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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6월 26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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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울릉도를 지켜온 애국의 충정

울릉도와 독도는 동해 저멀리 외로이 떨어져 있다. 울릉도는 본토와 가장 가까운 강원도 삼척 원덕과도 137Km, 배가 많이 다니는 포항과는 217Km 떨어져 있다. 게다가 날씨가 약간만 나빠도 배가 묶여 육지와의 교통이 끊어진다. 요즘은 전화가 잘되어 있어서 소식은 전하고 텔레비 방송도 있어서 육지 소식이 잘 연결되기는 하지만 대신 울릉도의 소식은 잘 들리지 않는다.
독도는 울릉도에서 동쪽으로 92Km 떨어져 있다. 예전에는 뱃길로 2-3일 걸리는 곳이었지만 요즘은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독도는 울릉도에서 날씨가 맑은 날은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러나 날씨는 울릉도보다 더 변화가 심하다. 그래서 뱃사람이나 항상 독도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면 독도의 맑은 날씨를 구경하기 힘든다.

독도와 울릉도에는 원래 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역사 기록으로 보아도 그렇다. 이미 조선 시대부터 일본 사람들이 울릉도를 드나들며 많은 나무를 벌채하고 배를 짓고 했으며 일제 시기에는 엄청난 벌채가 이루어 졌으니 얼마나 나무가 많았는지를 알수 있다. 독도도 지금은 그냥 벌거숭이 섬이지만 예전에는 향나무를 비롯해 무성한 나무숲이 있었다는 것이 울릉도 주민들의 증언이다. 1980년대에 독도에 들어갔다 온 울릉주민들의 증언을 들어 보아도 굵은 향나무 그루터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요즘 벌거벗은 독도는 아마도 한말과 일제때의 남벌과 해방이후 1945년-50년에 걸쳐 오끼나와에서 매일 수십대씩 일본인 안내자를 태우고 날아와 섬전체를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한 미B-29기의 폭격연습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쪽 끝 외딴 곳에 있으면서 우리 동쪽 바다를 지키고 있는 울릉도와 독도는 험한 날씨 때문에 육지와의 연결이 다른 곳보다 어렵지만 그러나 바로 어렵게 만드는 그 바다가 주민들의 생명줄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인공으로 항생제를 먹으며 길러진 물고기만 맛보다가 울릉도에 가서 넓은 바다에서 바로 잡아온 물고기를 먹어 보면 물고기 맛이란게 어떤지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냥 싱싱하다는 말로서는 무언가 모자라는 자연속에서 저절로 자란 맛이 가지는 독특한 향취는 시인의 손길을 빌어야 아마 제대로 표현되지 않겠는가 싶다.

독도에는 약 600여종의 물고기와 조개가 산다. 빛깔이 아름다워 열대어를 연상시킨다. 독도에서는 조개류가 종류도 많지만 맛도 좋고 크기도 엄청나다. 전복 하나가 1.5Kg 정도이니 짐작이 갈 것이다. 동도 서도와 68개의 바위덩이로 이루어진 독도는 넓이가 18만 평방Km, 5만평이 훨씬 넘는 상당히 큰 섬이다. 사진으로만 보면 위용을 알 수 없지만 직접 현지에 가보면 아주 우람하고 큰 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울릉도는 바다에서 나는 소산 뿐만 아니라 성인봉 등산으로도 인기가 있다. 높이가 982m지만 그러나 육지산으로 치면 1000m가 훨씬 넘는 높이와 맞먹는데 산이 부드러워 어려움없이 오를수 있다.

울릉도, 독도와 안용복의 구국 활동
울릉도와 독도는 이렇게 산물이 풍부하고 엄청난 자원이 묻혀 있지만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으로 있기에 바로 동해바다가 우리 바다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한국이 그 자산적 가치를 충분히 이용하지 못하여 아직도 그 위력을 국민들이 제대로 모르고 있지만 요즘은 바다가 육지와 같은 어떤면에서는 육지보다 더 높은 경제적 군사적 가치를 가지는 시대이다.

