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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6월 19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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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발굴】프랑스 라페루즈 탐험대의 울릉도 탐사기

2백10년전 울릉도에서 조선인 목수를 보다

《우리 나라 동해에 있는 큰 섬 울릉도. 서양인 중 이 섬을 최초로 목격한 이들은 프랑스의 라페루즈 탐험대였다. 그때가 1787년(조선조 正祖 11년) 5월27일이니까 지금 으로부터 만 2백10년전의 일이다. 탐험대원 중 이 섬을 가장 먼저 발견한 천문학자 다줄레(Dagelet)의 이름이 붙여진 이래 1950년대까지 1백50여년간 서양 지도에는 이 이 름이 사용되었다. 울릉도 탐사 경위는 「 라페루즈의 세계 탐험기」에 실려 있는데, 이 책의 초판본은 1797년에 출판되었다. 금년은 그로부터 꼭 2백년이 되는 해다.

항해 일지 형식의 이 탐험기에는 울릉도 탐사 경위가 기록되어 있을 뿐아니라 남해안과 동해안의 해안선을 실측하여 작성한 해도(海圖), 제주도 남부 해안 및 울릉도의 실측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하멜 표류기(1668년, 불어 번역판 1670년)」 이래 서양인이 한국을 직접 목격, 관찰하고 과학적으로 측정하여 기록한 최초의 자료이다.

라페루즈 탐험대가 1785~87년 사이에 측정한 해안서, 해도, 섬들의 위치, 산의 높이, 수심 등은 대단히 정확한 것이어서, 프랑스 해군은 이 해도들을 수정 없이 반세기 이상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수치와 비교해도 오차가 미미해, 현재까지도 유효하다고 할 만큼 과학적이고 정밀한 것이었다.

이 책은 한국과 일본 학자들의 독도에 관한 논문에 자주 인용되지만, 「울릉도에서 조선인 목수들이 배를 건조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만 간단히 인용하는 정도다. 특히 중요한 대형 지도첩 중 남해안 및 동해안의 해도 및 울릉도 실측 지도는 잘 소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는 라페루즈 함대가 세계 탐험에 나서게 된 경위와 탐험 활동, 동 함대가 제주도 부근 현재의 한국 영해에 진입해서부터 떠날 때까지의 사정을, 1787년 5월 19~27일 사이의 항해 일지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라페루즈의 세계 탐험기」는 1791년 4월22일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명에 의해 출판 작업에 착수, 1797년 프랑스 국립인쇄소에서 출판됐다. 본문 전4권과 대형 지도첩 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에는 라페루즈 제독의 초상화, 관계 법령, 루이 16세와 해군 대신 드 카스트르 (de Castries)의 지침서, 그때까지의 세계 탐험에 관한 서문, 여러 대양(大洋)에 관한 지리학적, 역사적 기록,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들의 학술 논문 (지리학, 생물학, 화학, 물리학, 천문학, 인종학 등), 도서 목록, 조사할 사항, 장비, 물자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제2권과 제3권은 항해 일지 형식으로 된 라페루즈의 여행기이며 제3권에는 각 도서, 해협, 해안 등에 관한 위도와 경도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제4권은 탐험대원들의 관찰에 의한 각종 보고서, 서신, 총 색인을 수록하고 있다.

지도첩에는 라페루즈 탐험대의 항로를 표시한, 양면에 걸친 세계 지도, 태평양 연안 지도, 대만, 제주도 남부 해안, 한반도의 남해안, 동해, 타타르 해협, 쿠릴 열도, 캄차카 반도 지역의 해도가 11 점인데, 한국과 관련이 있는 것이 5점이나 된다. 그밖의 여러 지역의 섬, 만, 해협을 그린 지도 31 점, 그리고 새(鳥), 곤충, 식물 그림 11 점, 인물·풍 경화 15 점, 여러 나라의 배(船)를 보여 주는 그림 11 점, 탐험대의 프리깃함 2 척을 보여주는 그림 등 도면이 모두 64 면에 달한다.

뒤에 다시 언급되지만, 라페루즈를 포함한 2백여명의 노력과 이들의 목숨, 새로 건조한 2 척의 프리깃함정, 당시로서는 가장 발달된 항해 장비, 측정 장비, 방대한 자료 등이 희생되고 그 대가로 남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바르텔레미 드 르셉스(Barth럏럐y de Lesseps)는 라페루즈 함대원 중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이다. 해군장교인 그는 라페루즈 탐험대장의 비서 겸 통역으로 탐험에 참가했다. 그는 함대가 캄차카 반도의 아바차(Avatcha, 현재의 페트로파블로브스크)에 기항했을 때, 그때까지 작성된 항해 일지, 지도, 학술 보고서 등 문서를 시베리아와 유럽 대륙을 횡단하는 육로로 프랑스 파리까지 가지고 왔다. 바르텔레미 드 르셉스는, 1870년대에 수에즈 운하의 대역사를 완성하여 세계 지도를 바꾼 페르디낭 드 르셉스(Ferdinand de Lesseps)의 삼촌이기도 하다.

루이 16세 지시로 탐험 나서

아무튼 라페루즈 함대는 그후 탐험 활동을 계속하다가 1788년 초에,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뉴칼레도니아 근방의 바니코로(Vanikoro, 현재의 사모아) 섬 근처에서 대원과 선박이 자취도 없이 실종되었다.

