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도본부는    · 시작페이지로    · 즐겨찾기    · 오시는길    · 메일보내기    · 사이트맵

2017년 11월 21일 화요일

내용검색  

독도연표

독도인물

독도사건

독도 옛지도

독도역사

독도전설

  현재위치 > 독도본부 > 독도역사 > 독도사건

 


독도폭격사건 증언

독도폭격사건
 증언1/  증언2/  증언3

 
미군의 독도 폭격사건

1948년 6월 30일 미 제 5공군기의 폭격에 의해 독도에서 조업 중이던 한국어민 약 30명이 희생된 일이 있었다. 당시의 언론에 의하면 조선 동해상에 있는 독도부근 해상에 있는 우리나라 어선을 미국 극동항공대의 중폭격기군이 이만삼천척 상공에서 폭격하여 11척의 어선을 침몰시키고 십사명의 조선인 어부를 살해한 일로 인하여 전국동포는 불안으로 민심이 들끓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정부수립후인 1950년 4월 25일 미 제 5공군에 이를 조회했던 바. 미 제5공군으로부터 동년 5월 4일자로 "독도와 그 근방에 출어가 금지된 사실이 없었다는 것과 또 독도는 극동 공군의 연습 목표로 되어있지 않았다"는 공식 회답을 받았다. 그후 1951년 6월에 경상북도지사 조배천씨 참석하에 독도 조난어민위령비를 건립하고 위령제를 거행하였다.

그러나 1952년에도 미군기에 의한 독도 포격사건이 있었다. 1952년 9월에 한국 산악회 주최로 제 2차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단을 파견하였든바 독도의 모도로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울릉도의 조사만은 예정대로 추진시킬 수 있었으나 독도의 조사는 미군기의 뜻하지 않은 폭격으로 2회나 상륙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서 조사사업을 방치하게 되었다. 미군기는 독도에서 조업중이던 해녀와 어민 23명에게 폭탄을 던졌는데 다행히 이 때에는 인명피해는 없었던 것 같다. 이와같은 미군의 행위는 한국의 어업권에 대한 막대한 위협이었을 뿐 만 아니라 인류의 기본권에 대한 침해행위였다.

그후 한국 전쟁중에 독도가 미일 합동위원회에 의하여 미 공군의 연습기지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대한민국정부로부터 항의를 받은 미공군 사령관은 대한민국 정부에게, 1953년 2월 27일자로 독도는 미공군의 위한 연습기지로 선정됨으로부터 제외되었다는 공한을 보내주었으나 그 어떤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독도문제개론', 외무부정무국, 1955 / '일제하의 독도와 해방직후 독도의 한국에의 반환과정연구', 신용하, 1992)   
 
* 독도폭격사건

이 사건은 그동안 아무런 조사없이 말로만 전해져 왔었다. 독도 앞 바다에 있는 불발탄이 그 사실을 증명해줄 뿐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외국어대학교 독도 연구회는 소문으로만 돌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울릉도에서 그 당시 생존자가 살아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취재에 나섰다.

우리가 만났던 사건 생존자 둘은 장학상, 공두업 옹이었다. 그러나 같은 사고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사실은 그동안 내려져왔던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증거가 되는 셈이었다. 게다가 서로의 증언도 일치하였다.
조사 결과 그동안 알려졌던 사망자30명이란 수도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당시로 배 한척당 최소 승선인원 3명이 되야 출항이 가능했다고 했다.(선장,기관장,갑판장)게다가 그보다 더 큰 배도 있었다고 하니 평균 5명이라고할 때 독도주변에서 조업하던 배가 70∼ 80여척이 되었으니 사망자는 최소 300여명이 넘는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 두 분의 증언을 바탕으로 추정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엄청난 민간인 희생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었다. 당시 시대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지만(48년 정권이 미군정에서 한국정부로 이양되는시기)

그후로도 충분히 밝힐 수 있는 사건이었다. 게다가 울릉도라는 특수한 지리적 여건도 한 몫했던 것같다. 당시 교통과 통신의 발달 미비로 소식이 전해지지 못했다. 그후로 한국전쟁의 발발로 사건은 영원히 밝혀지지 못하게 된 것 같았다.