만약 울릉도와 독도를 대마도처럼 일본에게 넘겨주었다면 아마도 한국은 존속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바다가 하나도 없이 완전히 포위된채 끊임없이 사방으로 시달림을 받는다면 무슨 능력으로 살아 남을수 있겠는가.

울릉도가 우리 영토가 된 것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년) 하슬라 지역 책임자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 신라 영토로 편입 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 우산국의 마지막 왕이 우해왕이었는데 대단히 용맹하여 대마도를 정벌하고 대마도 왕의 딸을 데려와 부인을 삼았는데 풍미인이라고 일렀다. 우해왕이 풍미인을 위해 신라해변을 노략질하여 결국 신라의 정벌을 자초하였다.

신라장군 이사부가 군사를 끌고 왔으나 바다에 도가 튼 우산국 군사를 이길수가 없었다. 꾀를 내어 나무사자를 만들어 입에서 불을 토하게 하여 우산국 군사들과 우해왕의 항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한국 영토가 된 연대를 이사부의 정벌부터로 잡은 점이다. 신라에 편입된 시기가 문제가 아니라 우산국의 성립이전 우리 민족이 가서 살았던 시기부터 우리 영토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신라에 편입된 우산도 즉 울릉도는 이후 고려시기에도 세금과 공물을 바치며 영토로 잘 관리되어 왔다. 그러다가 고려말 왜구가 창궐하여 동아시아 전체를 침노하면서 울릉도도 침탈하여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런 왜구의 침탈에 적당한 대응책을 못찾고 있던 조선은 태종때에 섬주민을 밖으로 끌고 나와 왜구가 침노해도 빼앗아 갈 재물이 없도록 한는 대응책을 강구했는데 이를 일러 공도정책이라 부른다.

이런 공도정책은 영토를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정확하게 관리할 수도 없는 정책이어서 결국 빈섬에 일본사람들이 마음대로 출입하고 심지어는 와서 살면서 나무를 베어 내고 물고기를 잡고 배를 만드는 일이 일상사가 되었다.

심지어 일본 도꾸가와 막부는 조선정부와 아무런 협의도 하지않고 오오다니징기찌(大谷甚吉)와 무라가와이찌베(村川市兵衛)의 두 가문에 울릉도 도해(渡海)면허라는 것까지 허가해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영토에 대한 침탈이 계속되어도 조선정부가 아무런 반응도 없으니 완전히 자신들의 땅으로 취급하고 마음대로 다루게 되었다. 

1693년(조선 숙종 19년) 봄 동래, 울산지역 어부 약 40명이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일본 어부들과 부딛치게 되었다. 수가 많았던 일본 어부들이 협상을 하자고 나와 조선어부 대표인 안용복(安龍福), 박어둔(朴於屯) 두사람을 일본 은기도(隱岐島)로 납치해 갔다. 안용복은 은기도주에게 울릉도는 조선 영토임을 지적하고 "조선 사람이 조선땅에 들어 왔는데 왜 묶어 왔는가"하고 항의하였다. 은기도주는 방법이 없어 상부관청인 백기주(伯耆州)태수에게 이송하였다. 백기주 태수도 안용복의 기개와 명분 앞에 방법이 없어 중앙의 군주인 관백(關白)에게 다시 이송하였다.

관백이 안용복을 심문하였으나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백기주 태수를 시켜 "울릉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니 일본 어민의 출어를 금지 시키겠다"는 서계를 써주고 후대하여 조선으로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대마도주는 당시 황금어장인 울릉도를 기어이 차지하려고 흉계를 꾸미고 있었는데 안용복이 귀국길에 나가사끼(長崎)에 이르자 나가사끼 도주(島主)가 안용복 등을 다시 구집(拘執)상태에 두었고 드디어 대마도에 이르자 대마도주는 백기주태수가 안용복에게 써준 서계를 빼앗고 안용복등을 일본영토 죽도를 침범한 죄인으로 묶어 같은해 11월 조선 동래부사에게 인계하였다.

