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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5월 25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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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독도폭격사건의 진상규명과 주요쟁점

독도폭격사건의 진상규명과 주요쟁점_홍성근.hwp

독도폭격사건의 진상규명과 주요쟁점  

홍 성 근(洪 聖 根)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국제법)

Ⅰ. 머리말

Ⅱ. 독도폭격사건의 발생과 경과   
1. 독도폭격사건의 발생   
2. 1948년 6월 폭격사건   
3. 1952년 9월 폭격사건

Ⅲ. 독도폭격사건의 의문   
1. 1948년 6월 폭격사건의 의문   
2. 1952년 9월 폭격사건의 의문

Ⅳ. 독도폭격사건과 영유권문제   
1. 한일간의 논쟁   
2. 폭격연습지의 지정과 해제   
3. 폭격사건에의 일본개입문제

Ⅴ. 진상조사를 촉구하며



Ⅰ. 머리말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민족이 독도에 흘린 피와 땀의 흔적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외부세력으로부터 독도를 지키기 위해 흘린 피와 땀이 있는가 하면, 독도를 삶의 터전으로 일구기 위해 흘린 피땀도 있다. 그것뿐이 아니다. 영문도 모른채 우리의 땅 독도에서 흘려야 했던 피와 땀도 있다. 1948년 6월과 1952년 9월 독도에서 일어난 폭격사건으로 죽고 다친 우리 선량한 어민들이 흘린 피와 땀이 그것이다.
1948년 6월 8일에 일어난 폭격사건은 당시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며, 결코 묻혀질 수 없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를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1948년 6월 14일 아직 정부도 수립되어 있지 않은 시대상황이었지만, 제헌국회(제11차 본회의)에서는 이 문제를 긴급동의로 다루었다.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조사위원을 선정하여 조사토록 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제헌국회는 다수결로 독도폭격사건을 외무국방위원회에서 처리토록 넘기자는 의견이 채택되어 토론을 종결하였다.
그후 외무국방위원회에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1999년 10월 11일에 있은 해양경찰청과 수협중앙회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국회 윤한도 의원은 1948년 폭격사건의 문제를 제기하며, 그에 대한 객관적 자료확보와 사건조사 및 그를 통한 피해자 배상요구 등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움직임을 볼 수 없다.
독도폭격사건은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48년 6월에만 있은 것은 아니다. 1948년 사건은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이지만, 1952년 9월에 일어난 사건은 한일간의 독도영유권문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독도폭격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는 1948년 사건 뿐만 아니라, 1952년 9월의 사건 등 독도폭격과 관련된 전반적인 사항에 관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 어느 한 사건의 사실관계도 아직 제대로 파악되어 있지 않다.
이 글은 독도폭격사건의 진상조사를 촉구하며, 아직까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사실관계를 흩어져 있는 자료를 통해 또한 몇가지 의문 제기를 통해 주요쟁점을 정리하고자 한다.


