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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8 문] 울릉도검찰사 이규원이 울릉도에 들어가 현지조사를 실행한 결과는 어떠했는가? 일본인들이 실제로 울릉도에 몰래 침입하여 벌목을 하고 있었는가?

[답] 일본인들과 본국인(조선인)들이 모두 다수가 몰래 들어와 목재를 벌채하기도 하고, 배를 만들기도 하며, 고기잡이도 하고 있었다.

울릉도검찰사 이규원은 배 3척에 102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현지조사단을 편성하였다. 이규원 일행은 1882년 음력 4월 29일 3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강원도 평해(平海)의 구산포(邱山浦)에서 출발하여 4월 30일 울릉도 서면 소황토구미(小黃土邱尾)에 도착하였다. 5월 초1일부터 만 6일간을 도보로 울릉도 섬 안을 현지답사하면서 조사했으며, 다음에는 또 2일간 배편으로 울릉도 해안을 한 바퀴 돌면서 해안조사를 실시하였다.

이규원 일행은 이 과정에서 울릉도 바로 옆에 있는 바위섬 죽서도(竹嶼島, 혹은 竹島라고 통칭)는 찾아내어 관찰했으나, 울릉도로부터 49해리나 떨어진 우산도(于山島, 독도)는 울릉도 체류자들로부터 그 존재의 사실만을 듣고 현지조사는 풍랑이 두려워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규원일행은 출발 당시부터 풍랑에 놀랐었고, 울릉도에 도착한 후에는 새벽마다 풍랑을 재워달라고 산신제를 올리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규원 일행은 고대 우산국의 터전이 울릉도(鬱陵島)·죽서도(竹嶼島)·우산도(于山島, 독도)의 3도로 구성되었다는 인식을 확고하게 정립하고 돌아왔다.

울릉도검찰사 이규원 일행이 울릉도 현지조사에서 검찰한 내용 가운데, 울릉도·독도 재개척과 관련된 몇 가지 사항을 그의 일기와 보고서에서 간추려 들면 다음 사실이 특히 주목된다.

(1) 울릉도에 들어가 있는 본국인(조선인)은 모두 140명이었는데, 출신도별로 보면 전라도가 115명(전체의 82퍼센트), 강원도(평해)가 14명(10퍼센트), 경상도가 10명(7퍼센트, 경주 7명, 연일 2명, 함양 1명), 경기도(파주)가 1명이었다. 전라도 출신의 내역을 보면 흥양(興陽)의 삼도(三島) 출신이 김재근 등 24명과 이경화 등 14명, 흥양의 초도(草島) 출신이 김내언 등 13명과 김내윤 등 23명과 김근서 등 20명, 낙안(樂安) 출신이 이경칠 등 21명이었다. 전라도 출신들은 남해안 섬이나 해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마을사람 집단별로 한 배에 13∼24명씩 태우고 들어와서 그 집단별로 막사를 치고 체류하면서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고 있었다.

(2) 본국인(조선인)이 하고 있던 작업을 보면, 나무를 베어 배(선박)를 만들고 있는 사람이 129명(전체의 92.2퍼센트), 인삼 등 약초를 캐는 사람이 9명(6.4퍼센트), 대나무를 베는 사람이 2명(1.4퍼센트) 등이었다. 전라도(115명)와 강원도(14명)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13∼24명씩이 1집단을 이루어 막사를 치고 살면서 재목을 베어서 배(선박)를 만들고 때때로 미역따기와 고기잡이를 하다가 배(선박)가 다 만들어지면 이 새 배에 미역과 물고기를 싣고서 돌아가고 있었다. 경상도 경주에서 온 7명과 함양에서 온 1명(全錫奎: 士族), 경기도 파주에서 온 1명은 산삼과 약초를 캐고 있었다. 경상도 연일에서 온 2명은 대나무를 베고 있었다.

(3) 울릉도에 침입한 일본인은 모두 78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재목을 베어 실어가려고 들어와 있었으며, 해안에 나무를 다듬어 판재(板材)를 만드는 곳이 18개소 있었다. 일본인들과 필담을 해 보니, 그 응답의 요지는 ㉠일본의 동해도(東海島)·남해도(南海島)·산양도(山陽島) 사람들 78명이 올해 4월에 울릉도에 들어와서 막사를 치고 벌목을 하고 있으며, ㉡올해 8월에 일본에서 선박이 오면 목재와 판재를 싣고 돌아갈 예정이고, ㉢조선정부가 울릉도 재목의 벌채를 금지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울릉도가 {일본제국지도(日本爪地圖)}에 '松島(송도)'라고 표시되어 일본영토로 알고 있다고 응답한 일본인들도 있었으며, ㉤2년 전에도 울릉도에 들어와 재목을 벌채해 실어갔고, ㉥울릉도 남포(南浦)에는 울릉도를 '일본국 송도(松島)'라고 쓴 표말이 세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4) 검찰사 일행이 울릉도의 장작지포(長斫之浦)에 도달해 보니 해변의 돌길 위에 길이 6척, 넓이 1척의 표목(標木)이 세워져 있었다. 그 표목의 앞면 위에는 [대일본제국 송도 규곡(大日本爪 松島 槻谷)]이라고 씌어있고, 좌변에는 [메이지 2년 2월 23일 기암충조 건립(明治二年二月二十三日 崎岩忠照 建立)]이라고 씌어 있었다. 일본인이 1869년에 울릉도에 들어와서 일본국의 '松島(송도)'라는 표목을 세우고 간 것이었다.

(5) 울릉도를 재개척하여 읍(邑)을 세우는 경우의 주거지로는 나리동(羅里洞)이 길이가 10여리요 둘레가 40여리로서 몇 천 호를 거주시킬 수 있고, 이 밖에도 100∼200호를 수용할 수 있는 곳이 6∼7처가 있음을 조사하였다. 또한 포구(浦口)는 14개처가 있으며, 물산은 비교적 풍부하고, 대표적 물산으로서 43종을 들어 보고하였다.

조선왕조의 중앙정부는 이 현지조사보고에 의하여 1882년 5월 당시의 울릉도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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