라페루즈(La P럕ouse) 백작은 프랑스의 해양탐험가로, 해군 제독 출신이다. 1741년 남프랑스 알비시(市) 근처의 귀오(Guo)성에서 태어나 1788년 남태평양 바니코로(Vani koro)섬에서 사망했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족의 신분으로, 인도 식민지에 근무하던 프랑스인 하급 관리의 딸과 결혼했으며 직계 자손은 없다.

해양에 열정을 가진 라페루즈는, 프랑스 탐험가 부갱빌(Bougainville)이 평민 출신의 해군 장교였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제약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귀족 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귀족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15세 때인 1756년에 해군 장교가 되어 배를 타기 시작했다. 영국과 벌인 「7년 전쟁 (1757~63년)」에 참전, 18세 때인 1759년에 벨-일 (Belle-ile) 부근의 격렬한 해전에서 부상하고 식민지를 넓히려는 영국에 포로로 끌려갔다. 1763년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돼 포로 생활에서 풀려났으며, 1 764년에 해군 중위로 승진했다. 10여년간 프랑스 해안에서 복무했다. 1773~75년에는 인도로 파견되어 인도에서 근무했다.

미국독립전쟁이 발발해, 라페루즈는 유명해질 기회를 만났다. 미국에서 영국의 바이런(Byron) 제독에게 대항하여 눈부신 활약을 했고, 1780년에 대령으로 승진했다. 아스트 레함장으로 영국 전함과 싸워 수차례 전공을 세웠다. 1782년에는 대단히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접근하기에 많은 위험이 따르는 허드슨(Hudson)만의 영국 시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1783년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로써 라페루즈의 해군 생활은 끝났다. 그때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는, 영국의 대탐험가 쿡(Cook)이 끝내지 못한 지역에 대한 탐험을 계속하여 이를 보완하라는 임무를 라페루즈에게 맡기고, 이에 대한 지침서를 직접 써 주었다. 라페루즈의 사명은 무엇보다도 아메리카 대륙의 북부와 아시아 대륙, 특히 쿡이 1776~79년 사이에 실행하지 못한 조선의 동해안, 타타르 해안, 일본의 홋카이도, 쿠릴 열도, 캄차카반도 등을 탐험 관측·조사하는 것이었다.

당시, 과학 기술의 발달에 고무되어, 영국과 프랑스는 세계 탐험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었다. 과학의 발달로 항해술이 발달했고, 위도와 경도를 세밀히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시대의 탐험은 백과사전파들이 표방했던 단순한 「지식의 확대」에 대한 갈망 뿐만이 아니라 식민지를 넓히려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경쟁적인 야망도 크게 작용했다.

최신 항해장비 갖춘 탐험대

라페루즈도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신천지 발견을 위한 탐험에 나서게 된 것이다. 함대는 새로 건조한 두 척의 최신 프리깃함(호위함), 라 부솔(La Boussole)과 라스트롤라 브(L'Astrolabe)로 구성되었다. 모함인 부솔함에는 해군 중위 2명, 소위 3명, 준사관4명, 박식한 과학자, 천문학자, 생물학자 및 화가 10명, 하사관 9명, 포수와 사수 8명, 목 수, 선체 수리 전문가와 닻 담당 10명, 조타수 및 수병 38명, 보트병 12명, 잡역부 9명, 하인 7명 등 계 1백12명이 승선했다. 아스트롤라브호에도 비슷한 인원이 승선했으므로 2백20여명이 탐험에 참가했다.

조사 작업에 필요한 당대 최신 과학 장비와 각종 자료 (중국, 한국, 일본 등에 관한 책과 지도 등), 백과사전, 학술 논문 등도 적재했다. 특히 항해 장비는 그때 처음으로 사용 한 복각계(伏角計, 경사 나침반) 등 세계에서 가장 앞선 것이었고, 페어 플레이를 하는 영국인들은 쿡이 사용했던 장비들을 대여해주기도 했다. 그외에도 2백여명의 인원이 수년간 먹을 식량과 보금품도 두 함정에 나눠 실었다.

탐험대장인 라페루즈는 모함인 부솔의 함장이 되었고, 아스트롤라브는 드 랑글(de Langle) 대령이 함장이었다.

과학자 중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며 수학자·천문학자인 다줄레, 수학자 몽주(Monge)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둘 다 육군사관학교 교수였다. 그밖에 광물학 자, 생물·식물학자, 천문학자, 의사, 인류학자, 원예가, 화가도 여러 명 있었다.

탐험대는 1785년 8월1일 브레스트 군항을 출발했다. 대서양을 남극 방향으로 횡단하면서 마데르(Mad럕e)를 지나 카나리아 군도와 브라질 남단을 거쳐 1786년 케이프 혼을 통과했다. 칠레의 콘셉숀(Concepcion)에서 환대를 받고, 식량, 연료, 음료수를 보충한 후 1786년 3월15일에는 지구의 남반부 해역 탐사의 대장정에 나섰다. 4월9일 파크(P aques)섬에 도착, 그후 북쪽으로 장거리 도항을 시작했다.