 안용복을 호송해온 대마도주의 사신은 이때 울릉도 이외에 동해에 일본영토인 죽도라는 별개의 섬이 있는것처럼 서류를 꾸며서 조선 왕조가 죽도의 일본 영토권을 인정하도록 하는 흉계를 꾸며 울릉도를 탈취하려고 들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안용복이 생명을 걸고 국토수호에 나선 공로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백성들이 함부로 나서서 국가의 외교문제에 관여하면 국제적으로 시끄러운 일이 생긴다는 극도의 봉건적, 무산안일적, 사대적 사고에 젖어 안용복 일행을 옥에 가두고 일본측의 흉계를 알면서도 울릉도 이외에 죽도라는 섬이 있는 듯이 외교서류를 작성해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백성들이 함부로 먼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다가 남의 나라 땅을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수 없다.

1694년(조선 숙종 20년) 대마도주는 전날 받은 외교문서에 울릉이란 이름이 여전히 남아있어 찜찜하였는데 조금만 강하게 밀면 울릉이란 섬이름이 사라지고 죽도(竹島-다께시마)라는 이름만 남길수 있다고 판단하고 다시 외교경로로 전날 써준 서류의 기록 변경을 요구하였다. 당시 서인(西人) 정권의 영의정이던 남구만이 일본측 요구대로 서명할뻔 하였으나 유지완이 "너희들이  말하는 죽도가 바로 우리 울릉도인데 조선인이 자기 영토에 들어가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준절히 꾸짖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설유하여 남구만이 "일본인들의 울릉도 침입을 금지시키라"는 외교서류를 만들어 일본측에 전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인의 울릉도 독도 불법 침탈, 내왕 행위가 계속 되었는데 1696년(조선 숙종 22년) 여름 안용복이 여러 사람을 설득하여 다시 울릉도로 들어가 일본인의 불법행위를 목격하고 준절히 꾸짖었다. 일본인들이 자기들의 기지인 독도에서 왔다는 변명을 남기고 달아나는데 안용복이 독도까지 쫒아가 기름을 끓이는 가마솥을 깨면서 "독도 역시 우리 땅이라"고 호령하니 왜인들이 다 거두어 돌아가는데 안용복이 이들을 뒤쫒아 가 조선 관리로 행세하면서 백기주태수와 대좌하여 울릉도에 잠입했던 일본인의 처벌을 약속받고 "울릉도 독도 두섬이 이미 조선에 속해 있다"는 일본 정부의 공식 답변도 약속받고 나아가 한국과의 외교 채널을 독점하고 있는 대마도주까지도 이 규정을 어기면 무겁게 처벌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돌아왔다.

안용복의 활약으로 조선과 일본에서 활발한 논의가 일어나고 사실 관계가 밝혀져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라는 분명한 답변을 일본 정부가 하게 되었으니 국가가 하지 못한 일을 안용복 개인이 한 것이다.

그때 안용복이 이 문제를 분명하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울릉도와 독도가 누구나 인정하는 일본 영토가 되었을 것임은 너무나 분명하다. 성호 이익은 "생각컨대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다. 미천한 일개 초졸로서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를 위하여 강적과 겨루어 간사한 마음을 꺾어 버리고 여러 대를 이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땅을 다시 찾았으니 부개자와 진창이 한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한것이니 영특한 자가 아니면 이런 일을 할수 있겠는가."라고 평가 하였으며 이후 많은 사가들이 안용복의 의거를 높이 평가 하였다.
 
독도의용수비대와 독도 수호

조선시대가 뒤로 올수록 더욱 국세가 기울어지자 일본이 1905년 1월 28일 지방정부인 시마네현 고시를 통해 마음대로 독도를 자기들 영토로 편입했다고 울릉군수 심흥택에게 통고하였다. 그러나 이미 식민지화의 외길을 가던 조선 조정에 이런 사실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울릉도 독도와 한반도 전부가 일본 영토로 바뀌고 말았다.    

1945년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해방을 맞은 한국은 다시 연합국 사령관 고시로 울릉도 독도 제주도까지 찾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독도에 대한 야욕을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함정으로 초계하고 독도에 내려서 자기들의 영토임을 알리는 팻말까지 세우고 일본 어민들의 기지로 사용하였다.

한국정부는 1952년 1월 18일 국무원고시 제14호로 평화선을 선포하고 독도을 우리 주권선 안에 분명하게 두었다. 그러자 일본은 한국 정부에 항의 서신을 발송하는등 강력한 항의를 주기적으로 되풀이 하였다.

