제 음모에 대항하여 제주도의 제주농중, 오현중, 제주중 교양과정 학생들 천 수백 명은 1947년 2월10일 읍내 관덕정에서 "조선의 식민지화를 양과자로부터 막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양과자를 절대 배격하자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미군정 중대가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3, 4백 명의 학생들은 반미 구호를 외치면서 공항 활주로에 불을 붙이는 등 격렬히 저항하였다. 결국 미군정 중대에 의해 시위는 통제되었지만, 이후에도 양과자 반대운동은 전도 학생들에게 급속하게 파급되었다.

   3.1 시위와 미군정의 경찰의 총격

1947년 3월 1일, 제주도 내의 제주읍을 비롯한 각 면에서는 연 인원 약 10만 명이 참가하여 조국의 완전한 해방의 조속한 실현을 촉구하는 대규모의 3, 1독립운동 기념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제주읍의 경우 오전 9시를 전후해 오현중 교정에서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들어 온 약 2,000명의 학생과 군중이 3, I기념대회를 개최한 다음, 본 대회장인 북국민학교를 향하여 행진해 나갔고, 이를 미군정이 저지하자 "미군은 이 땅에서 당장 물러가라"는 등의 반미구호를 외치면서 이를 돌파했다.

오전 11시 경 북국민학교에 집결한 약 3만 명의 군중은 '3. I기념 투쟁 제주도위원회'의 주최로 "3,I혁명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는" 것을 결의하는 대회를 열광적으로 진행하고, 이어 오후 2시 경 학교와 마을별로 나누어 가두 시위에 돌입하면서 해산하기 시작하였다.

오후 2시 50분 경, 관덕정 앞의 도민들이 거의 해산했을 때, 한 기마 경관의 말굽에 어린 소년이 채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마 경관이 아무런 응급조치없이 유유히 경찰서 쪽으로 나아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투석을 시작했고 이어 총소리가 터졌다.

당시 목격자들은 한결같이 총성 직전, 관덕정 광장에 시위대가 없었고 100∼150명의 관람 군중들만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때 한 소년이 기마 경관의 발굽에 치이는 소동에 이어진 발포는 위협사격의 수준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등뒤에 총탄을 맞았으며, 또한 관덕정 광장 복판에 쓰러진 사람도 없었다. 미군정 경찰은 명백하게 살인을 감행한 것이다. 6명 피살, 8명 피상.

   제주도민의 항의 총파업과 미군정의 탄압

미군정의 학살에 대응하여 제주 도민은 "싸우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자"는 구호 아래 각 직장에 '3·1공동투쟁위원회' 및 시민 사이에 '3,1사건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3월 10일에는 '제주도 총파업 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제주도 전역에 걸쳐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이 총파업은 3월 18일까지 진행되었는데, 여기에는 총파업 인원 40,852명, 행정기관 23개, 중등학교 13개, 초등학교 92개, 통신기관 8개, 교통기관 7개, 금융기관 8개, 실업단체, 공장, 회사 15개 등 전도의 각 기관이 참여하였고 심지어 애월, 모슬포, 중문지서 등의 경찰관까지 동조하여, 이 결과 전도의 질서가 완전히 마비되는 사태가 발생할 정도로, 대중적인 호소력과 참여도를 보여주는 전 도민적 차원의 반미항쟁이었다.

제주 도민의 저항에 직면한 미군정은 3월 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3월 14일 조병옥을 위시하여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반공청년단체를 파견하여 파업을 분쇄하였고, 곧이어 '제주도 총파업 투쟁위원회' 간부와 직장별 주동자 검거에 나서 지속적으로 약 2,500명을 무더기로 검거하고 고문한 다음 이 중 250여 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병옥 등은 '제주도는 주민의 90% 이상이 빨갱이"라고 악의에 찬 선전을 계속하였고, 서북 청년단원에게는 "제주도는 작은 모스크바"라고 집중적으로 교육되었다. 더불어 미군정은 도 군정 수뇌부를 모두 강성 인물로 교체하여 탄압의 고삐를 바짝 죄어 나가기 시작했다.