Ⅱ. 독도폭격사건의 발생과 경과

1. 독도폭격사건의 발생

독도폭격이 문제가 되고, 크게 언론의 주목을 받은 사건은 1948년 6월 8일과 1952년 9월 15일에 일어난 폭격사건이다. 하지만 독도에서의 폭격사건은 이 두 건에 그치지 않는다. 1948년 6월 8일 사건 당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울릉도 島司 許苾씨가 증언한 바에 의하면, 그로부터 1년전인 1947년 4월 16일에도 폭격이 있었는데, 자신도 몸소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인명이나 재산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1948년 6월 8일 폭격사건의 생존자인 공두업 씨(증언 당시 나이 83세)는 1995년 6월 23일 한국외대 독도문제연구회(및 푸른울릉독도가꾸기회)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여, 1948년 6월 8일 폭격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도 폭격이 있었던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1948년 6월 경 독도(서도 물골 근처)에서 미역채취중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비행기(증언으론 몸체 곳곳에 총구가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폭격기로 짐작이됨)가 날아와 바다위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한다. 갈매기들이 총에 맞아 무수하게 널려있는 상태에서 당시 공두업 옹은 급히 배를 돌려 울릉도로 돌아왔다(동료: 안찬수, 최양국씨- 현재 사망). 생업에 위험을 느낀 이들은 당시 경찰총무 이종오씨에게 이를 보고했으나, 며칠 뒤 안심하고 조업을 하라는 통보를 받고, 2차로 미역채취를 위해 독도에 배를 띄웠다. 폭격시간은 아침 10-11시 정도를 기억하고 있다는 공옹은 …. (필자 주: 이하 1948년 6월 8일 사건에 대한 증언으로 이어짐). … 공옹은 귀환 후 경찰서로 찾아가 이종오 씨에게 격렬한 항의를 했으나 그는 어떤 변명도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1952년 9월 15일 사건이 일어나고 일주일 뒤인 9월 22일에도 폭격사건이 있었다. 제2차 울릉도·독도학술조사단인 한국산악회가 1952년 9월 15일 사건이 일어나고 3일 뒤인 9월 18일 울릉도에 도착하였다. 조사단이 울릉도에 도착하여 9월 15일 사건의 소식을 접하게 되어 9월 19일 가지기로 한 독도상륙을 연기하고, 우리나라 해군총참모장과 공군당국, 그리고 미 해군당국에 연락을 취하여 조사단의 안전한 항해를 보장토록 하였다. 그러나 9월 22일 제2차로 독도로 출발하여 독도 2㎞ 해상에 접근하였을 때 갑자기 4대의 비행기가 나타나 해상에 폭탄을 투하하며, 폭격연습을 하였다. 이 때문에 조사단은 독도에 상륙하지 못하고 0시 45분경에 울릉도로 귀환하였다. 당시 조사단장이었던 홍종인 씨가 정부에 타전한 보고와 관련하여 소개한 신문의 기사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당일 확인된 비행기의 정체는 연녹색의 쌍발기로서 우익에 두 개의 흰줄이 그어져 있었으며 날개 끝에는 백색의 표식이 붙어있는데 처음에는 약 천 '야드'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하였으나, 점점 고도를 높이고 나중에는 두 대가 울릉도 방향으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따라서 산악회학술조사단은 독도상륙을 연기하여 24일 상륙키로 하였다고 한다.

9월 24일 독도학술조사단은 우리 해군 당국의 도움으로 재차 독도상륙을 하고자 하였으나, 계속되는 폭격으로 독도 상륙을 포기해야 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독도에서의 폭격은 크게 문제가 되어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은 1948년 6월 8일과 1952년 9월 15일의 폭격사건 외에도 서너차례의 폭격이 더 있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 글에서는 독도에 대한 다른 폭격사건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료가 많은 1948년 6월 8일 사건(이하 1948년 6월 사건)과 1952년 9월 15일-24 사건(이하 1952년 9월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1948년 6월 폭격사건

1948년 6월 8일 화요일, 울릉도와 강원도에서 온 배들이 독도에서 고기잡이와 미역채취에 열중하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인 오전 11시경 비행기 소리가 났다. 지나가는 비행기이겠거니 하며 어민들은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비행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독도로 접근을 하더니, 갑자기 독도 위에 폭탄을 투하하였다. 뒤이어 독도 주변수역에서 조업하고 있던 선박을 향해 폭탄을 투하하며 기관총 사격을 가하였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배 위에 있던 자들은 바다로 뛰어들고, 독도 위에서 휴식을 취하던 어민들은 동굴로 급히 몸을 피하였다. 어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손짓을 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이곳 저곳에서 어민들이 무참히 죽어갔다. 4차례에 걸친 폭격이 있은 후 한 대의 비행기가 와서 한바퀴 돌고는 사라졌다.
생존자들은 다음날인 6월 9일 독도로 출어나온 배들에 의해 구조되고, 이들에 의해 전날 있었던 일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6월 9일 오후 9시경 울릉경찰서는 구조선을 독도 현지로 급파하여 나머지 생존자와 사체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다음날(6월 10일) 오후 6시경에 돌아온 구조선엔 무참히 죽은 사체 2구만 실려있었다. 이 사건은 사건발생 이틀 뒤인 6월 10일 울릉도로 급히 달려간 기자들에 의해 6월 11일 보도되면서 연일 신문지상을 채우며, 온 국민으로 하여금 울분과 비통함에 잠기게 하였다.
1948년 6월 8일 사건이 일어나고 1948년 6월 15일자로 미극동항공대사령부는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하였다.

미국항공대가 일본 해에서 행한 폭격연습에 관한 사진 및 보고를 조사한 결과는 상금 미국비행기가 지난 6월 8일의 11척 조선어선 침몰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혹 미국기가 관련이 있다는 것이 판정되었다하더라도 이 폭격은 전연 우발적일 것을 확신한다. 조선 경찰은 어선이 총폭격을 받고 침몰하여 14명의 어부가 사망하였다고 말한 구역은 소정의 포격연습장이나 표적은 일본해내의 대암석 부근에 있는 일련의 소암석이며 이는 얼마전부터 폭격연습의 목표로 사용되어 온 것이다. 8일 이 구역을 비행한 부대는 高空에서 비행하였다. 이로서 암석 가운데 또는 부근에 있는 폭격장 범위내외에 있는 작은 어선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곤란케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극동항공대는 이날 총격행동을 취하지 않은 것이 확인되었다. 사건현장은 남조선미국점령지대 한 해안 동방 약 백 마일에 있다.