라페루즈는 18세기 말엽인 그 시점에, 좋은 측정 장비를 갖추지 못했던 옛날 스페인 항해가들로부터 물려 받은, 위도가 잘못 계산된 세계 지도의 신화를 깨부수는 작업을 하 게 되었다. 샌드위치(하와이) 군도와 미국 서부 해안 사이의 적도 부근에 표시돼 있던 여러 개의 육지들은 라페루즈 일행에 의해 지워질 수밖에 없었다. 샌드위치(하와이) 군 도에서 물물 교환으로 식량 등을 확보한 다음 알래스카를 향해 북상했다.

알래스카는 세인트 엘리(Saint Elie)산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이 지역은 해류가 격렬하여 영국의 탐험가 쿡(Cook)이 항해에 어려움을 겪었던 지역이다. 라페루즈의 업적으로, 비로소 이 지역은 해안이 대단히 복잡하고, 산이 많은 군도(群島)가 산재(散在)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라페루즈일행은 이 해역의 여러 지역을 발견하고 이름을 붙였다. 몬티(Monti)만, 프랑스인 항구, 세노타프(C럑otaphe) 섬 등. 유럽인으로서는 라페루즈가 최초로 이 지역을 탐사했는데, 나중에 밴쿠버(Vancouver)가 이를 보완하 게 된다.

그런데 크로스 사운드(Cross Sound)로 통하는 협만(峽灣, 좁은 만)을 탐사하다가 대형 보트가 좌초하여 탐험대의 해군 장병 21명이 익사했다 (1786. 7. 13). 그래도 실망하 지 않고 체계적인 탐사를 계속 진행했다.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여러 곳에 지명을 붙였다. 『9월 5일, 우리는 9 개의 작은 섬 또는 바위섬 사이를 통과했다. 이 섬들은 벌 거숭이고, 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섬들을 넥케르(Necker, 루이 16세 시대의 프랑스 재상) 군도라 명명했다』

캘리포니아에서 프랑시스캥 선교사들을 만나본 후, 1786년 9월 24일 태평양 횡단을 시작했다. 12월에는 마리안(Mariannes) 군도의 위치를 수정했고 1787년 1월 3일 마카 오에 입항, 한 달 후 필리핀으로 떠났으며 필리핀 기항 후 북상하면서 제주도(화란 이름인 켈패르 - Quelpaert -가 20세기 중엽까지 서양 지도에 사용됨)를 스칠듯이 가까이 지나, 탐험에서 가장 흥미있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동해를 탐험하게 되었다. 이 지역의 육지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잘 그렸지만, 해도는 전부 새로 작성해야 했다. 따라서 라 페루즈일행은 1787년 4월부터 8월까지 넉 달 동안 이 지역의 해도 작성에 전념했다.

1787년 5월27일 울릉도 발견

함대는 5월27일 울릉도를 발견했다. 울릉도의 위치(위도와 경도)를 측정하고, 섬의 실측 지도를 작성한 다음, 블라디보스토크 앞바다를 지나 타타르해협 최북단까지 갔다가, 사할린 섬 동쪽 해안을 타고 내려왔다. 8월2일 일본의 홋카이도와 사할린 열도 사이의 해협을 지나면서 「라페루즈해협」이란 이름을 붙였다. 9월 7일 캄차카 반도의 아바차 에 도착했다. 라페루즈 일행은 러시아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다. 거기서 라페루즈는 자기의 비서, 통역 겸 장교인 드 르셉스로 하여금 해군 대신에게 보낼 탐험대의 자료와 보고서를 육로로 파리까지 가지고 가도록 했다.

탐험대는 9월 29일 캄차카 반도를 출발했다. 쿠릴 열도를 확인하고 측정할 예정이었으나, 서풍이 불어 계획을 취소했다. 태평양을 다시 남하하여, 11월21일 세번째로 적도를 통과, 12월9일 마우나(Maouna) 섬에 기항했다. 12월11일, 사모아 군도의 투투일라(Tutuila) 섬에서 또 한번 비극을 겪게 되었다. 아스트롤라브의 함장인 해군대령 플뢰리오 드 랑글 (Fleuriot de Langle), 물리학자 드 라마농 (de Lamanon)과 해군 수병 11 명이 원주민에게 학살된 것이다. 라페루즈는 자신의 함정 승무원들을 진정시키며, 그 섬 을 떠났다. 1788년 1월26일, 현재의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교외인 보태니 베이 (Botany Bay)에 도착하면서 그동안 작성한 보고서, 해도와 일지 등을 프랑스의 해군성에 보냈다. 거기서 보낸 2월7일자 보고서가 마지막 소식이었다.

