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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9월 22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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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부의 울릉도, 독도 지키기

한 어부의 울릉도, 독도 지키기 

  “역사는 반복되는가”라는 화두는 너무나 무겁다.  역사라는 시간적 양이 너무 길어서 무겁고 그 역사를 꾸려 가는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무겁다.  그러나 근본(本)과 현상 (末)의 테두리에서만 본다면 분명 역사는 반복된다.  어떤 모습이 각 시대마다 비슷하게 보이는 경우 그 현상의 원인을 살펴보면 의외로 같은 문제에서 파생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의 실타래를 온전히 풀어헤치지 않는 이상 그 문제로 생기는 여러 사건의 모습은 퍽이나 닮아 있음이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3년부터 1956년까지 오로지 민간인의 조직과 노력으로 독도를 지켰다.  독도의용수비대의 홍순칠대장은 그의 할아버지인 홍재현에게 어린 시절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다.  홍재현은 한말에 이루어진 울릉도 이주 1세대였는데 1898년 고기잡이를 하러 독도에 갔다가 바다사자를 잡아 파는 동물상인 무라카미(村上)라는 일본인을 만나 일본까지 동행하여 그 곳 관헌에게 일본인의 독도 출입을 금지 할 것을 당부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참 흡사하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안용복 역시 동래어민 40여명과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고기를 잡기 위하여 침입한 일본어민을 만나 이를 힐책하다가 그의 오랜 친구였던 박어둔(朴於屯)과 함께 일본으로 잡혀갔고 그곳에서 울릉도가 우리 땅임을 분명히 하고 이를 확인하는 공식문서까지 받아왔으니 말이다.
 
울릉도는 삼국시대에는 우산국이라는 작은 독립왕국이었다.  그러나 신라에 조공을 바치는 입장이었는데 신라의 지증왕 512년에 아슬라주(지금의 강릉)의 군주(軍主)인 이사부 장군이 정벌에 나서서 결국 신라에 편입되었다.  고려 때에는 울릉도.우릉도.무릉도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웠는데 고려 현종 때 함경도 지방에 살던 여진족이 울릉도에 자주 쳐들어와서 도민을 괴롭혔다.  이에 울릉도민을 본토로 이주시키게 하여 그 뒤로는 무인도가 되었다. 

그러나 워낙 황금어장인 울릉도에는 정치가 어지러워 관리가 소홀할 때면 언제나 몰래 이주하여 사는 어민이 있었다.  또 군역을 피해 울릉도로 숨어드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런 사람들로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걸치는 기간 동안 울릉도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하지만 왜적들의 침략이 잦아 안전한 생활을 누리기는 힘들었다.  이에 1417년 조선 태종은 관리를 파견하여 왜적에게 시달림을 받는 울릉도민과 국법을 피해 도망가 있는 자들을 본토로 돌아오게 하였다.  1425년 세종 때도 울릉도민을 불러들이려 하였지만 풍부한 어장에는 늘 어민이 있었다.  결국 세종은 울릉도민을 모두 육지로 귀환시키되 경상도와 강원도 감사에게 울릉도 근해에 군선을 보내어 그곳 어장에서 어부들이 왜적의 위협 없이 안전하게 어로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다시 무인도가 된 울릉도에는 일본의 이나바주나 호키주 등지의 일본어민들이 자주 와서 어업활동을 하였다.  이로 인해 양국의 어부들은 잦은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 이후 끊어졌던 국교는 광해군 원년에 일본과 기유약조를 체결함에 따라 다시 열렸다.  이를 통해 일본인의 출입은 부산포에만 국한되었는데 일본은 광해군 때부터 아예 울릉도를 이와다케시마 (磯竹島) 또는 다케시마(竹島)라고 이름짓고, 일본의 땅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1614년 광해군 때 대마도주(對馬島主) 소오(宗義智)는 우리나라 동래부에 사신을 보내어, “경상도와 강원도 중간 해상에 있는 울릉도는 우리의 영토인 듯하니 조사하겠다.”는 주장을 했다.  우리 조정은 동래부사 윤수겸 에게 항의문서를 일본에 보낼 것을 명령하면서,“대마도주가 말하는 이와다케시마란 우리나라의 울릉도를 말하고 있으니, 우리 국토임을 명백히 밝혀 주라.  아울러 그들의 그릇된 생각을 없애는 한편, 앞으로 울릉도에 불법 침입하면 적으로 단정하고 무찌르겠다는 것을 명백히 하라.”고 지시하였다. 