이 발표가 있고 난 이틀 후인 1948년 6월 17일자로 다시 미극동공군사령부는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하였다.

현장촬영사진을 심사한 결과 독도근해에 있는 조그마한 어선들은 B29 폭격기의 고도폭격연습시에 바위로 간취되었던 것이 판명되었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오끼나와 기지를 출발한 B29폭격기대가 폭격을 가하기 30분전에 정찰기가 6회나 독도부근(북위37도 15분 동위 131도 35분 지점)을 시찰하고 연습에 무방하다는 것을 보고하였든 것이다. 현지 부근에는 포격대상이 된 다수의 소도서가 있는 만큼 이 어선들도 도서로 잘못 간주된 것 같다. B29폭격대는 2만 3천 피트 상공에서 연습탄을 투탄한 것이었으며 이들은 해상에 하등의 선박도 보지 못하였다고 보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폭격기 30분후에 정찰기가 촬영한 사진에 의하면 이 위험지구내에 다수의 소선박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정식조사가 끝나는대로 완전한 보고를 상급사령부에 절충함터이다.

미군 당국은 1948년 6월 15일자 발표에서는 미군기에 의한 폭격을 부인하며, 폭격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선박과 바위를 구분하지 못해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바로 이틀 뒤인 1948년 6월 17일자 발표에서는 일본의 오끼나와 기지에서 출발한 미공군기의 소행을 인정하면서도, 미군기인 B29폭격기가 2만 3천 피트(약 7,000m)의 고공에서 연습탄을 투하하여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폭격기들이 바위와 작은 어선들을 구분하지 못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폭격기 편대 역시 폭격 당시 해상에서 어떠한 선박도 보지 못했다고 보고한 것을 전하고 있다.
미군의 소행이 분명하면, 인명과 재산피해 상황을 조사하여 그 결과를 토대로 배상하겠다고 한지 3일만에 미 점령군은 중앙청 공보부를 통해 '피해 조사가 완료되었으니, 배상하러 독도로 출발하였다'는 아주 간단한 발표만 전하였다. 그 이상 독도폭격사건과 관련하여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건발생 후 반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오히려 언제 그러한 일이 있었냐는 듯 잊혀져 가고 있다.


3. 1952년 9월 폭격사건

1955년에 발행된 우리나라 외무부정무국 자료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948년 독도폭격사건으로 독도에서 조업중인 우리 어민 30명이 희생된 사건이 있어, 1950년 4월 25일 한국 공군고문관을 통하여 폭격연습사건에 관하여 미군 제5공군에 조회를 하였다. 1950년 5월 4일자로 미군 제5공군으로부터 회답이 왔는데, 내용은 독도와 그 주변수역에서의 조업이 금지된 사실이 없고, 또 극동공군의 연습폭격목표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한국 공군총참모장으로부터 경북도를 통하여 울릉도에도 기별되었다.

이러한 조회와 회답, 통지에도 불구하고, 다시 어민들이 조업을 하고 있는 독도에 폭격사건이 일어났다.
1952년 9월 15일 오전 11시경 미극동군사령부 소속의 폭격기가 독도상공에 출현하여, 독도를 2차례나 선회한 뒤 4개의 폭탄을 투하하고 남쪽으로 날아갔다. 당시 독도에는 울릉도 통조림 공장 소속선박인 광영호가 해녀 14명과 선원 등 모두 23명이 소라, 전복 등을 따고 있었다. 그러나 인명피해는 없었던 듯하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침 한국산악회의 제2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 일행 36명이 9월 18일 울릉도에 들어와, 재차 일어난 독도폭격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들은 관계 당국에 전문을 통해 이 소식을 전하고 조사단의 안전한 항로를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9월 22일 제2차로 독도로 출발하여 오전 11시경 독도부근 2km해상으로 접근했을 때, 돌연 4대의 비행기가 나타나 해상에 폭탄을 투하하고 사라졌다. 결국 상륙을 하지 못하고 울릉도로 귀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뒤인 9월 24일 다시 독도에 상륙하려고 했으나, 또 다시 시작된 폭격으로 상륙을 포기해야 했다.


Ⅲ. 독도폭격사건의 의문

1. 1948년 6월 폭격사건의 의문


1) 몇 대의 폭격기가 폭격에 가담하였는가?

