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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6월 29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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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나서야 할 녹둔도(鹿屯島) 땅

 3각 국경선, 녹둔도

국경·영토문제를 연구하면서 언제나 내 머리속에는 녹둔도 땅을 찾아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 이러한 상념속에 30여 년의 세월을 보내던 중 지난 7월 숙원을 풀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른바 우리 나라 최북방 3각 국경선상에 위치한 녹둔도 땅을 밟게 된 것이다. 감회에 앞서 先民들이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이 떠 올랐다. “우리 나라와 청·아(俄) 3국의 이해가 이 한 곳에 얽혀짐으로써 이 곳이 무사하면 3국이 평화롭겠으나 그렇지 못하면 전장(戰場)의 단초가 여기서 펼쳐지리라”
블라디보스도크에서 녹둔도를 향한 주변 도로에는 비록 퇴락한 병영이기는 하나 곳곳에 군영지가 도로 주변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어 1백여년 전에 남긴 선조유훈(先祖遺訓)을 되새기게 하였다.

이러한 상념과 관점하에서 녹둔도에 관한 역사지리적 기록과 상실된 이 땅의 수복노력 상황 및 이 땅을 되찾는데 따른 국제법상 문제가 없는지를 간략히 살펴 보고자 한다.

역사상 녹둔도(鹿屯島)에 관한 기록이 문헌에 최초로 나타난 것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이다. 이 지리지에 따르면 ‘경흥의 옛 지명인 공주(孔州)를 지나 동쪽으로 25리에 이르면 사차마도(沙次 島)에 도달되고 여기서 강물이 나누어져 5리쯤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라고 하고 있다.
이어 세조(世祖) 원년(元年:1455년) 8월에는 여진어로 사차마도(沙次 島), 사차(沙次), 사혈(沙 ) 사혈마도(沙 磨島), 사혈마(沙 麻)라 불려지던 이 곳이 녹둔도로 칭해지고 있음도 알수 있다.

역사가 말하는 녹둔도 땅

그리고 세조는 이 섬의 방비에 대한 관심을 함길도 도절제사(都節制使)인 양정(楊汀)과 도사(都使) 강효문(康孝文)에게 밀유(密諭)를 내리고 있다.
성종 17년(1486) 2월에는 영안도(永安道:함경도를 말함) 경차관(敬差官)으로 다녀온 홍문관 전한(弘文館 典翰)인 정성근(鄭誠謹)이 녹둔도에 대해 보고하는 가운데 ‘조산군민(造山軍民)들이 봄에 녹둔도에 들어가서 경작하고, 가을에 추수를 마치고 본보(本堡)로 돌아왔는데, 내왕할때는 배편을 이용하는데 농민들이 몹시 힘들어 한다’고 하며 ‘군민 모두가 현지에 거주하면서 경작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섬의 土質이 차지지 않아 흙벽을 바를 경우 모래와 풀을 섞어서 쓰고 있어 비바람이 한번 스쳐가면 곧 무너져 남는 것이 없으며, 만일 적이 쳐들어 오면 무엇으로 막아낼 것이며, 큰 물이 밀어 닥치면 섬 전체가 침몰할 듯 하니 농민들이 여기에 상주 하는 것, 또한 두려워 하고 있다’고 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딱한 실정을 아뢰고 있다.

실제 필자는 현지의 주변 땅을 여기 저기 1m 가량 파 보았으나 찰흙은 찾아 보기 어려웠고, 토사질(土沙質) 뿐으로 위 사실을 확인케 해주었다.
중종 5년(1510년) 3월 경신조(庚申條)에 좌의정 유순정(柳順汀)은 ‘녹둔도는 적의 침로로는 물이 깊고 왕래하기 어려우나 우리 백성들의 경작로는 물길이 얕아 다니기 쉬우니 조산만호로 하여금 설보(設堡)하도록 하자’고 하였다.

5년뒤인 중종 9년(1514년) 10월 임인조(壬寅條)에 지중추부사 안윤덕(安潤德)이 비변대책(備邊對策)을 上께 올리는 말미 가운데 ‘녹둔도 방비에 관한 항목’이 들어 있고 동왕 37년(1542년) 5월 기사 가운데 ‘봄철 농사를 지을 때면 조산보의 군민이 녹둔도로 들어감으로 본보(本堡)가 빌 정도’라고 아뢰고 있다.

