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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2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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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관리의 울릉도, 독도 지키기 - 이규원

이미 지난 늦봄의 기운이 갑자기 온 마음에 회동해서 인지 잠시 슬픈 생각을 전하게 된다.  내가 밟고 있는 땅덩어리가 문득 사람처럼 느껴진다.  형제 많은 집의 한 식구처럼 그렇게 여겨진다.  그중 왠지 늘 살펴봐야 할 막둥이처럼 다가오는 땅덩어리가 있다.  호랑이가 웅비하려는 몸짓으로 있는 한 몸으로 있는 육지에 비해 왠지 안쓰럽게 보이는 울릉도가 그렇고, 독도가 그렇다.  울릉도와 독도를 생각하며 슬퍼지는 이유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 식구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늘 거르지 않고 한번씩 남의 식구에게 혼나는 그 땅이 불쌍하고 또 미안한 마음에 한량없이 슬픔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 슬픔은 곧 부끄러움이 된다.  지켜내지 못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왠 난데없는 억지울음이냐며 비웃을 주위의 눈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왜일까.  내 땅을 내 식구처럼 여기며 슬픈 상념에 젖는 그 잠깐 사이에 스스로 그 마음을 겸연쩍어함은 왜일까.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까닭일 게다.  만약 한 식구에 대한 미안함과 불쌍함을 이야기하는 대신 울릉도나 독도가 갖는 경제적 가치와 수입을 숫자로 따지며 그 이익을 이야기했다면 당당했을 게다.  도리어 나의 해박한 산술적 지식에 도취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우리는 어느새 마음의 척도를 잃고 있었다.  민족은 국수주의로, 애국은 반공주의로, 모든 선행은 경제적 이득으로 자리 바뀜 되었다.  하지만 좀 떨어진 옛날 어떤 관리는 왕 앞에서“설사 한치의 땅이라도 그것은 바로 조상들의 강토인데 어떻게 등한히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그가 바로 이규원 이다.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은 안용복의 기개 있는 행동으로 17세기 이래로 한동안 잠잠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엽부터 다시 일본인들의 내왕이 시작되었는데 일본인들은 울릉도에‘송도’라는 푯말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1881년 고종 18년에 조선 수토관에 의해 일본인의 내왕이 조정에 보고되어 이에 이규원을 울릉도검찰사에 임명하여 현지에 파견하여 시찰하게 하고 한편으론 개척 가능성을 검토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공도 정책에 대한 수정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규원은 1833년 순조 33년에 태어나 1901년에 죽은 조선말기의 무신이다.  무신은 문신에 상대되는 말로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온 사람을 말한다.  그는 방어를 위한 요새진에 대한 이해가 뛰어났으며 평생을 외관직을 하며 백성의 생활을 바로 곁에서 지켜본 실무자였다.  남쪽으로는 제주의 관찰사였고 그 외의 여러 섬을 살피는 관리였다.  북쪽으로는 함경남․북도의 관찰사였으며 한동안은 수도의 안팎을 지키는 군인이기도 하였다.  통진부사 였을 때는 그곳이 섬이라서 논이 없는데도 부과된 세금을 쌀로 내야 하는 잘못을 돈으로 바꿀 것을 요청하였고, 제주와 함경남․북도의 관찰사였을 때는 흉년에 따른 백성의 어려운 형편을 조정에 정확히 알려 빌려 쓴 환곡의 환납 기한을 연장하는 등의 일을 수행하였다.  통진에 있을 때 마침 일본군함이 허락 없이 이곳에 정박한 적이 있었다.  이 곳뿐만 아니라 인천까지 해안의 수심을 잰다는 이유로 불법적인 항해를 자행하였다.  동남의 여러 섬을 개척하는 업무를 맡아보기도 하였던 그에게 일본과의 잦은 충돌은 실제로 몸으로 부딪치는 실제적인 일이었다.  그러하기에 그가 울릉도를 시찰하는 임무를 맡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규원은 1882년에 울릉도를 조사하고 그 내용을 문서로 올릴 뿐만 아니라 지도도 함께 작성하여 울릉도의 실제를 조정에 최대한 자세히 올렸다.  그가 살펴볼 때의 울릉도는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꽉 들어차서 하루 종일을 걸어도 햇빛 한 점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심지도 않았는데 뽕나무, 닥나무, 모시풀이 섬에 자라는 일이 너무나 희한하게 여겨졌고, 이미 약재를 캐고 미역과 전복을 따러 여러 도의 사람들이 제법 많이 살고 있었다.  또한 이미 보고된 대로‘송도’라는 푯말이 있음을 직접 왕에게 아뢰었다.  이에 따라 일본에 항의 서문을 보내고 곧바로 개척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규원은 개척사업에 앞서 이주민의 생활을 고려하여 배의 부두시설 등의 마련 등도 함께 요청하였다.  결국 개척사업의 일환으로 1883년 4월에 우선 각 도로부터 모집한 16호 54명을 울릉도에 이주시켰다.  이후로 울릉도에 거주하는 주민이 안정적으로 늘어갔고 이에 따라 전임 도장(島長)의 임명이 요청되었다.  1895년 1월에 전임 도장을 두게 되었고 1898년 5월에는 지방관제를 개칭하여 울릉도를 편입시켰다.
 
무슨 일에나 때가 있다고도 하고, 어떤 일에나 맞는 재목이 있다고 한다.  제대로 된 인물을 적소에 두어 일을 제때에 처리하는 것만큼 최선의 방책은 없다.  그 점에서 1882년 울릉도를 시찰하였던 울릉도검찰사 이규원은 제 역할을 충실하게 하였던 올바른 공무원이다.  어떤 직함이나 관리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로 공무를 수행한다는 넓은 의미의 공무원을 이규원과 연결하니 순간 그전과는 다른 가벼운 느낌을 준다.  아마도 공무원은‘복지부동’과 한 쌍을 이루어 떠오는 낱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영웅이 나타나 영토를 지켜내는 일만큼 계속되는 외부의 침탈의도를 제때에 파악하고 알맞게 대처하는 일은 그만큼 중요한 일임에는 이설이 있을 수 없다.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영웅의 모범은 따를 수 있는 것이기보다는 흠모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영웅들이 품었던 조국과 민족, 그리고 우리 영토에 대한 사랑을 모두의 가슴에 담고 이규원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그 마음을 실어 올바르게 일을 처리한다면 한 줌의 흙도 남의 손에 넘기는 일 없이 우리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줄 수 있을 것이고 그 마음 또한 그대로 전해져 그렇게 후손들도 지켜낼 것이다.

 독도본부 소식지 탑골인 밝은이 2002년 6월  이선희(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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