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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6월 29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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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미군 폭격연습에 어부 떼죽음

미군 폭격연습에 어부 떼죽음

48년 美공군기, 우리 어선에 무차별 발포
최소한 수십명 희생  

국토의 동쪽 끝을 지키는 외딴섬 독도는 국 토와 민족, 그리고 통일을 생각케 하는 상징적인 섬이다.

동도 서도의 두 큰 섬과 장군 바위 탕건바위 등 34개의 바위섬과 암초로 이뤄진 화산섬 독도는 20여종의 새, 70여종의 풀과 나무, 다양한 어패류와 해조류로 천 혜의 보고이기도 하다.

하지만 망망대해의 이 평화로운 고도에 민족의 쓰라린 역사가 각인돼 있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꼭 반세기 전인 48년 6월8일, 수 십명의 울릉도와 강원도 어부들이 영문도 모른 채 미 공군기의 폭탄세례를 받고 검푸른 바다에 수장된 것.

이른바 「미군기 독도 폭격사건」이다.

몇몇 역사학자와 울릉도 주민들을 제외하고 는 이 사건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생존 자가 별로 없는 데다 사건 경위에 대한 조사 와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 다.

동아일보는 48년 6월14일과 17일 동경발 UP 통신을 인용해 『미국 극동함대 사령부가 독도폭격이 고공폭격연습대에 의한 것이라고 공식 인정했다. 이 성명서는 11척의 조선발 어선을 총폭격하여 14명의 조선인을 살해하 고 기타를 부상시켰다고 전해진 이 사건을 불행한 유감스런 사고라고 말한다』고 보도했 다.

사건 직후 미군 당국은 소청위원회를 구성, 울릉도와 독도에서 피해 내용을 조사했고 1 명을 제외한 피해자들에게 소정의 배상을 완 료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배상 내용, 독도 를 연습대상으로 지정한 경위, 사고에 따른 내부 처벌 등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그후 「미군기 독도 폭격사건」은 50년 가까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었다. 그러나 「푸른울 릉독도가꾸기모임」(회장 이예균·50)과 한국 외국어대 독도문제연구회가 지난 95년 생존 자와 유가족의 증언을 채록하면서 조금씩 진 상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NEWS+」는 이처럼 불충분한 증언과 기록 을 바탕으로 울릉도 현지에서 당시의 상황을 추적했다. 아쉽게도 「폭격 현장의 마지막 생존자」로 알려진 장학생씨는 재작년 6월, 83 세로 이미 세상을 떠났다.

사건 당시 10여척 의 배를 나눠타고 독도로 미역채취를 나간 울릉도 주민 30여명 가운데 폭격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장학생, 공두업(96년 3월, 83세로 사망), 하재선씨(90년 8월, 72세로 사망) 등 세 사람뿐이었다고 공씨의 아들 태우씨(55) 는 전한다.

작고한 장학생, 공두업씨의 95년 증언기록과 당시 증언 청취에 참가했던 이예 균회장 등의 증언을 토대로 사건의 윤곽을 재구성해본다.

△공두업씨의 증언

48년 6월경 동료 2명과 서도 물골 부근에서 미역 채취중이었다. 쉬고 있는 동안 폭격기 로 추정되는 비행기가 바다 위로 기관총을 난사해 갈매기들이 무수히 죽었다.

바로 울 릉도로 돌아와(당시 12~15시간 소요) 경찰총 무 이종오씨에게 항의했다. 「안심하고 조업 하라」는 이씨의 말에 따라 며칠 뒤(6월8일로 추정) 다시 서도에 작업을 나갔다.

점심시간 이 가까워지자 물골에 있는 동굴(현재는 「배 석운동굴」로 불림)에 들어가 식사준비를 했다. 서도 앞에는 32척(직접 세어 보았다고 주장)의 배가 미역채취중이었다. 오전 11시에 서 정오 사이 갑자기 「꽈꽝」하는 폭발음과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폭탄 세개가 동굴에도 떨어져 동굴 중간이 무너졌고 돌무 더기가 쏟아져 동료들이 쓰러졌다.

서도쪽 배는 전부 침몰했다. 일부 어부들은 태극기 를 흔들고 도망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일본쪽으로 날아가던 세 대의 폭격기 가운데 한대가 다시 돌아와 폭격 결과를 확인하는 듯 독도를 낮게 한바퀴 선회하고 같은 방향 으로 가는 것을 목격했다.

다음날 새벽 장학 생 한재선씨와 함께 도동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는 150명에서 200명으로 추정된다.