이후 선조때 정언신(鄭彦信)은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자고 하였고, 백두산 정계비 건립시 접반사 직무를 수행하고 병조참판을 지낸 박권(朴權)도 경흥부 녹둔도조에 “경원에 야인의 소란이 있은 후 군량미 저축이 긴요해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 부사로 하여금 경작에 힘쓰나 경작력이 점점 떨어져 어렵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선조 17년 정월조에는 ‘녹둔도에 둔전을 두었으나 북방지사(北方之事)라 어렵다’고 하였으며, 동왕 19년에는 조정에서 ‘선전관을 파견하고, 둔전관을 두어,설책하였다’고 하면서 ‘농기구와 農牛를 들여보내 군관민(.軍官民)이 경작에 힘쓰도록 했다’고 하였다.

이후로도 녹둔도 둔전문제(屯田問題) 부활에 대해 조정(朝廷)의 논의가 분분했으나 반대론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처럼 육진개척이래 녹둔도 경략 관리는 지속되었음은 물론 세조 이후로 경작과 변방 방어기지화되어 왔음을 알수 있어 재론의 여지없이 녹둔도는 육진개척이래 우리 민족의 고유영토이였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녹둔도의 지리적 상황

경흥의 옛 지명이 공주(孔州), 광성(匡城)이며, 사차마도(沙次 島)가 녹둔도를 지칭함을 동국여지승람은 기록하고 있다. 경흥도호부 관방조(關防條)에는 녹둔도는 육진개척(六鎭開拓)이래 변방의 전초기지가 되어왔다.
이 섬은 지리적으로 두만강 물줄기가 최하류로 흘러드는 두만강 입해처(入海處)에 위치해 있음으로서 홍수로 인해 강물이 범람하게 되면 자연히 상류의 토사가 섬 주변으로 밀려들어 퇴적되면서 수심이 점차 얕아졌다.

녹둔도의 연륙시기에 대해 일본외교문서 가운데 수록되어 있는 1890년대의 녹둔도 관계잡철 속에 당시 부산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영사 입전혁(立田革)이 블라디보스도크를 순회 중 경흥감리 김우현(金禹鉉)과의 대화중 김의 말을 인용 “녹둔도는 수십년전 부터 강류가 변해 섬 서방으로 흘러 동쪽은 거의 수류가 없어짐에 따라 연해주에 육속되었다”라고 하고 있다.

이밖에 일본 양속함(良速艦)에 승선 이 지역을 정찰 한 천상(川上)은 20~30년 전부터 강물이 서쪽으로 흘러 현재는 조선 연안쪽으로 강류가 나있고, 동쪽으로는 연해주와 연접되어 노령화 되었다고 하고 있다.
1709년 청 강희제의 명으로 Regis가 실측 제작한 지도와 Du Halde의 저서에 수록된 지도에서 朝·淸국경사이에 무인지대를 표시하고,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를 점선 이남의 반도내에 포함시키고 있다.

1800년대 후반기에 작성된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에 표기되고 있는 관련 자료에도 녹둔도가 그려져 있고 여러 정보를 수록하고 있으나 연륙시기는 미상이다. 현대 지도제작법에 의한 일본 동아지리연구회가 1904년에 발행한 최근답사(最近踏査) 만한서비리아지도(滿韓西比理亞地圖:100만분의 1)에는 녹둔도를 육속(陸續)된 지대로 보고, 그 지명을 녹도(鹿島)라 명시하고 있으며, 러시아측의 이 지역관련 지도에는 녹둔도라는 표기는 없고 단지 “크라스키노(Kraskino)”라 명기하고 있을 뿐이다.

녹둔도 노령(露領)화 후의 반환노력

1882년(고종 19년:淸 光緖 8년)5월 청국주재 러시아 영사 뷰철(Evgeni de Butzor)이 청의 직예총독(直隸總督)을 통해 우리나라와 통상수교할 것을 제의해 왔다.

이에 우리측은 ‘양측이 통상을 하려면 러시아로서는 청국의 길림(吉林)에 월입(越入)해야 하는데 현 상황으로 어렵지 않겠는가? 단지 아국(俄國)과 우리나라가 두만강 한쪽에 접하고 있으니 후일 양국간에 조약성립을 보아 양국이 파원(派員)하여 그곳 강구에 이르러 녹도 북쪽에 계패(界牌)를 세워 양국 월계인민(越界人民)이 발생하면 청아조약 조관(淸俄條約 條冠)에 따라 변리(辨理)키로 하고 해상통상(海上通商)으로 해삼위(海蔘威)와 원산항(元山港)이 가까우니 각국의 수륙통상장정(水陸通商章程)을 보아 처리함이 타당할 것으로 사료되니 그 뜻을 전해달라’고 하고 수교제의를 거절하였다.