1788년 2월, 라페루즈는 여름 동안 통가(Tonga) 군도, 그다음 뉴기니 및 뉴칼레도니아에 가겠다고 했다. 그 지역 탐험을 끝내고, 1789년 7월에 프랑스의 브레스트에 귀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뉴칼레도니아 조금 북방 바니코로(Vanikoro, 현재의 사모아)섬 부근에서, 대원과 선박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 프랑스 국내는 대혁명이 발발하여 혼란했다. 그럼에도 라페루즈의 실종 소식은 프랑스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후 여러 차례 라페루즈의 자취를 찾으려는 조사대를 파견했다. 조사 활동은 19 64년까지 계속되었으나 별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 대혁명의 일대 혼란에도 불구하고 1791년 혁명의회는 1788년에 실종된 라페루즈 탐험대의 수색 활동을 의결하고, 라 비아르데르 (La Billard럕e)가 지휘하는 수색대를 파견했으나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

또 1790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도 라페루즈 탐험대의 수색을 위하여 함대 파견을 제의했다. 당트르카스토 (Joseph Antoine Bruni d'Entrecas teaux)에게 임무가 부여되 었다. 그는 1791년 군함 2 척을 이끌고 수색 활동에 나섰다. 뉴기니 북부 아미로테(Amiraut? 섬에서, 어느 영국 선박의 선장이 라페루즈 탐험대 것으로 보이는 몇 가지 증표 를 보았다는 말을 믿고 그 섬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당트르카스토는 1793년 5월19일, 아주 우연히 「드 라 르세르슈(de la Recher- che)」라 명명된 섬을 발견했다. 이 섬이 바로 바니코로섬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하여 섬에 상륙하지는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라페루즈 탐험대원 2명이 그 섬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라페루즈함대 잔해 찾기

탐험대의 자취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1826년. 영국인 선장 피터 딜론(Peter Dillon)이 바니코로에서 프랑스에서 제조된 물건들이 대량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얘기를 유럽의 모험가들로부터 전해들은 것이다. 그는 또 탐험대의 호위함 (프리깃) 두 척이 좌초한 얘기도 채록했다. 그중 한 척의 승무원 중 좌초에서 살아 남은 사람 가운데 일부는 섬의 원주민과 싸우다가 죽었고, 다른 생존자들은 서쪽으로 떠났는데, 그중 둘은 좌초된 선박에서 회수한 물건들을 이용하여 쪽배를 만들어 타고 갔다고 한다. 딜론은 다음해 프리깃함들이 좌초한 지역에 가서 많은 물건들을 건졌는데, 캄차카에서 육로로 문서를 파리까지 가지고 왔던, 탐험대의 유일한 생존자 드 르셉스가 그 물건들이 아스트롤라 브함 것이라고 확인했다.

1828년, 프랑스의 탐험가 뒤몽 뒤르빌(Dumont d'Urville)이 세계 일주 탐험에서 돌아오는 길에 바니코로섬에서 아스트롤라브의 잔해를 또 회수했다. 그는 또 희생자를 추모 하기 위해 3월14일 그 섬에 작은 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라페루즈 탐험대의 모함은 현재까지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1844년 라페루즈가 태어난 알비 시는 그의 동상을 건 립했다.

1883년, 해군 대위 베니에(B럑ier)가 또다시 아스트롤라브의 유물을 회수했다. 1888년 4월29일에는, 파리의 지리학회가 라페루즈 사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대대적 으로 개최했다. 그때 간행된 동 지리학회지는 그때까지 라페루즈에 관하여 출판된 논문 및 저서의 목록을 수록했는데, 그 수가 자그마치 3백86편에 달했다.

1958년, 해저 잠수에 의한 탐사 작업을 실시하여 아스트롤라브함의 닻을 포함한 물건들을 또 건져냈다. 그 이듬해 프랑스의 유명한 화산 전문가 아룬 타지에프(Haroun Taz ieff) 조사팀이 역시 아스트롤라브함 포 3 문을 건져냈다.

1962년이 되어서야, 뉴질랜드사람 리스 디스콤브 (Reece Discombe)가 마침내, 암초장벽의 갈라진 틈에서 모함 부솔의 잔해를 발견했다. 1964년 프랑스 해군은 조사대를 파견했다. 조사대는 브로사르(Brossard) 대령과 브로세(Brosset) 소령이 지휘했는데, 조사단은 이 잔해들이 부솔함 것임을 확인했다. 브로사르대령은, 좌초된 상황으로 미 루어 보아, 선박은 폭풍우에 밀려 암초에 부딪히면서 산산이 부서졌고, 라페루즈를 포함한 몇 명의 생존자들은 해안에 접근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다음은 1787년 5월, 프랑스의 라페루즈 탐험대가 제주도 남쪽 해안, 한반도의 남해안, 대한 해협을 거쳐 동해에 이르러 울릉도를 목격하는 경위에 관한 기록이다.

【1787년 5월19일】 짙은 안개와 함께 15일간이나 계속된 평온한 날씨가 변하여 바람은 북서 방향으로 고정되었고 대단히 시원했다. 일기는 흐리고 희끄무레했지만, 수평 선이 수십km에 펼쳐졌다. 지금까지 그렇게도 잔잔했던 바다에는 풍랑이 대단히 심하게 일었다. 이때 닻이 닿는 수심은 약 46m였다. 나는 일순간도 지체 없이 출발 신호를 했고, 북동 1/4동방향(東方向), 제주도(켈패르섬)로 항로를 지도했다. 제주도는 일본 해협에 진입하기 전의 최초의 인식 지점이다. 이 섬은 1635년 홀랜드 선박 스패로우 호크 (Sparrow Hawk)호가 좌초함으로써 유럽 사람들에게 알려졌는데, 이 시기에 조선왕의 지배하에 있었다.