독도연구회는 이 사실을 1995년 광복50주년 기념사업으로 전시회 및 자료집을 발간했었으나 주변의 무관심으로 빛을 바라지 못하고 묻혀졌다가 1999년 미군의 노근리 사건이 밝혀지면서 또다른 미군의 범죄행위를 밝혀내다가 이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우리가 당한 이 피해 사실을 그동안 우리는 덮어만 두었다. 가해자인 미국에 의해 이 사실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오폭사건 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민간인이 식별가능한 상공에서, 그것도 백기를 흔드는 상황에서 포격은 계속 되었다. 지금은 당시 생존자가 모두 죽었다. 그래서 이 사건을 거짓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독도연구회는 이사실을 녹음 채록했다. 우리 정부는 우리의 민족이 피해를 입은 이 사건을 덮어두었으며 문제가 발생하자 관심을 기울이는 척하고 있다.게다가 민간보다 주체적으로 나서지도 못하고 미국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조심조심하고 있다. 아마 또다시 그대로 덮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당한 이 사실을 보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진상은 밝혀야 되지 않겠는가?

당시 학살의 피해자들의 영혼은 아직도 억울할 것이다. 그들을 위하여 독도에 어민조난 위령비가 세워지기는 했으나 그들의 죽음을 밝힐 수 있는 떳떳한 행동을 보여야 할 것이다.

1953년 독도는 우리정부의 항의로 미공군의 폭격장소에서 제외되었다. 
 
* 증 언

1995년 6월 23일,7월 20일 2차례에 걸쳐 독도연구회 회원들이 울릉도의 푸른 울릉·독도 가꾸기 모임과 함께 직접취재한 내용입니다.

- 1차 공두업 옹 증언 내용.(당시83세)

1948년 6월 공두업 옹은 당시 독도(서도 물골근처)에서 미역을 채취중 이었다고 한다. 오래전 일이라 정확한 시간은 기억이 안나지만 10시∼11시경에 휴식을 위하여 물골에 내려서 점심 식사 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항상 그 시간에는 점심을 위한 휴식시간이라 정확한 시간은 기억이 나질 안지만 그때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그 시간에 갑자기 비행기 본체에 기관총이 나와있는  폭격기가 날라와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고 했다. 주변의 수 많은 갈매기들이 총에 맞아  떨어졌으며 겁에 질린 공두업 옹은 급히 배를 돌려 울릉도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후 위협을 느낀 공두업 옹은 울릉 경찰서로 찾아가 이 사실을 따졌으며 며칠 뒤 당시 경찰 총무 이종오 씨가 안심하고 조업하라는 통보를 받은 뒤 다시 어업을 위하여 독도로 출항했다고 했다.

그러나 미역채취를 위해 다시 독도로 갔지만 역시 같은 시간경인 10시∼11시경에 12대의 폭격기가 편대를 이루어(무리를 이루어 왔다고 함)무차별 폭격을 가했다고 했다. 당시 같이 조업했던 동료 안찬수, 최양국씨는 당시에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서도 근처에서 조업을 하던 배의 수를 정확히 기억한다고 했다. 서도 근처에만 떠있는 배들만 32척이었다. 당시 강원도에서 조업 나온 배도 상당수 있었으며 강원도에서 나온 미역과 쌀,술 등을 교환하기 위한 물물교환선이 한 척있었다고 한다. 이는 정확하다고 공두업 옹은 주장했다. 조업 중 무료하면 조업하는 배들을 세보는 것이 습관이라고 말하면서.

그 무차별한 폭격에서 살아남은 배는 강원도에서 온 물물교환선12척과 서도 물골 근처에 정박 중이던 공두업 옹의 배가전부였다고 한다. 다른 배들은 전부 폭파되어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나마 그의 배는 파편과 충격으로 성치 못한 상태였다고 한다.

당시는 너무 겁이나 정신이 없어 정확한 비행기 수도 못 세어봤으며, 경황이 없어 폭격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살아남는 것밖에 생각나질 않았다고 한다.