생존자들 중에는, 폭격기를 6대 혹은 11대까지 보고 피하였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12대의 폭격기가 2개의 편대로 나누어 폭격했다고 전하는 자도 있다. 당시 국회 본회의에서 소개되고 있는 폭격기 수는 9대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들 증언이 대체로 일치하는 것은 폭격기들이 4차례에 걸쳐 폭탄투하와 기관총 사격을 하였다는 것이다.

2) 얼마의 높이에서 폭격을 가하였는가?

미군의 발표에 의하면 2만 3천 피트(약 7,000m)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우리 경찰은 폭격기의 정체와 관련하여 폭격기 날개에 '원과 별'의 標章이 있었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육안으로 비행기에 그려져 있는 원과 별 표장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면, 당시 언론이 말하는 바와 같이 고작 1000미터 내였을 것이다. 그리고 육안으로 비행기의 표식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였다면, 비행기에 장착된 광학기계를 통해 선박과 바위를 구분치 못했다고 하는 말은 이해하기 힘들다. 생존자 중에는 구체적인 수치를 대며 폭격기가 600미터 높이에서 폭격을 가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3) 선박과 바위를 오인했다는 것은 사실인가?

미군의 폭격이 있을 때 어민들은 태극기를 흔들거나 바다로 뛰어 들거나 동굴로 피하는 등 미군기의 폭격을 중지시키고자 애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아래의 인명 및 재산피해 정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독도에는 상당수의 어선과 사람들이 조업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소 수치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광학기계를 갖춘 정찰기가 6회나 독도를 정찰하였고, 폭격에 가담한 9-12대의 폭격기가 4차례나 폭격을 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중 한 대도 선박이나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또한 독도는 동도와 서도라는 두 개의 큰 섬과 그 주위에 크고 작은 30여개의 바위들이 있긴 하지만, 바위와 선박의 색상이 다르고, 움직임이 없는 바위와 움직이는 사람과 선박을 구분치 못했다고 하는 것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4) 기관총 사격은 있었는가?

폭격기가 기관총 사격을 하였는가와 관련하여 미군은 처음에는 부인을 하며, 조사중이라고 하더니, 후에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생존자들의 공통된 증언과 함께, 당시 언론에 총알에 의해 구멍난 트렁크 등이 물적 증거로 제시되었다.

5) 인명 및 재산 피해는 어느 정도였는가?

미군은 간략히 피해건수가 36건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당시 남한 경찰은 14명이 사망하고 11척의 배가 침몰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천지』(1948년 7월호)라는 잡지에 발표된 피해정도를 보면, 사망 16명, 중상 3명, 침몰선박이 발동선 7척, 전마선 14척, 범선 2척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1952년 울릉도·독도학술조사단장인 홍종인 씨의 보고 및 1955년 외무부정무국 자료에 의하면, 30명의 어민이 사망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생존자의 증언을 토대로 사람은 150명-320명 정도가 죽었다고 추정하기도 하고. 선박피해는 독도 주위에 30여 척의 배가 있었다는 증언과, 80여 척의 크고 작은 선박이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6) 피해배상은 적절히 이루어졌는가?

1948년 6월 29일 미군소청위원회는 중앙청공보부를 통해 '판명된 피해건수 36건 중 33건의 조사완료. 동위원회 위원 위나지크 대위 33건 배상을 해결차 금일 독도로 출발하였다. 미해결 중 나머지 3건은 피해자주소가 판명 되는대로 즉시 해결할 것이다'라고 간단한 발표를 하였다. 그리고 당시 언론보도에 의하면, '울진군 죽변어업조합으로부터 강원도 수산과에 들어온 보고. 미군당국 독도사건관련하여 7월 1일자로 피해자에 대해 배상금 지불하고, 죽변어업조합관내 피해어민에 대한 배상액은 유가족 부조료 어선침·파손 등 2,484,200원'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울릉도에서 이루어진 배상관계를 보면, 생존자인 공두업 씨는 어떠한 배상도 받지 못했으며 피해자 가족에게 배상이 되었는지는 잘모르겠다고 했다. 또 다른 생존자인 장학상 씨는 귀환 후 한달가량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그때 미국인들이 찾아와 병세를 물었으나 아무런 보상은 없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폭격당시 사망한 김태현 씨의 아들인 김찬수 씨(1946년생)는 미군측에서 보상금과 물건이 나왔는데 이것들은 피해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의 경비로 다 쓰이고 피해자 가족들은 보상금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동네어른들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1948년 사건 당시 부상자를 치료했던 의사 전석봉 씨의 친척으로 그의 일을 도왔던 홍순칠 씨(독도의용수비대장)는 이 배상금과 관련하여 그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 배상금이 적절치 못했음을 말하고 있다.