조선 해안 관찰

우리는 5월21일 이 섬을 알게 되었는데, 거리 측정에는 이상적인, 더 할 수 없이 맑은 일기였다. 이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한 섬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섬의 남쪽 첨단부의 위치를 북위 33°15', 동경 124°15' (위도는 오늘날의 수치와 같고, 경도는 현재 126°15'이므로 약 2° 정도 차이가 남)로 확정했다. 나는 섬에서 11km 떨어져 항해하면서 67 km(제주도 동서의 길이는 73 km)에 걸쳐서 전개된 해안을 최대한 세심하게 측정했고, 이를 베르니제(Bernizet) 씨가 지도로 작정했다. 정상의 높이는 약 1천9백50m 였고, 1백~1백10km 거리에서 식별할 수 있었다.

정상은 섬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고, 이 산 자체가 섬인 것 같았다. 토지는 매우 완만한 경사로 바다까지 내려왔다. 이 경사면에 있는 집들은 마치 대강당의 층계처럼 층을 이루고 있었다. 땅은 아주 높은 지대까지 경작된 듯했다. 망원경을 통해 밭과 밭 사이의 구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밭이 아주 작게 나누어진 것으로 보아 인구가 많음을 알 수 있었다. 각종 경작물이 매우 다양하게 자라는 모습은 이 섬을 더욱 아름답게 했다.

불행히도 이 섬은 외국인과의 소통이 금지된 민족에 속하며, 이 민족은 이 나라 해안에 표류하는 불행을 겪는 모든 사람을 노예 상태에 억류해 둔다. 스패로우 호크함의 네덜 란드 사람들 중 몇 사람은, 18년 간의 억류 생활 중 여러 차례 매를 맞았고, 어느날 쪽배를 탈취하여 일본을 거쳐,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로 갔고, 거기서 마침내 암스테르 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이야기 (「하멜 표류기」를 말함)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섬의 해안에 보트(canot)를 보내는 것은 적합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는 두 척의 쪽배가 해안을 떠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 배들은 우리와의 거리 5~6km 이내로 접근하지 않았다. 짐작건대, 그들의 목적은 단지 우리를 관찰하 고, 이에 대하여 조선 해안에 경보를 보내는 것일 것이다. 나는 자정까지 북동 1/4동방향으로 항로를 계속했고, 날이 새기를 기다리면서 기관을 껐다. 날씨는 흐리고 짙은 안 개가 끼었다. 서쪽으로 제주도의 북동 첨단부가 보였다. 나는 조선 본토에 접근하기 위해 항로를 북북동에 고정했다. 우리는 시간마다 수심을 측정했다. 수심은 1백10~1백3 0m였다.

【5월 20일】 날이 밝아, 한반도 앞에 길이 83 km 이상에 걸쳐 일련의 체인을 이루고 있는 여러 섬들과 바위섬들을 확인했다. 이 섬들은 북동 및 남서 방향으로 펼쳐져 있었 고, 그중 가장 남단에 있는 섬들의 위치는 북위 35°15', 동경 127°7'였다. 짙은 안개 때문에 대륙(한반도)은 볼 수 없었는데, 거리는 28~33 km였다. 우리는 한반도를 다음 날(5월21일) 아침에야 볼 수 있었다. 한반도는 수많은 섬들을 앞에 두고, 그 뒤에 자태를 나타냈다. 이 작은 섬들의 남쪽 11 km 지점에 있는 항아리형 해저는 수심이 64m였 다. 하늘은 계속 흐리고, 희끄무레했다. 그러나 해가 안개를 꿰뚫었고, 우리는 경도와 위도를 보다 잘 측정할 수 있었다. 이는 지리 지식을 위해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가 사용하고 있는 세계 지도는, 일본 지도 또는 조선 지도를 바탕으로 예수회 선교사들이 제작한 것들인데, 지금까지 어떤 유럽 선박도, 이 지도상에 나타나 있는 해양들을 지나간 적이 없었다.

봉화 오르는 것 보다

사실, 이들 선교사들은 오차가 되도록이면 적게 나도록 북경을 기준으로 하여 세심하게 측정한 위도에 기초하여, 관측한 육로를 바탕으로 세계 지도를 수정했다. 이들이 아시아 이 지역의 지리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만이 우리에게 진실과 아주 가까운 지도들을 작성하여 알려 줄 수 있었던 것이다. 항해가들은 다만 해도(海圖) 부 분의 세부 사항이 빠진 것만을 유감으로 생각하겠지만, 육로로만 여행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해도를 그릴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5월 25일】 우리는 밤에 조선해협을 통과했다. 해가 진 후, 동 1/4북동 방향에서 북쪽으로 펼쳐진 일본 해안과 북서에서 북으로 펼쳐진 조선해안을 관측했다. 북동쪽 바다 가 대단히 넓은 것으로 보였다. 거기로부터 넘실거리는 큰 파도가 오고 있었으므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바람은 남서풍이었고, 매우 시원했으며 밤은 밝았다. 우리는 바람 을 뒤로 하고, 최소한의 돛만 올리고, 시속 3.5km로 항해했다. 이는 밤에 측정한 수치들을 해가 뜰 때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측정치를 다줄레씨가 검토했으므로, 우리 가 작성한 지도는 정확하며, 어떤 착오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매 30 분마다 수심을 측정했다. 조선해안이 일본 해안보다 더 흥미로울 것 같아, 나는 조선 해안 11km까지 접 근하여, 이에 평행하는 항로를 취했다. 대륙 해안과 일본 해안(쓰시마)의 폭은 83 km였는데, 제주도로부터 조선의 남해안에 걸쳐 계속되는 작은 바위섬들에 의해 가장 좁은 부분은 56 km까지 줄어들었다. 이 섬들의 행렬은 우리가 반도의 남동 첨단부에 다다랐을 때 끝났다.