우리의 항의문서가 전달된 후 한동안의 평화도 지나간 3년 후인 1617년 일본 어부들은 일본측 조정의 보호를 받으며 고기를 잡기 위해 세력 있는 관리들에게 울릉도로 갈 수 있는 허가증을 발급 받아 그 후로 계속 울릉도에 출어 하였다.  이에 우리 어민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이런 사정으로 안용복이 숙종 19년인 1693년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일본어민과 부딪친 것도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안용복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여러 자료에서 찾아지지만 그의 일생을 자세히 알기는 힘들다.  당장 그의 출생과 사망에 대한 기록도 없다.  다만 그가 동래부 출신으로 홀어머니 아래에서 엄하게 자랐으며 어릴 때부터 부산의 왜관(倭館)을 자주 출입하면서 일본말을 배워 본국인으로 오해받을 만큼의 일본어 실력을 쌓았고 장성하여서는 수군에 들어갔었으나 곧 그곳을 나와 어부로써 생활했다는 정도로 매우 소략하다.  그에 대한 기록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울릉도와 일본에 관련된 내용이다.
 
안용복이 일본에 간 것은 두 번이었다.  처음은 앞서 말한 대로 울릉도에 고기잡이하러 갔던 1693년으로 박어둔과 함께 일본에 잡혀갔을 때다.  이때 호키주(百耆州)태수와 에도막부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농간을 부리는 것이 심함을 밝히고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하는 문서를 받아냈다. 

그러나 돌아오던 중 대마도주에게 잡혀서 문서를 빼앗기고 구금되었다.  대마도주는 울릉도를 차지하기 위해 다케시마(竹島)문서를 위조하여 같은 해 9월 사신을 동래에 보내어 안용복을 송환하는 동시에 예조에 문서를 보내 조선의 어민이 일본영토인 다케시마에서 고기 잡는 것을 금지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대한 답신으로,“비록 우리나라의 울릉도일지라도 아득히 멀리 있는 이유로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지금 이 어선이 감히 일본의 죽도(울릉도를 칭함)에 들어간 일로 번거롭게 돌려보내도록 하고, 멀리서 서신으로 알리게 되었으니, 이웃나라와 교제하는 정의로는 실로 기쁘게 느끼는 바입니다.  바다 백성이 고기를 잡아서 생계로 삼게되니 물에 떠내려가는 근심이 없을 수 없지마는, 국경을 넘어 깊이 들어가서 난잡하게 고기를 잡는 것은 법으로서도 마땅히 엄하게 징계하여야 할 것이므로, 지금 범인들을 형률에 의거하여 죄를 주고, 이후에는 연해 등지에서의 어업활동에 관한 것을 엄하게 제정하여 이를 지키도록 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즉 ‘비워둔 땅‘으로 인해 왜인과의 평화를 굳이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좋지 않다는 무사주의의 안일한 외교정책으로 인해 멀리 떨어진 섬에 왕래를 금지하는 우리측의 공도정책(空島政策)에 일본도 협조할 것을 권하는 내용의 문서를 예조에서 작성하여 동래의 일본사신에게 보냈다.
 
그러나 다음해인 1694년 8월에 대마도주는 다시 사신을 보내어 예조에서 작성하여 보낸 문서를 반환하면서‘울릉도’란 말을 빼고 다시 작성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전에 보낸 문서에 울릉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었다.  일본측의 무례한 요구에 새롭게 바뀐 영의정 남구만 등의 의정부 재상의 입장은 강경하여 울릉도에 조사관을 파견하고 일본측에는 이를 힐책하는 문서를 보냈다.
 
안용복의 두 번째 일본행은 1696년 봄에 10여명의 어부들과 울릉도에서 어로작업을 하다가 마침 출어한 일본어선을 발견하고 송도(松島)까지 추격하여 그들이 우리의 영토에 들어와 고기를 잡는 것은 침범행위임을 분명히 밝히고 추궁한 때였다. 

또 추궁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껴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島監稅官)이라는 가짜 관리직으로 스스로를 밝히고 일본 호키주에 가서 태수에게 남의 영토를 침범한 사실을 항의하고 사과를 받아낸 후 귀향하였다.  그가 얻어 낸 결과가 훌륭하였고 관리를 사칭한 것도 도리어 애국심의 발현이었다는 사정이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그는 나라의 허락 없이 거짓관리행세를 하여 국제문제를 일으켰다는 죄명으로 조정에 압송되어 사형까지 논의되었고 이전에 대마도주에게 빼앗겨 증명할 수 없었던 문서의 진위여부까지 의심받게 되었다.  그러나 남구만의 간곡한 만류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가 귀양을 간 다음해인 1697년 대마도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하고 울릉도를 조선 땅으로 확인한다는 막부의 통지를 보냈으나 안용복의 죄는 풀리지 않았다.  안용복의 용기 있는 기개로 울릉도에 대한 일본과의 마찰은 철종 시대까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안용복이 비변사에서 조사를 받을 때 진술한 그의 말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누구의 말도 아닌 본인의 말을 통해 안용복이란 한 어부가 조상 대대로 이어받은 우리의 땅을 어찌 생각하였는지 느꼈으면 한다.

