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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6월 18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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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검찰사(檢察使) 이규원과 《검찰일기(檢察日記)

 이규원(李圭遠, 1833 - ?)은 조선 시대 무관으로 자(字)는 성오(星五),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무과에 급제한 후, 1877년(고종 14)통진부사로 나갔다가 1881년에 울릉도 검찰사가 되어 섬을 시찰하고 돌아와 울릉도 개발을 상주했다. 이듬해 어영대장, 총융사를 거쳐 1884년 동남제도개척사, 찰리사(察理使) 겸 제주목사를 역임하였고 한성부 판윤에 이르렀다.

1881년 조정에서는 예조판서로 하여금 울릉도에 일본인이 침입한 사건에 대해 일본 정부에 항의공문을 발송케 하는 동시에 종래의 공도정책을 시정하기 위하여 우선 현지조사를 위해 검찰사를 파견키로 결정한 다음 부호군(副護軍) 이규원을 3월 23일자로 검찰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울릉도 항해는 풍파가 심해 다음해로 출항을 연기했다.
 
이듬해(임오년) 4월에 비로소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은 현지로 출항하게 되었다. 임금을 뵈온 것은 4월 5일이었고 등정한 것은 초열흘이었으며 육로로 원주, 평해를 경유, 구산포에 도착한 것은 4월 27일이었다. 순풍을 기다려 일행 1백여 명이 세척의 배로 출항한 것은 이틀 후인 29일이었다. 울릉도 서안 소황토 구미포에 도착한 것은 그 달 30일 저녁 무렵이었다.
 
이규원 일행은 울릉도에 상륙하여 십여 일 동안 섬 전체를 답사 탐험하여 도벌을 계속하고 있던 일본인 6,7명과 응답을 나누면서 이들의 영토관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규원의 울릉도 검찰일기 가운데 주요 내용을 개괄해 보면 다음과 같다.

1882년(고종 19) 4월 29일. 평해읍에서 십 리쯤 되는 구산포에서 순풍을 만나 세 척의 배로 울릉도를 출범하였다. 일행은 검찰사 이규원, 중추도사 심의완, 군관 출신 서상학, 전 수문장 고종팔, 기타 선원 82명, 포수 20명이었다.

도중에 파도가 심해 배가 몹시 흔들려 어쩔 줄 몰랐다. 다행히도 신시申時(오후 3시∼5시)가 지나서 다시 순풍을 만나 항해할 수 있었다. 
3월 30일 유시酉時(오후 5시∼7시)쯤 되어 울릉도 서면 소황토구미(小黃土邱尾)에 도착하였다. 포구 가에 움막을 짓고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하기에 알아보니 전라도 흥양 삼도거민 김재근(金載謹)이 몇 사람을 이끌고 배를 만들 목재를 마련하던 중이었다.
 
5월 초하루. 풍랑이 심해 포구에 매놓은 배 세 척이 닻줄이 끊어질 지경이라 뱃사람들이 노력해 다른 배의 밧줄을 빌려 사방으로 얽어매 다행히 위급을 면하고 이날 산신당에 기도를 드렸다. 
이달 초이튿날 드디어 산으로 올라 대활강구미에 도착하니 길가에 자갈을 모아 놓은 것이 있는데 주변에 넓적한 큰 돌을 덮어놓은 큰 석장(石葬)들이 많이 보였다.
 
포구에는 평해 출신 최성서가 인솔한 인부 13명이 움막을 짓고 살고 있었다. 경주인 7명은 약초를 캐고 일본인 2명은 움막을 짓고 대나무를 베고 결막예죽(結幕刈竹)중에 있다는 것이다. 이날 30리 가량의 산길을 걸었는데 수목이 해를 가렸고 길은 수풀로 뒤덮였다. 해일이 일고 바닷바람에 옷이 젖을 정도였다. 초막에 다달아 쉬었다.
다음날인 초삼일에 산신당에 제사하고 고개 넘어 흑작(黑灼)에 도착하니 석장이 많았다. 십리나 되는 평원은 사람이 살 만하다. 