미공군 폭격연습의 제물이 된 우리 어민 30여 명이 무참하게 독도에서 희생되었다. 1948년 6월 30일(필자 주: 6월 8일의 잘못된 표기임)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국내 뉴스 신문 등에는 톱으로 외딴 섬 독도가 연일 보도되었고, 이 섬이 어느 곳에 위치한 것조차 모르던 대다수 국민들도 귀에 익숙하게 되었던 것이다. 38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국이 군정을 실시하고 있을 때인지라 어른은 아이보다 배액으로 희생된 가족들에게 소위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그 액수란 것이 대국 미국으로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어 요크셔 미국 돼지 한 마리 값에 불과한 보잘 것 없는 보상금이었으니……. 1951년 1월 6일(필자 주: 1월 6일은 6월 8일의 잘못된 표기임) 당시 경상북도지사였던 조재천 씨의 주선으로 독도 동도가 마주 보이는 서도 자갈밭 위쪽에는 독도조난어민위령비가 세워졌고, 그날 풍랑이 심한데도 도지사를 위시, 많은 섬사람들이 우리 해군 함정 춘천호에 동선, 독도에서 위령제를 거행하였다.

7) 왜 폭격연습계획은 한국 국민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는가?

독도가 미군의 폭격연습장으로 처음으로 지정된 것은 1947년 9월 16일 연합국최고사령부 명령인 SCAPIN 제1778호에 의해서이다. 그런데 앞에서 인용한 울릉도 島司 許苾 씨의 증언에 의하면 1947년 4월 16일에도 폭격이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법적 근거도 없는 상황에서 미군은 독도를 폭격연습지로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SCAPIN 제1778호를 보면, 이 명령은 일본 정부에 대해 내려진 것으로 일본의 隱岐島 주민 등에게만 사전에 폭격연습사실을 통보할 것으로 되어 있고, 독도를 생활터전으로 삼고 있는 우리 어민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1951년 7월 6일 SCAPIN 제2160호에서도 한국 어민이 아니라 일본어민에게 폭격연습 15일전에 통보할 것을 명하고 있다.
1948년 6월 폭격 당시 독도는 1946년 1월 29일 SCAPIN 677호에 의해 일본의 행정관할구역에서 제외되어 있었고, 1946년 6월 22일 SCAPIN 제1033호에 의해 일본의 어선들은 독도 12해리 내 수역으로의 접근이 금지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면 독도에 대한 일본어민들의 출어는 금지되어 있었고, 한국어민들의 출어는 금지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독도를 실질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우리 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정부조차 독도가 미공군의 폭격연습지로 지정된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1952년 9월에 있은 제2차 울릉도·독도학술조사단장인 홍종인 씨의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지난 봄(필자 주: 1950년) 4월 25일 한국공군고문관을 통하여 미군 제5공군에 조회했든바 5월 4일부로 독도와 그 근방에 출어가 금지되었다는 사실이 없고, 또 극동군의 연습폭격목표로 되어 있지 않다는 회답이 있어서 한국 공군총참모장으로부터 경북도를 통하여 울릉도에도 기별되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今般에 하등의 경고도 없이 폭탄투하가 있었기 때문에 울릉도 도민들은 1948년 6월 30일(필자 주: 6월 8일의 오기임) 30명의 사망자를 낸 미공군의 폭격사건의 참담한 기억을 다시 생각하고 불안공포를 느끼며 미군당국의 통보를 믿기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2. 1952년 9월 폭격사건의 의문