그 사건 후 살아 돌아온 공두업 옹은 다시 울릉 경찰서로 찾아가 이종오씨에게 격렬하게 항의하였으나 어떠한 답변도 듣지 못했으며 또한 피해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게다가 배상이 나왔어도 희생자에게 돌아갔는지 배상에 대한 여부는 전혀 모른다고 했다. 
 
- 2차 장학상 옹 증언 내용.(당시 83세)

장학상 옹은 먼저 만나보았던 공두업 옹보다 더 늙어 보였다. 이유는 그 당시 입은 상처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배를 소유한 선주였으며 공두업 옹과 같이 미역채취를 위해 독도에서 조업하였으나 서도가 아닌 동도에서 조업하고 있었으며 조업 중 폭격당했다고 증언했다.
폭격은 서도 물골 근처에서 시작되어 동도로 융단폭격으로 이어졌는데 비행기 소음이 울릉도에서 들린 후 12대의 폭격기가 2개의 편대로 나뉘어 폭격을 가했다고 한다. 그는 공두업 옹과 달리 동도에서 조업하여 나중에 폭격을 받았기 때문에 비행기를 세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장옹은 미역채취를 마치고 채취한 미역을 가공하여 널고 말리기 위하여 배에서 내려 동도에 상륙해 있었다고 한다. 상공 500∼600m 정도에서 시작된 폭격에서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 주변은 금세 혼비백산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배가 가라앉은 참상이 계속 되었다고 한다. 그는 민간인이라는 표시로 흰옷을 흔들었으나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폭격은 계속되었다고 했다.

폭격시간을 묻자 그는 정신이 없어 폭격시간이 얼마나 지속됐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 동도에서 조업한 배수는 50척이 안됐다고 했다. 폭격이 끝난 후 그는 자신의 배 (15t 금의 목재선)를 이끌고 울릉도로 복귀를 시도했으나 폭격으로 파손 되 항해가 불가능했다고 했다. 당시 그의 배에는 파편으로 옆구리가 터진 이와 파편으로 발목이 잘려 버린 사람 등 육지인 두 명과 함께 공두업 옹과 선원이었던 이상주씨가 상처를 입고 있었다고 했다. 저녁이 되어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겨우 폭격을 피한 뎅구리선(커다란 목선)에 몸을 옮겨 탔으나 나머지 부상자 두 명은 결국 침몰되는 배에 남겨졌다고 한다. 장옹도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는 상태라 겨우 옮겨 탔으며 그 두 사람의 죽음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 사건으로 공두업 옹도 날라 온 파편이 다리에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 상처의 흔적은 거의 47년이나 지난 그 당시에도 선명히 남아있었다. 이는 직접 확인했다. 이 상처로 그는 제대로 걷지 못하는 불구의 몸이 되었다고 했다. 겨우 울릉도로 복귀한 후 한달 가량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며 그때 미국인들이 찾아와 병세를 물었으나 어디소속인지는 모르겠으며 게다가 아무런 보상도 없었다고 했다. 
 
또 다른 증언..........

이 사건을 어려서부터 듣고 자랐다는 울릉도주민 김찬수씨의 증언입니다.

그는 사건당시 3세였으며 후에 마을 어른들에게 듣기로는 폭격 당일 날 11시경 비행기들이 독도 쪽으로 떼지어 날아간 후 독도 쪽에서 불꽃이 터지는 것을 울릉도 주민들이 목격하고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고 했다. 폭격당시에는 나이가 어린 관계로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후에 미군측에서 약간의 보상금과 물건이 나왔는데 이것으로 희생당한 영혼들을 위로하는 위령제의 경비로 사용했다고 전해 들었다고 했다. 희생자 가족측에서는 보상금을 받지 못한 걸로 동네 어른들에게 들었다고 했다.


 

 

 

 

관련
내용
관련내용이 없습니다

 

 


| 개 요 | 이 책은 2008년도에 일본 중의원에서 독도문제와 ...

 

 
  Copyright ⓒ 2001.독도본부. All rights reserved
전화 02-747-3588 전송 02-738-2050 ⓔ-Mail : dokdo2058@korea.com
후원 :국민은행 024-047973-01-019(독도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