  “저는 본디 동래에 사는데, 어미를 보러 울산에 갔다가 마침 뇌헌스님 등을 만나서 근년에 울릉도에 왕래한 일을 자세히 말하고, 또 그 섬에 해물이 많다는 것을 말하였더니, 뇌헌 등이 이롭게 여겼습니다.  드디어 같이 배를 타고 영해 사는 뱃사공 유일부 등과 함께 떠나 그 섬에 이르렀는데, 주산(主山)인 삼봉은 삼각산보다 높았고, 남에서 북까지는 이틀길이고 동에서 서까지도 그러하였습니다.  산에는 잡목.매.까마귀.고양이가 많았고, 왜선도 많이 와서 정박하여 있으므로 뱃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습니다. 

제가 앞장서서 말하기를, ‘울릉도는 본디 우리 지경인데, 왜인이 어찌하여 감히 지경을 넘어 침범하였는가? 너희들을 모두 포박하여야 하겠다.’하고, 이어서 뱃머리에 나아가 큰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디 송도(松都)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하러 나왔다.  이제 되돌아갈 것이다.’하므로, ‘송도는 우산도(于山島)로서, 그것도 우리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하였습니다. 

드디어 이튿날 새벽에 배를 몰아 자산도에 갔는데, 왜인들이 막 가마솥을 벌여 놓고 고기 기름을 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막대기로 쳐서 깨뜨리고 큰 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들이 거두어 배에 싣고서 돛을 올리고 돌아가므로, 제가 곧 배를 타고 뒤쫓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광풍을 만나 표류하여 옥기소(玉岐島)에 이르렀는데, 도주(島主)가 들어온 까닭을 물으므로, 제가 말하기를,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울릉도․우산도 등을 조선의 지경으로 정하고, 막부의 문서까지 받았는데, 이 나라에서는 제대로 된 법이 없어서 이제 또 우리 지경을 침범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하자, 마땅히 백기주(百耆州)에 전보하겠다고 하였으나,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습니다.
 

제가 분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여 배를 타고 곧장 백기주로 가서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島監稅官)라 가칭하고 장차 사람을 시켜 본도에 통고하려 하는데, 그 섬에서 사람과 말을 보내어 맞이하므로, 저는 푸른 비단옷을 입고 검은 갓을 쓰고 가죽신을 신고 교자를 타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말을 타고서 그 고을로 갔습니다. 

저는 도주와 대청 위에 마주앉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아랫단에 앉았는데, 도주가 묻기를,‘어찌하여 들어왔는가?’하므로, 답하기를‘전일 두 섬의 일로 문서를 받아낸 것이 명백할 뿐만이 아닌데, 대마도주(對馬島主)가 그 문서를 빼앗고는 중간에서 위조하여 두세 번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법을 어겨 함부로 침범하였으니, 내가 장차 관백(關白-옛날 일본의 벼슬이름)에게 상소하여 죄상을 두루 말하려 한다.’하였더니, 도주가 허락하였습니다. 

드디어 이인성으로 하여금 글을지어 바치게 하자, 도주의 아비가 백기주에 간청하여 오기를,‘이 글을 올리면 내 아들이 반드시 중한 죄를 얻어 죽게 될 것이니 바치지 말기 바란다.’하였으므로, 관백에게 바치지는 못하였으나, 얼마 전에 지경을 침범한 왜인 15인을 적발하여 처벌하였습니다. 

이어서 저에게 말하기를,‘두 섬은 이미 너희 나라에 속하였으니, 뒤에 혹 다시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가 있거나 도주가 혹 함부로 침범하거든, 모두 국서(國書)를 만들어 역관(譯官)을 정하여 들여보내면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하고, 이어서 양식을 주고 사신을 정하여 호송하려 하였으나, 제가 데려가는 것은 폐단이 있다고 사양하였습니다.”


독도본부 소식지[탑골인 밝은이 2002년 5월호] 이선희(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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