   서북청년단

특히 서북청년단은 북한에서의 사회개혁 당시 식민지 시대의 경제적 , 정치적 기득권을 상실하여 남하한 세력들이 1946년 II월 30일 서울에서 결성한 극우반공단체였다. 따라서 이들은 공산주의라면 생리적 거부감에 치를 떨었고 공산주의자라고 의심되는 자에게는 무조건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미군정은 서북청년단의 이러한 성향을 이용, '사상이 불손한 지역' 에 이 세력을 파견하여 민중들을 공격하는 하수인으로 삼았다. 이들은 봉급 없는 경찰 보조 기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활을 위하여 갈취와 약탈, 폭행을 무수히 진행하였다. 이들은 제주 도민의 애국심을 심사한다면서 태극기와 이승만 초상화를 강매하였고, 이에 불응하면 빨갱이로 몰아 죽이는가 하면, 죄 없는 남자를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고 애인에게 접근하여 석방을 핑계로 강간하는 등의 행패를 자행하였다. 이럼으로써 다른 식구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서청단원과의 정략 결혼에 응할 수밖에 없는 처녀들도 있었다.

   총파업의 종식과 분노하는 민심, 그리고 입산

미국이 지휘하는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의 극우반공단체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전도에 걸친 총파업은 마침내 3월 18일 종식되었다. 그러나 총파업의 종식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이 제주 도민을 압살하기 위한 강경책이 날로 도를 더해가자 마침내 도민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위의 수단을 강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미군정은 어김없이 보복의 칼날을 휘둘렀다.

한편 미군정의 식민지 시대 못지 않은 곡물 공출 강요 또한 도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미군정은 제주도가 1946년과 1947년 연 2년째의 혹독한 흉년에 시달리고 있다는 지역 사정을 무시하고 곡물의 공출을 강요함으로써 도민들로 하여금 "미군정이 일제 때만도 못하다"는 판단에 이르게 하였다

따라서 제주 도민은 중산간 부락을 중심으로 미군정의 이러한 공출 강요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였고 이 결과 제주도에서의 공출 실적률은 전국에서 가장 낮을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1947년 8월 8일 안덕면 동광리에서는 공출 강요 차 나온 도군정청 관리에게 공출량을 줄여 줄 것을 청원하던 마을 주민들이 이를 무시한 관리의 폭언과 폭행에 분노하여 3명의 면직원을 구타하였고, 이에 그 다음날 1백여 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이를 보복하기 위한 무차별 수색을 자행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직접적인 행동과 함께 도민들은 극우파인 제주도지사 유해진의 암살을 요구하는 전단을 살포하는 선전 공세도 동시에 진행해 나갔으며 이러한 선전 공세는 "미군 축출", "경찰 타도", 그리고 "우익 저주"를 요구하는 전단의 살포를 통하여 더욱 가열되어 갔다.

이에 대하여 미군정은 8.15를 기하여 다시 도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하여 '3, 1시위사건' 이래 각지에서 발생하였던 사건의 관련자를 예비 검속하고 사상이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자는 모두 검거, 투옥하였다. 이 결과 재개된 검거 열풍을 피하기 위하여 수십 명의 도민 지도자들이 방어적인 자위수단으로 한라산으로 입산하기 시작한 것을 시발로 하여 점차 많은 수의 도민들이 한라산으로 입산하기에 이르렀고, 동시에 경찰, 군에의 피난 입대와 해외 도피도 빈발하게 되었다.

   '한국문제'의 UN 이관

한편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한반도 내 시행이 불가능해지자 미국은 마침내 남쪽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이를 호도하고, 역사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책략으로 '한국문제'를 UN에 이관했다.

이에 따라 내려진 UN에서의 UN감시하의 남, 북한 총선거의 실시' 라는 '한국문제'에 관한 결정은, 결국 미국이 한반도의 북쪽을 제외한 지역에 강력하게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여 현상유지를 모색하고, 이것에 근거하여 사회주의권의 동북아시아 지역으로의 확산을 적극 저지, 봉쇄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대한반도 전략을 수정하는 것을 의미하였고, 이것은 동시에 이후 한반도의 남쪽 지역에서는 미국의 이익에 걸림돌이 되는 어떠한 변혁세력도 사실상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이러한 대한반도 점령정책에 대한 남한 민중의 항의와 투쟁이 '2,7구국투쟁' 등을 통하여 점차 가열되어 가는데, 미국은 특히 반미투쟁의 열기가 높고, 그 투쟁경험과 역량이 풍부한 제주 도민에 대한 집중적인 공세를 계속하였다. 이 결과 1948년 초가 되어서도 제주도에서는 도민들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과 그것에 대한 제주 도민들의 격렬한 저항이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출처: http://cheju43.org/History/H1/h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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