1952년 사건의 경우 인명 및 재산 피해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인 한국산악회가 독도에 상륙하려고 할 때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이다. 위의 1952년 사건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48년 사건 이후 미군측에 조회하여 1950년 5월 4일자로 회답받기를 '독도와 그 주변수역에서의 조업이 금지된 사실이 없고, 또 극동공군의 연습폭격목표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한국 공군총참모장으로부터 경북도를 통하여 울릉도에도 전해진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1948년 독도폭격사건 이후 미군은 그해 6월 22일자로 독도에서의 폭격연습을 중지한다는 발표를 하였었다. 그리고 1952년 9월 광영호의 독도 조업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울릉도 어민들은 이를 믿고 독도에서 조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52년 한국산악회의 울릉도·독도학술조사단이 독도에 상륙할 즈음에 폭격이 이루어졌다. 자료에 의하면 미군측은 한국산악회의 울릉도·독도 학술조사 계획을 이미 여러 날 전에 알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 자료에 나온 학술조사단의 일정에 따르면 9월 14일과 15일에 독도 상륙이 예정되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상륙이 예정된 9월 15일에 폭격이 이루어졌다. 다행히 산악회가 일정보다 늦은 9월 18일에야 울릉도에 도착하여 이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학술조사단이 관계당국에 안전한 항로를 보장해 줄 것을 부탁하고 이루어진 9월 22일 독도상륙시에도 조사단이 탄 진남호(약 300톤)가 독도 부근 2km해상에 접근했을 때, 다시 폭격기가 나타나 해상에 폭탄을 투하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뒤인 9월 24일 해군 당국의 도움을 받아 다시 독도에 상륙하려고 했을 때에도 또 다시 시작된 폭격으로 학술조사단은 독도상륙을 포기해야 했다. 당시 언론은 그날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독도학술조사단이 독도주변에 대해 폭격으로 독도에 상륙하지 못하고 해군 당국의 노력으로 재차 동도로 향하였으나, 역시 폭격이 계속되고 있는 관계로 24일 오전 9시 30분 독도 1킬로 지점까지 접근하였으나 상륙하지 못하고 다시 울릉도에 돌아왔다고 다음과 같은 학술조사단 제4신이 도착하였다.

1. 24일 재차의 독도행을 결행한 본단이 24일 상오 9시 30분경 독도 동방 약 4킬로로 지점에 접근하자 2대 내지 4대의 쌍발기가 약 3천미터 고도에서 여전히 폭격연습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본선은 독도 1킬로까지 접근하여 섬을 일주하여 상륙할 기회를 엿보았으나 폭격기는 본선을 본체만체 섬 주변에 연속 폭탄을 투하 도저히 접근할 수 없음. 극히 염려되었던 것은 본선보다 2시간 전에 독도에 도착한 해녀 21명이 편승한 광영호였는데, 1시 10분경 폭탄 투하 지점 약 3미 근해에서 해선을 발견하고 안심하였다.
2. 본선이 2시간 반에 걸쳐 섬을 일주하는 동안 약 10여발의 투탄광경을 볼 수 있었다. 대개는 섬 주변에서 폭발하였고, 몽몽한 폭엽과 소란한 폭음에 우리들 가슴이 조여오는 것을 느끼었고, 섬을 일주한 결과 동도와 서도는 폭격으로 인하여 많이 분모되었으며 동도의 분화구의 1각은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확인하였다.
3. 해공군 각참모장의 명의로 미 제5공군이나 유엔함대기 등 모처럼 긴밀 연락과 교섭을 다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게 된 것은 유감천만이다. 그런데 독도를 우리의 발길 손길이 버텨나갈 여지없이 버려두어야 할 것인가.
4. 진남호와 광영호는 각각 울릉도에 귀항 귀로에는 파도가 상당히 높았다.

위의 기사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독도가 지금은 물론 당시에도 우리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이었음에도 당시 독도에 대한 우리의 배타적 관할권을 행사할 수 없었음을 볼 수 있다. 더욱이 학술조사단의 독도상륙과 관련하여 정부의 도움과 미군측에 협조를 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폭격이 계속되었다. 어떻게 이 사건을 이해할지 의문스럽다.


