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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7월 05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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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露) 국경형성과 녹둔도 노(露)령(領)화의 배경

전형적인 구라파 대륙국이던 러시아가 동방으로 그 세력을 펼쳐 오면서 자연히 청과의 영토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러시아군이 아무르강 유역에까지 나타난 것은 1600년대 중반경 이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진격에 청은 1654년 쑹가리河에서 러시아의 스테파노프 군단을 맞아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우리나라 효종은 나선정벌이라는 명명하에 신류(申劉)장군을 지휘관으로 하여 이 전투에 참가케 하였다.  역사는 매우 아이러니칼하게도 효종은 지난날 청이 감행한 병자호란시의 치욕을 씻기 위해 오매불망 군비를 가다듬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청을 위해 파병하는 역설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다.
 
물론 이 전투에서 신유장군이 이끄는 우리나라 원병과 청병은 승전을 하였다.  그러나 그 후로도 러시아군은 승복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흑룡강 상류로 진격해 옴에 청은 알바진 (Albazin) 성곽 쪽으로 재침입해오는 러시아군과 공방전을 벌인 끝에 1689년(숙종 15년) 9월 7일 청러간에 네르친스크(泥布楚)조약을 체결, 양국간의 경계를 획정하였다.
 
조약은 전문 7개조에 한(漢), 만(滿), 아(俄), 몽(蒙), 나전어(羅典語) 등 5개국어로 된 경계표를 아무르강 남안은 아르큰河, 북안은 게르페지河를 경계로 하고 이 가운데 가장 양측의 접촉이 빈번한 교통로는 계선형(界線形) 국경선을 획정하고 인적이 드문 동부국경지역은 막연히 외홍안령산맥을 경계로 한다고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홍안령산맥 지역의 국경지대도 자연히 양측의 마찰을 빚게 되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캬프타조약을 맺고 통상로를 세렌가河의 우안 지류인 캬프타하반(河畔)의 러시아 감시초소와 청측 국경초소인 오르고이고 山上에서 내려다보이는 평지를 양분하였다.  이 캬프타조약은 청로간의 통상이 확대됨과 동시에 청국에 대한 서방제국들의 관심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정세하에 러시아는 청측의 약점을 교묘히 이용해 자국의 영토팽창 야욕을 지속시켜 나갔는데 이 시기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는 동부시베리아 총독으로 무라비프(Muraviv)를 임명하고 흑룡강 좌안 각지에 요새를 구축, 이 일대를 장악하고 연해주 정부를 설치 흑룡강 연안으로부터 캄챠카 반도를 관할케 하였다.
 
이 당시 청은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내정이 혼미한 가운데 러시아의 이 같은 영토팽창정책을 저지할 수 없는 상태이기는 하나 이를 승인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애로호(Arrow)사건으로 인해 엎친데 덮친격으로 영·불 양국이 청과 조약을 맺고 외교사절을 파견한다고 할 즈음 러시아도 이에 질세라 또다시 아이훈조약 (愛揮條約)을 체결하였다.
 
아이훈조약이란 1858년(철종 9년) 4월 16일 아이훈河로부터 흑룡강에 이르는 좌안을 러시아령으로 하고 그 우안 우수리강에  이르기까지를 청령으로 하는 전문 5개조의 조약문이다.
 
아이훈 조약으로 러시아는 흑룡강 유역을 경략하게 되었고 우수리강 이동(印) 하안(河岸)지역 일대는 청·러 공동관리지역으로 두었다.   그러다가 2년 후 영불연합군이 천진으로 침입, 계속해 북경으로 진격해 들어감에 청국 정부는 열하(熱河)로 피신하는 등, 청조의 운명이 그야말로 풍전등화 상태에 놓여 있음을 기화로 당시 러시아의 북경주재 이그나타프 공사는 영불 연합군측과 청의 화의를 주선하고 그 대가로 1860년(철종 11년)11월 14일 북경조약을 체결하였다.
 
전문 15개조의 북경조약을 체결한 러시아는 아이훈 조약 제2조에서 청러공동관리지역으로 두었던 흑룡강 남쪽 우수리 강동(江東) 연해주 지방을 기어코 러시아령으로 확정시켰다.
 
즉 우수리강과 송화강을 거쳐 흥개호를 지나 백릉천하구(白稜川河口)에서 남동으로 향하는 뽀구리치나야, 훈춘川, 하원산령을 넘어 두만강 강구에 달하는 국경선을 설정하였다.
 이 결과 우리나라는 사상 최초로 러시아와의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북경조약의 체결로 연해주 공동관리지역을 러시아령화 하여 러시아의 동방진출 목적은 달성되었으나  청과의 세부적인 국경선을 획정하여야  할 대상지역은 광범위하고 복잡하게 되었다.
 
이에 이듬해인 1861년 6월 28일 흥개호에서 청과 러시아는 약 2주간에 걸친 국경회담을 열고 북경조약 추가조관(追加條款) 및 정계도(定界圖), 국경설명서에 조인을 마쳤다. 이 당시 약정된 정계도에는 우수리, 흑룡강 양강3각주에서 분류하는 松河察江(우수리강 지류)을 따라 흥개호 호수면을 가로질러 호안(湖岸) 소읍인 Turii Tog 바로 북쪽에 있는 베레해강(흥개호로 흘러드는 강임)을 쫓아 서진하다가 남으로 돌아 오늘날 우수리스크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국경역인 나지나야역 삼함구(三含溝)를 거쳐 두만강 하류 무이보(撫夷堡) 대안(對岸)에 다다랐다.
 
흥개호계약에 따라 우수리강 합류점에서 두만강구에 이르는 교계(交界)에는 도상(圖上)에 붉은 선으로 표하고 8개처에 목패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 경계표지 작업은 3개월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경계표작업은 철종 12년(1861년) 9월 5일(음력 8월 1일)에 두만강 대안에 토자비를 세움으로서 끝났다.  이렇게 설정된 한로국경선은 당사국인 우리나라에는 사전은 물론 사후에도 일체의 공식 통고 없이 이루어졌다.
 
이 역사적 순간을 경흥부 무이보(撫夷堡) 망덕산(望德山) 봉수대에서 김대흥이 목격, 경흥부사 이석영에게 보고함에 부사가 강가로 나아가 필답을 통해 전후사정을 알게 되었다.
 
부사는 그들의 갖고 있는 국경조약 관련 문건을 필사하여 북병사(北兵使) 윤수봉에게 보고함으로서 그 내용이 조정에 알려지게 되였다.
 
보고 내용인즉 철종 12년 7월 30일 여러 사람아 무리를 지어 대안의 숲림속으로 출몰하는데 그 모습이 이양선인(異樣船人)과 흡사한 자들이며 인마수(人馬數)는 훈춘인 16명, 말 21필 , 아라사인 13명에 이들이 타고 온 말 10필임도 알게 되었고, 부사가 이들과 필답을 나누면서 그들이 갖고 있던 "아라사국분계지서(俄羅斯國分界之書)"를 보여줌에 필사하였다.  설막(設幕) 안에는 아라사 사람들이 있고 강을 건너 온 청인관리는 훈춘 효기교(驍騎校 ) 백흥(伯興)과 영고탑(寧古塔) 효기교(驍騎校) 영안(永安)으로 이들은 계비를 세우러 왔다고 하였다.

-한국의 영토관리정책에 관한 연구 중에서-  양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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