우리는 산 꼭대기에 유럽의 성곽과 꼭 닮은 성(城)을 몇 개 보았다. 아마도 일본인들의 침략에 대비한 것으로 보였다. 이 부분의 해안은 항해하기에 아주 쾌적했다. 어떤 위험 도 없고, 해안에서 16 km 떨어진 항아리형 해저의 수심은 1백10m 정도였다. 이 나라는 산이 많고, 매우 건조한 것 같았다. 어떤 산골짜기에는 아직도 눈이 완전히 녹지 않았 고, 땅은 경작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많은 집들이 여기 저기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10여 척의 작은 돛배가 있었는데, 이 배들은 중국 배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돛은 중국 배와 같이 거적(돗자리)으로 되어 있었다.

우리 함정들을 보고서도 거의 놀라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의 행동이 어떤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경우, 우리가 그들에게 접근하기 전에, 그들은 시간적으로 충분히 해안에 닿을 수 있을 만큼 해안에 아주 가까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용감히 우리에게 접근해 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 배들은 우리의 존재에 개의치 않고, 그들의 항로를 계속했으 며, 우리의 모습이 전혀 새로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런데 11시경에, 배 두 척이 우리를 알아보기 위해 돛을 올린 다음, 4 km 거리 까지 접근하여 약 두 시간 가까이 우리를 따라온 후, 아침에 그들이 출발한 항구로 되돌아 가는 것을 보았다. 이로써 우리의 존재가 조선 해안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오후에는 모든 산꼭대기에 봉화가 오르는 것을 보았다.

【5월 26일】 1백70km 이상에 걸쳐 전개된 해안(동해안)을 관측할 수 있어서, 우리의 탐험 일정 중에서도 가장 멋지고 흥미있는 날 중의 하나였다. 맑은 날씨임에도 불구하 고, 기압계는 내려갔다. 이 기압계가 여러번 틀린 적이 있었으므로, 개의치 않고 우리는 달빛을 이용하여 해안을 식별해 가면서 자정까지 항해를 계속했다. 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강하게 훅훅 불었다.

그런데, 구름은 이같이 훅훅 부는 바람을 예고한 바가 없었다. 하늘은 맑고 고요했다. 날은 아주 어두워졌고, 우리는 동풍에 함정이 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구름이 이같은 변화를 예고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 경고를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이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즉, 망루 감시인들이 돛의 꼭대기에서, 가마솥 화구(火口)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증기가, 약 30 초 간격으로 훅훅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고 소리를 질렀다. 모든 장교들이 돛대 의 꼭대기에 올라갔는데, 모두 똑같은 열기를 체험했다고 했다. 그러나 갑판의 온도는 14도였다.

그래서 앵무새 횃대에 온도계를 올려 보내 보았다. 온도가 20도까지 올라갔다. 훅훅 일정 간격으로 부는 열기는 빨리 지나갔으므로, 그 사이 사이의 온도는 해면의 온도와 다 르지 않았다.

그날밤, 우리는 북풍을 만났는데, 북풍은 7~8 시간밖에 계속되지 않았다. 바다에는 풍랑이 아주 심했다. 이 위치에서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해협이 상당히 넓었으므로, 우리 는 나쁜 날씨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울릉도에서 만난 조선인 목수

이튿날(5월27일) 나는 대륙에서 17 km 거리에 접근했다. 안개는 끼지 않았고, 우리는 전날 밤에 본 산꼭대기들을 확인했다. 바람의 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약간 북쪽으로 전진해 있었고, 해안이 북북서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동쪽 첨단부(부산 부근)를 지난 후, 조선해안의 가장 흥미있는 부분의 위치(좌표)를 확정했다. 일본 본도(本島)의 남서 첨단으로 향로를 잡고 있는 것으로 믿었다. 킹(King) 선장이 이 섬(일본의 本島)의 북동 방향을 정확한 관측에 맞추었다. 이 두 점은 드디어 지리학자들이 범한 지도상의 불확실성을 수정하여 확정할 수 있게 했다. 따라서 지리학자들은 해안의 윤곽을 그리는데만 그들의 상상력을 발동하면 되게 되었다.

【5월27일】 나는 동쪽(동해)에 도달했다는 신호를 발했다. 그 조금 후, 북북동에 어떤 지도에도 나타나 있지 않은 섬 하나를 발견했다. 이 섬은 조선의 해안으로부터 약 1백 10km (실제로 1백37km) 떨어진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이 섬에 접근하려고 했으나, 섬은 바람 방향과 같은 방향이었다. 다행히도 밤 사이에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섬을 측정하기 위해, 해가 뜰 무렵, 섬 방향으로 향했다. 나는 이 섬을 제일 먼저 발견한 천문학자의 이름을 따서 이 섬을 다줄레라 명명했다. 섬의 둘레는 17 km 밖에 안되었 다. 우리는 섬에서 1.9 km 떨어져서 섬을 거의 한 바퀴 돌았지만 깊은 곳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보트를 바다에 내리기로 결정하고, 부탱(Boutin) 씨에게 육지까지 수심 을 측정하라는 명령도 했다.