포구에서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높이 수천장의 창우암(倡優岩)과 그 옆에 쌍립하고 있는 한 곳은 팔 형제가 다같이 벼슬길에 나갈 정도로 명당이라 하며 지명은 수년포이다.
선창에 이르니 전라도 낙안(樂安)에 사는 선상 이경칠이 인솔한 2명과 초도(草島)에 사는 김근서(金謹瑞)가 인솔한 1명이 각기 움막을 짓고 배를 만들고 있었다.

오대령을 넘고, 다시 홍문가(紅門街)라는 고개를 넘어 들어서니 나리동(羅里洞)이다. 길이가 10리요, 넓이 9리에 산봉우리가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어 가히 성곽을 이룰 정도였다. 이곳에서 길이 70여보 넓이 60보의 못과 그보다 훨씬 작은 못이 있는데 모두 물이 없었다. 날이 저물어 파주 출신 약재상 정인우(鄭仁祐)의 초막에서 잤다. 

이달 초나흘 산신당에 기도하고 동변 최고봉에 올랐다. 사면을 바라보니 해천(海天)이 망망하고 단지 14개의 봉우리만이 우뚝 서 있음이 보인다. 이 봉우리들이 나리동을 둘러싸고 있다. 동으로 십리 내려가서 한 개의 초막이 있는데 함양 출신 약초상 전석규(全錫奎)의 주거처이다. 그는 섬에 들어온 지 십년이나 되어 사람이 살 만한 곳과 토산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산길을 따라 내려오니 풀이 무성한 곳이 있는데 열흘갈이는 됨직하다. 수림속에서 노숙을 하였다. 

초닷새에 고개를 넘어 청포(廳浦)에 다다르니 이양소선(異樣小船) 한 척이 포구에 정박해 있었다. 선체를 살펴보니 길이 칠파(把), 넓이 삼파 대나무로 된 배로서 안에 사람은 없고 해안에 일본인 판막이 있었다. 먼저 연통하고 움막을 들어가니 일본인이 문밖으로 나와 영접하였다. 통변이 없어 말이 통하지 않아 다음과 같은 글로 무답하였다.(도벌중인 왜인들과 직접 필담).
  우리측(문): 오늘 그대들을 보니 일본인임을 알겠다. 언제(몇월 며칠) 섬에 들어왔으며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일본인(답): 일본 동해도와 산양도 출신으로 2년 전부터 벌목공사를 해왔는데 금년 4월에 다시 와서 일하고 있다.
  문: 2년 전부터 이곳에 와서 벌목을 했다면 이 목재는 어디에 쓰려는가? 그동안 너희 나라에서의 방금령(防禁令)도 듣지 못하였느냐?
  답: 사역자(使役者)가 알 것이다. 우리는 사용처도 모른다. 일본 정부의 방금령 역시 들어본 적이 없다.
  문: 작년에 수토관(搜土官)이 와서 보니 일본인이 벌목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에 대해 우리 정부에서 너희 나라 외무성에 공문을 보냈는데 모른단 말이냐?
  답: 그 일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 없다. 남포규곡에 머무르고 있는 자가 알런지도 모르니 불러오겠다.
  문: 너희 일행 중 벼슬아치가 있느냐?
  답: 우리 중에 관리는 없다.
  문: 그러면 너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고용되어 있다는 말이냐?
  답: 아니다. 모두 자의에 의해 일하고 있다.
  문: 남포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이 온 후에 다시 문답하면 어떻겠느냐?
  답: 우리는 그간의 사정을 잘 모른다. 그러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오랫동안 기다렸으나 오지 않아 남포로 사람을 보냈다. 남포는 남쪽 포구로 장근지포(長根之浦)인데 일본인은 도방창으로부터 장작지포에 이르는 사이에 움막을 짓고 머무르고 있으나 수는 알 수 없었다. 바야흐로 산지사방에서 벌목중이므로 섣불리 찾아가 볼 수 도 없어 불러 온 후에 다음과 같이 문답하였다.
 