Ⅳ. 독도폭격사건과 영유권문제

1. 한일간의 논쟁


독도폭격사건은 양민학살사건이라는 문제 외에 독도영유권 문제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독도폭격사건을 독도영유권과 연결시켜 먼저 주장한 측은 일본이다. 일본은 1953년 7월 13일자로 우리 정부에 보낸 외교문서에서 이 사건을 거론하며 독도가 자국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일본 정부와 학자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이 연합국의 점령관리하에 있던 1951년 7월 6일 총사령부는 연합국 최고사령부 명령인 SCAPIN 제2160호로써 독도를 미군의 해상폭격연습지로 지정하였다. 1952년 4월 28일 대일강화조약이 발효되고 일본에 대한 연합국의 점령정책이 끝남에 따라 독도도 종전대로 도근현(島根縣) 은기(隱岐) 지청 관할로 복귀하는 것으로 되었다. 하지만, 미군이 독도를 계속해서 폭격연습장으로 할 것을 희망했기 때문에 '미일행정협정'에 의하여, 1952년 7월 26일 열린 미·일합동위원회에서 주일미군이 사용할 공군훈련구역으로 독도를 지정하게 되었다. 이것을 일본 외무성이 같은 날인 7월 26일자 고시 제34호를 통해 공시하였다. 그후 1953년 3월 19일 미·일합동위원회 소위원회는 독도를 미공군의 훈련구역에서 제외시켰는데, 이 해제 사실 또한 외무성을 통하여 1953년 5월 14일자 고시 제28호로 일반에 공시되었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미·일합동위원회의 협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일본국내 시설 또는 구역」이다. 따라서 독도가 이 위원회에서 다루어지고 미일행정협정에서 말하는 「구역」으로서 결정이 내려졌다고 하는 것은 바로 독도가 「일본국내의 시설 또는 구역」에 해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합동위원회가 연습 및 훈련구역으로서 지정을 해제한 경우에는 그 구역이 일본으로 반환되므로, 독도가 그 지정 해제에 의해 일본으로 반환되어 도근현(島根縣) 은기(隱岐) 지청 관할로 복귀되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정부의 주장에 대해 우리 정부는 1953년 9월 9일자로 보내는 외교문서에서 반박을 하였다. 우리 정부의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정부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미·일합동위원회를 통해 독도가 미공군의 훈련구역으로 지정되고 제외되는 것이 바로 독도가 일본의 영토임을 전제로 내려진 조치라고 해석하는 것은 일본정부의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오히려 한국정부가 미공군사령관에게 제기한 항의에 응하여, 1953년 2월 27일 미공군의 지정 작전구역에서 독도가 제외되었다는 것을 미군측이 한국정부에 공식적으로 통고해왔다. 이는 미국이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처리한 것임을 잘 나타내어준다.

2. 폭격연습지의 지정과 해제

독도가 미군의 폭격연습장으로 처음으로 지정된 것은 1947년 9월 16일 연합국 최고사령부 명령인 SCAPIN 제1778호에 의해서이다. 1951년 7월 6일 SCAPIN 제2160호는 SCAPIN 제1778호를 폐기함과 동시에 다시 독도를 폭격연습지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일본측의 주장에 의하면, 독도는 1952년 7월 26일 미일합동위원회에 의해 다시 한번 더 폭격연습장으로 지정되었다가 1953년 3월 19일 연습장에서 배제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SCAPIN 제1778호가 내려진 1947년이나 1948년 사건 당시 독도는

1946년 1월 29일 SCAPIN 677호에 의해 일본의 행정관할구역에서 제외되어 있었고, 1946년 6월 22일에 있은 SCAPIN 제1033호에 의해 일본의 어선들은 독도 12해리 내 수역으로의 접근이 금지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일본 어민들의 독도 출어는 금지되어 있었고, 1950년 5월 4일자로 미군측으로부터 회답받은 바와 같이 우리 어민들의 출어는 금지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 있었다.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독도는 우리나라 어민들에 의해 이용되고 있었다. 이것은 독도폭격문제를 다룬 1948년 6월 18일자 뉴욕타임즈 사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도는 '울릉도 주민들이 수세기전부터 조상 대대로 물려받으며 생활의 터전으로 삼아온' 섬이었다.
그런데 일본측의 주장으로는, '미일행정협정에 의하여, 독도가 일본의 구역으로서 1952년 7월 26일 열린 미·일합동위원회에서 주일미군이 사용할 공군훈련구역으로 독도를 지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일본 외무성이 같은 날인 7월 26일자 고시 제34호를 통해 공시하여, 약 8개월간 미공군의 훈련구역으로 독도가 사용되다가, 1953년 3월 19일 미·일합동위원회 소위원회에서 독도를 미공군의 훈련구역에서 제외시켰으며, 이 해제 사실 또한 외무성을 통하여 1953년 5월 14일자 고시 제28호로 일반에 공시되었다'고 한다.

일본측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미국은 1952년 당시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다루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니다. 1953년 9월 9일자 우리 정부의 주장처럼 독도가 폭격연습지에서 해제되는 과정을 보면, 미국측이 실질적으로는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다루고 있음을 또한 볼 수 있다.
1952년 9월 15일 독도폭격이 있고 약 2개월 후인 11월 10일, 우리 정부는 독도가 폭격연습장으로 지정된 것을 모르는 듯 미국대사관 앞으로 사건의 자료제공과 사건의 재발방지를 요구하는 공문서롤 보냈다. 20여일 후인 12월 4일 미국대사관으로부터 그에 대한 답장을 받았는데, 독도를 폭격연습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고 있다.