그는 해안이 펼쳐지는, 물결이 일기 시작하는 곳의 수심이 약 1백40m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곳은 섬에서 약 2백m거리였다. 섬의 북동 첨단부는 북위 37°25', 동경 129°2' (울릉도 전체의 실제 좌표는 37°14'~37°33'/130°48'~131°52')였다. 섬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으나, 정상에서 바닷가까지 대단히 아름다운 나무들로 덮여 있었다. 상륙이 가능한 7 개의 작은 만(內浦)를 제외하고는, 깎아 지른 성벽과도 같이 장엄한 바위 성벽이 섬 전체를 두르고 있었다.

우리는 이 내포들에서 건조중에 있는, 중국 배와 똑 같이 생긴 배들을 보았다. 포의 사정 거리 정도에 있는 우리 함정들이 일꾼들을 놀라게 한 듯했고, 그들은 작업장에서 50 보 정도 떨어진 숲 속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우리가 본 것은 몇 채의 움막집 뿐이었고, 촌락과 경작물은 없었다. 따라서 다줄레 섬에서 불과 1백10 km 밖에 안되는 육지에 사는 조선인 목수들이 식량을 가지고 이 섬에 와서 여름 동안 배를 건조하여, 이를 육지에 가져다 파는 것으로 보였다. 이 생각은 거의 틀림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섬의 서부 첨단부로 돌아왔을 때, 이 첨단부에 가려서 우리 선박이 오는 것을 볼 수 없었던 다른 한 작업장의 일꾼들이, 선박 건조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 는데, 우리를 보자 그들은 놀랐다. 그들 중 우리를 조금도 겁내지 않는 것같은 2~3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숲으로 도망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선량한 사람들이며, 그들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득시킬 수 있도록, 나는 정박 장소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강한 조류가 우리를 육지에서 멀리 밀어냈다. 밤이 다 가왔다. 우리가 그때까지 바람에 밀려났던 바와 같이, 계속 더 밀려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과, 내가 부탱씨 지휘 아래 파견한 보트가 함정으로 되돌아 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 때문에, 나는 그때 해안에 막 상륙하려고 하던 부탱에게 신호를 보내 귀환하도록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해류에 밀려 서쪽에 멀리 떨어져 있던 아스트롤라브 호를 그들(부탱 일행)가까이 접근시켰다. 바닷바람을 중간에서 막아주는 다줄레섬의 높은 산에 의하여 우리는 조용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여기서 항해 일지는 5월 30일로 건너뛰어, 타타르 해안으로 항로를 잡고 가던 중 만난 일본 배의 묘사로 넘어 간다.

라페루즈 「발견」의 의의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라페루즈의 탐험기는 조선조 정조(朝鮮朝 正祖) 11년 당시 우리나라 해안의 경계 상황을 알려 주고 있다. 두 척의 돛배가 접근하여 감시 항해를 했으 며, 부산 부근의 산꼭대기에 여러 개의 성이 있었고, 산봉우리마다 봉화가 올라갔다는 것이 그것이다. 또 산등성이 높은 지대까지 사람이 살고, 농작물을 경작하고 있었으며 인구가 많은 것으로 보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라페루즈 탐험대가 측정한 울릉도는, 제주도 남쪽 해안 및 남해한 일대와 더불어 한국의 영토 중 가장 먼저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에 의하여 정확한 위 도 및 경도, 그 규모가 파악돼 서양의 해도와 지도에 오르게 됐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통용되었고, 라페루즈 일행이 탐험중 사용한, 서양에서 발간된 조선 지도에 울릉도는 「Fanling-tao」로, 독도(獨島)는 그 바로 왼쪽에 「Tchiangchan-tao」(千山島)로 표기되어 있었다. 다만, 라페루즈 탐험대가 제작한 해도에 다줄레(울릉도)는 정확한 위 치에 올려놓았으나, 그 옆에 있던 「Fanling-tao」와 「Tchiang chan-tao」는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이는 「Fanling-tao」가 그들이 발견한 다줄레섬(울릉도)과 동일한 섬이란 사실은 모르고, 대륙 가까이에 울릉도와는 별개의 섬 두 개가 더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이를 확인해 보려고 하지는 않은 것 같다.

라페루즈의 「발견」에 의하여, 울릉도의 좌표(위도와 경도), 섬의 둘레, 본토로부터의 거리가 정확히 파악되어 다줄레라는 이름으로 세계 지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측정 이 정확하였으므로 (경도에서 전체적으로 2도 정도의 오차가 있지만) 그것은 그로써 확정적인 사실이 되어, 수정 없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며, 다줄레라는 명칭은 20세기 초반까지 그대로 사용되었다.