문: 우리는 왕명을 받들고 이 섬을 두루 살피고 있다. 오늘 여기에 와 그대들을 보게 되었다.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겠노라.
  답: 우리들도 그리 알겠다.
  문: 강토는 경계가 정해져 있거늘 너희들이 어찌 이곳에서 벌목을 하고 있단 말인가?
  답: 우리는 이곳이 타국땅이라는 말은 들은 바 없다. 이곳은 일본땅으로 알고 있으며 남의 땅이라 함은 들은 바 없다. 이미 남포와 규곡에 이곳이 일본의 송도(松島)라 표시되어 있다.
  문: 표본(標本)이 있다 함은 금시초문이며 하물며 입표지경(立標地境)이라니……. 송도라 함은 무슨 소리냐?
  답: 일본제국지도와 여지전도에도 모두 송도라 적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알고 있다.
  문: 이 섬은 울릉도라고 하는 섬으로 신라, 고려, 조선으로 수천년간 전래되어 온 우리 강토인데 너희들이 송도라 함은 어떤 근거인가? 수백년이래 우리 조정이 관리를 두고 다스려 왔는데 너희들이 금법지정(禁法地定)임을 모른다니 말이 되느냐?
  답: 우리들은 이 섬에 와서 벌목을 할 따름이지 섬의 내력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
  문: 여하튼 금법 사실을 모른다고 하여도 죄를 범한 것이며 혹시 알고 행했다면 이 자리에서 논죄하여 처벌함이 마땅하다. 속히 철수해 돌아감이 가하리라.
  답: 그렇게 하겠다.
  문: 벌목의 용도는 무엇이며 귀국시기는 언제인가?
  답: 사용처는 모른다. 돌아갈 시기는 금년 8월(음력 7월) 배가 온뒤이다.
  문: 너희들의 인적 사항을 알고 싶다.
  상대한 내전상장(內田尙長) 이하 4명은 주소, 연령을 게시하고 길전대길(吉田代吉) 이하 4명은 나이, 주소도 모른다고 하였으며 총계는 88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다음에는 동해도, 남해도, 산양도 등의 뱃길에 대한 문답이 있었다.
  문: 표목을 세운 자는 어디 사람이며 어떤 근거에 의해 세우게 되었나?
  답: 2년 전에 이곳에 와서 처음 보았으며 명치 2년(고종 6년 2월 13일)에 암기충조건지(岩崎忠照建之)라 하는 일본인이 세웠는데 어떤 사람인지 어디 살고 있는지 거처는 모른다.

이상과 같이 일본인과의 문답을 마치고 포일(浦逸)로 내려오니 전라도 흥양 삼도인 이경화(李敬化)가 인솔한 인부 13명이 결막조선(結幕造船)중이었으며 장작지포에 도착해보니, 흥해초도인 김내언이 12명의 인부를 거느리고 움막을 짓고 배를 건조하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 숙식할 곳으로 찾아 들어갔다.
 
초엿새 날에는 장작지포에서 통구미로 향하는 도중 해변 바위 사위에 표목을 발견하였는데 길이 6척, 넓이 1척이었다. 거기 써 있기를 '大日本國 松島圭谷 明治 2년 13일 암기충조건지(岩崎忠照建之)'라 하였다. 왜인들과 앞서 문답한 내용과 같았다. 고개를 넘고 절벽사이에 기암이 첩첩한데 초토인 김내윤(金乃允)이 22명의 인부를 이끌고 결막 조선중이었다.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바위밑에서 밤을 보냈다.

초팔일 바위 사잇길로 삼십리 길인 소황토구미 앞에 도착하니 당초에 선박이 도달한 곳이다. 석공을 시켜 섬이름을 새기고 난 후 해가 저물어 쉬었다.
거룻배를 타고 서쪽으로 십여 리를 가니 향목구미포, 대항토구미를 지나 흑작지를 돌아보았다. 왜선창의 한귀퉁이를 돌았는데 경관이 매우 좋았다. 우뚝 솟은 바위가 수백장의 높이로 서 있고 형제바위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독대암은 밑이 둥글고 끝이 뾰족하였다. 표구가 있는데 선반구미라 하며 남쪽 해변에는 자그마한 섬둘이 있는데 일죽도, 일기도이다. 날이 저물어 배에서 내려 죽암 아래 결막지숙(結幕止宿)하였다.
 