이 당시는 한청(韓淸) 양국간에 간도문제(間島問題)가 제기되어 우리나라 서북경영(西北境域)지대의 사정이 전반적으로 복잡다난하던 시기로 선뜻 러시아의 제의를 받아 들이기 어려웠다.

특히 러시아측의 녹둔도 불법 점유에 대해 청과의 조율이 되지 못한 상태인 까닭에 통상문제를 논의하게 되면 반드시 이 문제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청과 간도문제로 시비가 벌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청을 통한 협조가 마땅치 않었던 것이다.

1883년(고종20년) 어윤중(魚允仲)이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임명되어 이해 정월 28일 임금을 알현함에 고종이 말하기를 “녹둔도는 본시 우리나라 땅이라고 하는데 이번에 가서 귀정지울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어윤중이 답하기를 “이 섬은 중국 훈춘계와 상접하고 두만강 사이에 있어 귀정지사(歸正之事)는 용이하지 않을듯 합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이해 10월 4일 어윤중이 서북변경지를 순방하고 돌아와 고종에게 복명함에 왕이 녹둔도 사정에 대해 묻자 “녹둔도는 본래 우리나라 땅으로서 신(臣)이 조산(造山)에 도착하여 지형을 살펴 보니 섬 동쪽에 모래가 쌓여 저쪽 땅과 연접되어 있고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우리나라 사람들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1885년 11월 러시아 웨벨공사가 전권대사이였던 김윤식(金允植:1841-1920)에게 “조아육로통상조약(朝俄陸路通商條約)을 언제 체결함이 좋겠느냐”고 함에 “청아감계(淸俄勘界)시 우리나라에서도 파원(派員)해 회감(會勘) 연후에 논의함이 좋겠다”고 함으로서 한러국경 감계에 동참할 뜻을 분명히 하였다.

위의 회감이란 훈춘계약에 따른 감계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녹둔도 귀속문제를 제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청측대표인 오대징(吳大 )의 무성의로 이 뜻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원세개의 다음과 같이 청의 잘못을 표명하고 있다.
“청국관리의 지리적 미숙으로 불합리한 약서(約書)를 만들어 조선에 탄식을 끼치게 하였고, 결국 이 땅이 아라사에 점유된 지가 오래되어 쇄환하지 못하고 있는 바 언제 복취(復取)할 수 있을른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1886년 11월 15일자 일본외교문서 가운데는 녹둔도 지역 정탐보고서 가운데 ‘한러통상 수교 후 조선정부는 러시아에 녹둔도 반환 요청을 하였다’라고 하고 1890년 6월 29일자 입전혁(立田革)의 보고에도 녹둔도 반환 요구설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의 정탐자들과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이교겸(二橋謙)도 조선정부가 웨벨 공사에게 녹둔도 반환 요청 사실을 본국정부에 보고하였다고 하고 있고, 구수삼랑(久水三郞)도 당시 경흥감리 사무 김우현으로 부터의 전문(傳聞)이라고 하면서 녹둔도반환요청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제반 사실은 당시 조선정부가 청러간의 잘못 획정된 국경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인 녹둔도를 불법 부당하게 점유당한데 대한 반환노력임과 동시에 녹둔도는 우리 민족 고유의 영토로 반드시 돌려 받아야 한다는 분명한 입장 표명을 해 온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제에 나라를 빼앗김으로서 이같은 노력은 중단되고 일제식민기간을 거치면서 방기되어 왔고, 이어서 남북이 분단되면서 북한측 역시 정치적으로 러시아에 편향되면서 이 문제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제법으로 본 녹둔도 영속문제

녹둔도의 영속시비는 일종의 강내도서의 지위와 관련된다. 녹둔도는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오랜기간 역사적 권원에 의한 한국에 영유권이 확립된 두만강 하구상의 도서이었으나 강류의 토사 퇴적으로 인해 연해주에 연륙된 곳이다. 이러한 녹둔도가 영속시비의 계기가 된 것은 두만강이 한국과 러시아간의 국경을 획정하면서 부터이다.