 할아버지대부터 독도와 남다른 인연을 맺어 온 홍순칠은 1952년 8·15경축 마당에서 그 자신이 대장이 되는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여 그때까지 일본인이 팻말을 세워두고 있던 독도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34명의 인원으로 출발한 의용수비대는 홍대장이 경찰과 교섭하여 실탄과 포탄등 무장을 해결하고 독도 경비 작업에 나섰다. 그당시부터 한국 군대는 작전권이 미군 손에 넘어가 있었기 때문에 독도에 군대를 보낼수 없었다. 그러니 독도수비는 민간인이 나서지 않으면 할 수도 없었고 일본인은 군함과 어선을 자주 보내 독도 주변을 침노하고 있었다. 일본은 여전히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영토를 잃을 수밖에 없는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독도의용수비대가 보초를 서고 있는 독도에 1953년 5월 28일 일본배 1천톤급 회색 경비정이 접근해 왔다. 수비대는 M1소총으로 공포 3발을 발사하여 경비정을 쫒아 보냈다. 독도에 경비대가 있는 줄을 모르고 접근해 왔는데 총소리가 나자 중무장 부대가 있는 줄 알고 도망 간 것이다. 일본 정부는 그해 6월 22일 우리나라 어민들이 일본 영토를 침범했다는 강력한 항의 각서를 주일 대표부에 전달 했다.

같은 해 6월 25일 일본기를 휘날리며 일본 경비정이 서도 앞을 지나 가재바위 쪽에 배를 세웠다. 수비대에서 기관총 20여발을 발사하자 일본 경비정이 동도 쪽으로 퇴각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수비대는 막사를 동도쪽으로 옮기게 되었다.

53년 8월 23일 일본 경비정이 동도쪽으로 접근해 왔다. 수비대에서 기관총을 발사하자 순시선이 도망을 갔다.

마침 54년 4월 21일 경북도경 김종원국장이 박격포와 포탄 100발을 싣고 위문을 왔다. 바로 그 다음날 3척의 일본 경비정이 독도로 몰려 들었다. 의용수비대에서 박격포를 발사하여 1척을 명중시키는 쾌거를 올렸다. 연기가 솟아 오르자 나머지 배들이 도망갔다.

다음날 일본 라디오 방송은"…다께시마(독도) 소속 경비대 함정이 독도경비대의 공격을 받고 16명의 사상자를 내었다.…"라고 보도했다. 만약 이날 박격포가 없었다면 경비대의 소총만으로는 일본 함정을 막지 못했을 것이고 울릉도와 독도는 그날 이후 일본 영토로 바뀌어 버렸을 것이니 참으로 아슬아슬한 일이 아닐수 없다.

이후 날이 갈수록 일본 경비정 침입이 늘어나자 통나무를 대포 모양으로 만들어 세웠다. 이후 일본 경비정은 대포가 무서워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서 정찰만 하고 돌아갔다. 이후 독도의용수비대는 그 임무를 경찰에 맞기고 철수하였지만 그들이 수행한 역사적 의의는 참으로 크다.

 무엇보다 독도를 한국이 실제로 지배하고 있다는 확고 부동한 근거를 남기게 되었다. 백마디의 법이론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실재적인 사실이다. 당시 한국이 어떤 실제적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여건에서 독도의용수비대가 온갖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독도를 수비했기에 오늘의 독도가 있게 된 것이다.

한국역사의 한 특징은 항상 민간에서 의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해 왔다는 점이다. 관헌은 늘 영토수호 의지가 부족하고 외부 강대국에 아부 굴종하여 일신의 영달만을 꾀했지만 국가로부터 핍박과 수탈 빼고는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는 민초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역사와 강토를 지켰으니 이런 역사는 참으로 세계사에 희귀한 사례이다. 이런 고귀한 피로 지켜온 강토를 앞으로 더욱 잘 보존하는 일이 우리 과제로 남겨져 있다.     

* 독도본부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3-07-15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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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 요 | 이 책은 2008년도에 일본 중의원에서 독도문제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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