△장학생씨(당시 선주)의 증언

동도 쪽 자갈밭에 내려 채취한 미역을 말리 고 있었다. 갑자기 울릉도 방향에서 10여대 의 폭격기가 2개 편대로 나뉘어 서도의 물골 부터 시작해 동도쪽으로 융단폭격을 해왔다.

수백미터 상공에서 퍼붓는 폭격으로 거대한 물기둥이 솟고 사람들과 파편들이 하늘로 치 솟았다. 바다는 부상당하거나 죽은 어부들과 목선의 파편, 떠오른 바닷고기들로 핏빛이었다. 폭격이 끝난 뒤 내 배로 귀항을 시도했으나 불가능했다.

저녁이 되어 공두업, 하재 선씨와 뎅구리선(커다란 목선)으로 옮겨 타 울릉도로 돌아왔다. 당시 서도에는 30척, 동 도에는 50척의 배가 있었다. 이 가운데 단기 통 엔진을 가진 동력선(야끼다마)이 50척, 무동력 작업선이 30척 정도였다.

미역 채취에 는 배 한척당 최소 2명이 필요하므로 적어도 150여명이 현장에 있어 희생자는 더 많다. 한달 가량 병원에서 치료 받았으며 그때 미 국인들이 찾아와 병세를 물었다. 보상은 없 었다.

이 사건은 51년 6월 경북도지사 참석하에 독 도 조난어민위령비를 건립하고 위령제를 올 리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그나마 일본인들이 53년 독도에 침입, 위령비를 파괴해버려 남 아있는 「현물」 자료는 거의 없다.

생존자들은 자신들만 살았다는 「죄책감」과 참혹한 현장의 충격으로 고통스러워했다고 가족들은 전한다. 공태우씨는 『부친이 「너거 는 우째가 살아왔노」라며 통곡하는 유족들을 피해 한달 가까이 산에 숨어 있었다』고 회상 한다. 그후 사건 자체에 대해 입을 열지 않 던 공씨는 지난 90년 이후에야 단편적으로 증언을 시작했다.

공씨는 『아버지가 지옥같 은 폭격현장에서 친구들을 데려고 나오지 못 한 것을 두고두고 한스러워했다』고 말한다.

울릉도 주민 김유길씨는 『96년경 주문진에 사는 중년의 형제가 찾아와 40년대 후반 아 버지가 미역 채취하러 독도에 들어갔다가 돌 아가셨다며 위령비가 어디 있는지 물어본 적 이 있다』고 기억한다. 김씨는 『당시 사건현 장에는 강원도 어선이 대부분이어서 사망자 의 대다수도 강원도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 다』고 전한다.

당시의 상황은 우리 외무부가 펴낸 「독도관계 자료집-왕복외교문서」 중 다음과 같은 내 용을 통해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정 부는 50년 4월25일 미 제5공군에 독도사건에 대해 조회하자 미 제5공군은 같은해 5월4일 「독도와 그 근방에 출어가 금지된 사실이 없 었고 독도는 극동공군의 연습목표로 돼있지 않았다」고 공식 회답했다.

정부는 6·25전쟁 중 독도가 미-일합동위원회에 의해 미 공군 의 연습기지로 선정됐다는 소식에 재차 항의 했다. 미 공군사령관은 정부에 「53년 2월27 일자로 독도는 미 공군의 연습기지 선정으로 부터 제외됐다」는 공식서한을 보냈다』

이 기록을 근거로 우리 정부는 『미국이 우리 항의에 따라 독도를 미 공군 폭격연습장에서 제외했으니 독도는 우리 영토』라고 주장한 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한국이 아닌 일본 무인도에 폭격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독도 의 영유권을 주장한다.

폭격사건의 진상과 피해조사는 완전히 뒷전이었다.

사건발생 50년만에 미약하나마 진상규명 노 력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울릉도 향토사학자 이종열씨(67)는 『우리 국 토의 동쪽 끝 독도에 쓰라린 역사가 있었음 을 국민이 알아야 한다』며 『독도가 우리 어 민들의 생활터전이었기에 그곳에서 희생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의 한 관계자도 『오랜 시간이 흘렀고 자료도 거의 없지만 독도의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규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연구소는 도의 지원을 받아 지난해부터 오는 8월까지 역사, 국제법적 지위, 문화, 언어, 생태 등 5개 분야로 나눠 독도에 대한 조사를 진행중이다.

물론 사건 당시 폭격장면을 촬영한 미군의 항공사진이나 피해자들의 당시 진술기록을 입수할 수 없어 2차적 증언만으로 사건의 전 모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이 사건 진상의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의 관련자료가 공개되 는 것이 급선무라고 현지인들은 주장한다.


〈울릉도=강승구 기자〉  1998년 6월25일자(139호) 주간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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