1860년 북경조약과 1861년 흥개호계약에 따라 국경획정, 국경표지작업을 한국의 참여없이 양국간 일방적으로 행하여졌는데, 이같은 사실을 간접 인지하기는 경흥부사 이석영(李錫英)의 보고를 통해서이다.
즉 두만강 하구에 국경표석을 세운데 대해 우리 조정은 그 의미를 확실히 알지 못함으로서 권리 확보를 위한 즉각적인 실효적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886년 8월 우리 나라는 조·청·러 3국이 공동으로 국경을 조사하자는 삼국공동감계안을 제의한 바 있다.
그러나 청의 무성의와 러시아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후 흥개호계약에 따른 국경재감을 위한 회담시에 청측 대표 오대징에게 녹둔도 귀속문제의 거론을 (비록 묵살은 당했지만) 분명히 요청하였다.
이같은 사실들은 위에 언급된 일본의 녹둔도 관련 기밀보고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우리 나라의 녹둔도 반환요구는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때 한국은 러시아의 일방적인 국경획정에 대해 묵인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며, 당사국이 아닌 청러간에 한국의 국경을 설정한 것은 결코 한국을 구속할 법적 요건 내지 효력을 가질 수 없다.

국제법상 일방적인 국경획정은 인접국의 사후 동의 또는 묵인이 존재하지 않는 한 인접국에 대하여 효력이 인정되지 않음을 1911년 영국과 독일간의 Walfish灣 국경분쟁사건에 관한 중재판결에서 판시된 바 있다.
이러한 판례로 미루어 볼때 한국과 러시아간에는 공식화된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이밖에 녹둔도 영속문제(領屬問題)는 1860년 북경조약 체결 당시 녹둔도가 어느 나라에 귀속되어 있었느냐 하는 점이 관건이 된다.

다시 말해 어느 국가가 녹둔도를 당시 실효적으로 지배를 확립하고 있었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북경조약 체결 이후 러시아의 녹둔도 관할은 권원창출효력(權原創出效力)이 부여되지 않고 오직 국경조약의 해석에 있어서의 추후관행(追後慣行)으로서의 지위만이 인정될 뿐이다.

아울러 러시아에 대해 우리 정부가 정식으로 국경획정을 요구하여 왔다는 점에서 묵인(默認)에 의한 권원(權原)의 창출(創出)을 가져 온 것으로도 볼 수 없어 국제법상으로도 녹둔도의 러시아의 점령은 불법부당한 것으로 이에 따른 대응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확고한 의지 표명으로 녹둔도 문제 해결

한·러국교가 수교된 이상 하루속히 우리 정부는 민족사적 정통성에 입각하여 부당하게 병합된 녹둔도의 원상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가 없음은 묵인에 의한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북한과 러시아간에 체결된 국경문제를 염두에 둘 수 있겠으나, 현재까지는 북한측의 공식 또는 비공식 반응이 없는 이상 대한민국정부는 이에 대한 확고한 국가의지를 표명해야 한다.

1990년 북한과 러시아는 국경설정에 관한 의정서와 국경질서에 관한 조약을 체결한 바 있다. 이에 의하면 쌍방은 국경선을 39.4km로 확정하고, 그 가운데 17.3km에 해당하는 두만강에서는 탈베그의 원칙을 적용하여 최심선을 국경선으로 하되 16개의 강내 도서에 대하여는 도서를 반분하여 분할 점유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북한 러시아간의 국경선 길이도 북한은 16.5km, 러시측은 19km로 하고 있어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 표명도 있어야 하겠다.

차제에 연해주 문제도 심도있게 고찰해 나가야 할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녹둔도문제는 연해주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북방영토문제의 답변서라 할 수 있는 북여요선(北輿要選)에 따르면 백두산 정계비 동쪽 토문강의 근원은 석퇴(石堆)와 토퇴(土堆)를 지나서 5, 6백리 정도를 흘러 송화강과 합류하여 동쪽으로 흑룡강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가는데 그 이동(印)이 우리의 영토라 할 때 연해주 일대는 당연히 우리의 영토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단치하고서라도 우리 정부는 민족사적 정통성에 입각하여 명명백백한 녹둔도 땅을 상실한데 대해 이 문제를 통일이후로 까지 미룰 것이 아니라 만시지탄이나마 국민적 지혜를 모아 우리 땅 녹둔도 찾기에 나서야만 한다.

 양 태 진 (동아시아 영토문제연구소장).월간북한 2002.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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