라페루즈보다 10년 뒤인 1797년에 영국 해군 중령 브루톤(William Robert Broughton)이 지휘하는 군함 프로비던스(Providence)호가 타타르 해협으로부터 원산 앞 바다를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면서 관측한 후, 현재의 강원도 고성 조금 북쪽 한반도 가까이에 울릉도로 보이는 아르고노트(Argonaute) 섬을 발견하였다 하여, 1820~50년경의 서양 지도에는, 위에서 말한 「Fanlin-tao」와 「Tchingchan-tao」는 사라지고 다줄레 섬 외에 아르고노트 섬도 나타나 있는데, 그후에 아르고노트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어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울릉도·독도 한국영토 입증

20세기 초엽, 일제의 한반도 강점기에는 일본 지도의 영향을 받아 울릉도에는 울릉도의 일본식 발음인 「우츠료(Utsuryo)」와 일본 이름인 「마츠시마(Matsushima)」가 다줄레와 함께 사용되다가, 광복후 대한민국 수립 이래 한국 지도의 영향으로 60년대 이후부터는 「울릉도(Ullung-do)」로 표기되고 있다.

한반도에서 독도까지의 최단 거리와, 일본 본토에서 독도까지의 최단거리는 215 km 내외로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울릉도에서 독도까지의 거리는 92 km, 일본의 오 키(隱岐) 섬에서 독도까지의 거리는 1백60 km로, 독도는 울릉도에서 훨씬 더 가깝다. 독도의 지질도 울릉도와 같다고 한다. 따라서 학자들은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울릉도의 영유(領有)가 밝혀지면 독도의 영유는 자연히 이에 따라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라페루즈 탐험기는 객관적인 제3자의 관찰로 울릉도가 한국 섬 임을 밝혀 주고 있다. 즉 1787년 (正祖 11년) 5월에, 적어도 2개 집단의 한국(당시 조선) 사람들이 울릉도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해변에서 배를 건조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각 집단이 십여 명 정도 된다고 쳐도 20 여명이 무리를 지어, 좋은 재목이 풍부한 울릉도에서 나무를 베어, 배를 건조하고 있었음은, 당시 중앙 정부의 공도(空島) 정책이 계 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이 이 섬에 항시 살고 있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수시로 건너가 여러 달 동안 살면서 어로, 벌목, 선박 건조를 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공도정책은 1416년부터 실시되어 1881년 울릉도 개척이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중앙정부에서 때때로 관리를 파견하여 이주민의 현황과 섬의 물산을 조사케 하며, 주민을 데리고 나오게 하는 등 울릉도에 대한 지배(통치 행위)는 계속하고 있었다.

어떤 논문에는 라페루즈 탐험대가 독도를 발견하고 함대의 모함인 부솔의 이름을 따서 「부솔」이라 명명했지만 위치가 잘못되어 나중에 서양 지도에서 사라졌다고 하는데 , 이는 사실과 다르다. 라페루즈 함대는 독도를 보지 못하고 북상했으며 1797년도의 지도첩에는 어디에도 동해에 「부솔」이란 이름의 섬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1864 년에 프랑스 해군성 해도국이 작성한 동해안 해도에 「부솔」이란 이름이 울릉도 바로 옆의 조그만 섬 죽서(竹嶼)에 맞추어 나와 있고, 울릉도는 「마츠시마」 (최고봉 1219 m), 독도는 「리앙쿠르」로 되어 있다. 즉, 이는 「부솔」이란 이름을 나중에 붙인 것이되, 독도가 아닌 죽서에 맞추었음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조선인들이 본토에서 1백37km나 떨어진 울릉도에 와서 배를 건조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에 조선의 선박 건조 기술, 항해술, 어업이 상당히 발달했음을 뜻한다.

라페루즈의 탐험대는 울릉도 상륙 일보전에 철수하여 독도는 보지 못하고 항로를 북쪽으로 하여 타타르 해협으로 향하고 만다.

결론적으로, 라페루즈 탐험기 및 이에 딸린 지도첩의 30여면에 달하는 지도 중 한반도, 남해안, 동해안이 나타나 있는 지도가 5점이나 된다. 그로 인하여 울릉도의 존재가 과 학적으로 정확히 파악되어 다줄레라는 이름으로 서양의 세계 지도에 오르게 돼 근 1백50여년동안 사용되었다. 현재의 지도에는 대부분 「울릉도(Ullung-do)」로 나온다.

라페루즈 일행은 베테랑 해군 장교, 학자들이었고 이들은 많은 동양 관계 자료를 함정에 싣고 다니며 탐독하면서 실제와 대조하고, 세밀히 측정하여 해도를 작성했다. 당시 로서는 가장 발달되고, 과학적인 장비를 사용했으므로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사람, 의복, 배 모양에 혼동을 일으킬 염려는 조금도 없다. 이는 이 책에 나오는 중국 배나 일본 배의 묘사 부분 등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울릉도는 나무가 울창하며 주민이 살고 있었는지는 멀리서 보아서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나오는, 「조선인 목수들」「선박 건조장」 「움막」 「이들이 건조중인 배는 중국배와 꼭 같은 형」이었다는 기록은, 울릉도는 한국인 주민들이 거주하는 한국 고유의 영토임을 입증한다. 이를 확대 하면, 그 부속 도서인 독도도 한국령임을 시사한다. 이런 여러 관점에서 볼 때, 「라페루즈의 세계 탐험기」는 우리에게 그 의미가 크다고 본다.

신동아 1997.6월호
 
이진명<프랑스 리옹3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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