그로부터 20일 뒤인 12월 24일 미극동군사령부는 독도에 대한 폭격연습을 중지할 것을 결정하게 되고, 그 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1953년 1월 20일 미육군 소장 Thomas W. Herren명의로 독도를 폭격연습지로 사용하는 것을 즉시 중단하는 모든 조치를 취했다는 통고를 우리 정부 앞으로 해왔다. 그리고 1953년 2월 27일 우리 국방부가 웨이란드 미극동군사령관으로부터 독도주변에서 폭격연습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통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발표한다. 다시 그로부터 20일 뒤인 1953년 3월 19일 독도는 폭격연습지에서 배제되었다.

3. 폭격사건에의 일본개입문제

일본은 1952년 7월 26일 독도가 미일행정협정에 의해 일본의 구역으로서 미공군의 폭격연습지로 지정되었고, 그로부터 8개월 후인 1953년 3월 19일 미일합동위원회에서 해제되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이를 바탕으로 해제된 날로부터 4개월 후인 1953년 7월 13일자 외교문서를 통해 미국의 인정을 거론하며 '폭격연습구역의 지정 조치는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952년 7월 26일에 미일합동위원회에서 독도를 일본의 구역으로서 폭격연습지로 지정한 시기는 1952년 1월 18일 우리 정부의 평화선 선언으로 독도영유권문제가 한일 양국간에 치열한 외교적 논쟁거리가 되고 있었던 매우 민감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일본이 이미 1947년 9월 16일 SCAPIN 제1778호와 1951년 7월 6일 SCAPIN 제2160호에 의해 폭격연습지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다시 지정했다고 하는 것은 미일행정협정이라는 국제법과 미국이라는 강대국을 이용하여 우리보다 독도에 대한 우위의 지위를 확보하고자 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1948년 사건 이후 잠잠했던 독도폭격연습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52년 9월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의 독도상륙을 즈음하여 의도적이라고 의심되는 폭격이 연일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독도폭격시 일본의 개입을 의심나게 하는 부분이다.
1948년 6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미극동군사령부가 미군에 의한 폭격행위임을 발표한 이후의 시점에 한 일간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 지금 미군이 전의 왜병 神風침공대를 재편성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국제적으로 유포되고 있다. 왜병에 의한 폭격의심, 풍설 돌고 있다.


Ⅴ. 진상조사를 촉구하며


1948년 6월 8일 선량한 어민들이 오랫동안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땅에서 영문도 모른채 돌덩이같은 존재로 취급당하여 폭격에 죽어갔다. '인간은 존엄하다'라고 하는 말은 인종과 시대를 초월하여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천부적 권리로서 존엄하게 생활하다,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권리를 가진다. 존엄하게 죽지 못했다고 한다면, 진상파악을 통해 그들의 존엄성을 회복시켜주는 일은 살아남아 있는 자들의 몫이라고 생각된다. 사건의 진상파악은 그들만의 존엄성을 회복시켜주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후손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존엄성을 지켜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도 얼마의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갔으며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정확치 않다.

1948년 6월 8일 선량한 어민들이 독도에 피를 뿌린지 3년이 지난 1951년 6월 8일 경상북도지사(曺在千)의 참석하에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건립하고 위령제를 지내게 되었다. 독도의 동도가 마주 보이는 서도 자갈밭 위쪽에 위령비를 세웠다. 그날 바람과 파도가 심한데도 불구하고 위령제는 도지사를 비롯하여 많은 울릉도 주민들의 참석하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지나 이 위령비가 일본측에 의해 쇠망치로 파손되어 물 속에 내팽겨쳐지게 되었다. 이 내동댕이쳐진 위령비가 파도와 자갈에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다 독도의용수비대(대장 洪淳七)에 의해 건져졌으나, 이미 위령비의 모서리 군데군데가 달아나고 뒷면에 새긴 글들은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조난당한 어민들을 추모하고자 했던 비석마저 조난을 당하게 되었다. 선량한 어민들의 생명뿐만 아니라 독도의 운명마저 이 위령비의 운명처럼 이리 쪼이고 저리 굴리다, 한낱 돌덩이로 남을지도 모른다.

독도폭격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는 영문도 모른채 죽어간 우리 어민들의 인간 존엄성을 확인하고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작업일뿐만 아니라, 독도영유권문제와 이를 둘러싼 미국과 일본의 태도 그리고 三峯島의 모습을 갖춘 독도 지형의 변화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작업이라 생각된다. 국가차원에서 독도폭격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이 일에 무엇보다 독도폭격사건을 접했던 제헌국회 이래, 반세기가 넘도록 그 진상조사의 소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있는 국회가 직접 나서 그 진상을 밝힐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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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 요 | 이 책은 2008년도에 일본 중의원에서 독도문제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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