초열흘날에 배를 타고 도방청 장작지 통구미에 사태구미 산막동등의 포구를 돌아보니 해일이 일어 서쪽편에 파도가 드높아 배에서 내려 상륙한 후 소홍토구미에서 유숙하였다.
열하룻날 산신께 기도하고 나니 동풍이 차츰 일어 배를 띄울 수 있어 진시辰時(오전 5시∼7시)쯤에 세 척의 배가 일시에 출범할 수 있었다.
열이튿날 해시亥時(오후 9시∼11시)쯤에 울진쪽으로 향했으나 파도가 크게 일어 부득이 정박하여 있다가 바람이 잠잠해지자 구산포에서 하선하였다.

 이상 검찰사 이규원 일행의 울릉도 탐방 기간은 임오년(1882년) 4월 29일부터 5월 13일에 이르기까지 만 14일간이었다. 그동안 울릉도에 상륙 조사한 기간은 5월1일부터 10일간이다. 이 기간에 험준한 산길에 풍찬로속을 거듭해 가며 섬 안을 샅샅이 탐색하고 해변을 돌아 우리 도민과 왜인의 침입 실태를 상세히 알게 되었다. 섬의 개척 가능성과 천연자원, 입지조건도 상세히 조사하였다. 이제까지 기술한 주요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울릉도에서 만난 사람들은 전라도를 필두로 내륙각지에서 바다를 건너와 활동하는 여러 계층의 인물들임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십여 년 전에 이주한 채약자를 필두로 총 1백16명인데 직종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벌목 조선인 91명    ② 채작인 14명
  ③ 채약인 9명          ④ 참죽인(刈竹人) 2명

  둘째, 벌목중인 왜인의 상황을 살펴볼 때 그동안 일본정부가 확약한 금령이 허상임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저들이 우리의 강토를 자기네 땅인 양 입표(立標)한 지도 십수 년이 되고 또한 불법 침입하여 도벌 목재를 반출하는 자만도 칠팔십 명이 넘음을 알게 되었다.

  셋째, 농경이 가능한 장소와 마을을 형성할 장소, 수원지, 포구 등을 조사하였다. 해안선을 골고루 살펴 선박의 기항 적부를 조사하였다.

  넷째, 이밖에도 진귀한 인삼, 약재, 어물 등 다양한 물산의 실태, 왜인의 집단 도벌행위, 이들의 오만불손한 태도에 대해 지난날 안용복의 역사적 활동 사실을 깨우치게 하는 등 울릉도·독도에 대한 영토의식을 높이게 하였다.

귀경후의 복명사항(伏命事項)
이규원이 서울로 돌아와 임금께 정식 복명한 것은 1882년 6월 초닷새 날이다. 복명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 촌락을 형성할 만한 곳이 6∼7개처요,
  둘째, 천연자원이 풍부해 개척만 하면 도민의 생활은 안락할 수 있고,
  셋째, 이 천연의 보고지를 왜인들이 침입, 벌목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저들의 땅인 것처럼 입표까지 하였으니 일본공사에 항의함은 물론 일본 외무성에 항의문을 발송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임금도 크게 감동하고 그간의 공도정책(空島政策)을 버리고 조속히 울릉도 개척에 착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일본정부에 재차 항의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검찰사 이규원의 성실한 답사보고가 보람이 있어 울릉도에 대한 정부의 개발계획이 수립되었다. 이규원의 보고가 있은 지 4,5일만에 임오군란이 일어났지만 기본방침은 바뀌지 않아 예조판서 이회정이 검찰사 이규원의 조사보고를 토대로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가오루에게 일본의 위약(違約)을 문책하는 항의문을 발송하였다.
 
이리하여 《이규원 울릉도 검찰일기(李圭遠 鬱陵島 檢察日記)》는 울릉도의 개척과 일본인의 독도침입에 대한 불법, 부당성을 확인케 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아울러 조선 초기부터 시행되어온 공도정책(空島政策)이 이 시기를 전후해 폐기되고 정부의 적극적인 개발정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양태진 -인물로 본 한국영토사- (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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